▲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살인의 추 억>의 한 장면 | ||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수사했던 한 형사가 최근 자신의 범인 추적기록을 바탕으로 한 수사보고서를 출간해 다시 한번 화성사건이 세인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영화 <살인의 추억> 주인공의 실제모델이기도 한 하승균 경기지방경찰청 강력계장(57)은 지난 86년부터 91년까지 오로지 이 사건에만 매달려 밤낮 없이 뛰어온 인물.
그는 자신의 저서 <화성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생각의나무)를 통해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수사내용과 범인의 신체적 특징, 결정적인 목격자의 확보과정, 살아남은 피해자와 범인간의 대화 내용 등을 최초로 공개했다.
▲범인의 둘째손가락에는 흉터, 왼쪽 손목에는 문신이 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이 미궁으로 빠진 이유 중의 하나는 목격자가 없었다는 점이다. 초동수사에서 확실한 가닥을 잡지 못한 만큼 지루하면서도 막막한 탐문수사에 의존해야했다. 그러던 것이 88년 9월의 7차 사건에 이르러 결정적인 목격자를 찾기에 이르렀다.
피해자 안희순씨(가명·54)의 사건 현장을 둘러보던 하승균 계장은 사체 주위의 풀들 중 일부가 유독 한쪽 방향으로만 쓰러져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그 길을 따라 4백여m를 걸어가자 눈앞에 펼쳐진 것은 수원-발안간 지방도로.
당시 하 계장은 범인의 거주지를 화성시 일대가 아니라 수원시로 판단하고 있었던 만큼 ‘범인이 그 길에서 버스를 잡아타고 수원으로 돌아간 것이 아닌가’라는 추리를 해냈다.
또 당시 범행일인 9월7일은 이슬이 내린다는 백로(白露) 직전인 만큼 범인이 들판을 헤쳐갔다면 바지가 온통 젖어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실낱같은 희망으로 수원행 버스를 상대로 탐문 조사를 한 결과 당일 밤에 예의 풀길의 끝에서 한 남성이 손을 흔들며 버스를 잡았다는 버스 운전기사와 안내양을 목격자로 확보할 수 있었다. 그때 버스기사는 범인과 여러 차례 접촉이 있었기에 비교적 상세하게 그의 얼굴과 신체적 특징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
우선 범인은 버스에 타자마자 운전석 옆의 보닛에 발을 올려놓았다. 기사가 ‘보닛은 운전수의 밥그릇이니까 어서 발을 내려놓으세요’라는 가시돋친 말을 하면서 범인의 얼굴을 째려보았다.
잠시 후 범인이 기사에게 담뱃불을 빌려달라고 했을 때 불꽃을 감싸는 그의 손을 보면서 오른쪽 둘째 손가락에 작은 흉터와 왼손 손목에 있는 밤알 크기의 문신(점)까지 확인했다. 나아가 그 남성의 바지가 온통 젖어있었기에 목격자의 증언과 하 계장의 추리가 일치해 그 신빙성을 더해주었다. 이렇게 범인의 신체적인 특정이 확인된 것은 최초의 일이었다.
▲ 하승균 강력계장이 펴낸 화성 사건에 대한 보고 서 <화성은 끝나지 않았다>. | ||
86년 11월30일 밤 연쇄살인범에게 성폭행을 당한 후 유일하게 살아남은 김아무개여인. 그녀는 당시 범인과 짧지만 강렬한 인상의 대화를 나눴다. 피해자의 손을 뒤로 묶은 채 성폭행을 한 범인은 바지를 주섬주섬 추켜 올리며 저음의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네 이년, 죽기 전에 어서 가지고 있는 돈 다 내놔.”
하지만 그녀는 당시 입에 재갈을 물고 있는 상태라 웅얼거릴 뿐 말을 할 수 없었다. 범인은 재갈을 풀어주는 대신 날카로운 것을 옆구리에 갖다대며 다시 한번 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만일 소리라도 지르는 날에는 지금 당장 네년을 죽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당신이 나를 끌고 올 때 논길 위에 가방을 떨어뜨렸어요. 돈은 가방 안에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범인은 순간적으로 ‘이, 썅’이라는 짧은 욕을 내뱉으며 논을 향해 뛰어갔다는 것. 하지만 범인은 손까지 뒤로 묶인 피해자가 미처 도망갈 것이라고 생각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범인이 눈에서 사라지자 김 여인은 죽을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고 불빛이 보이는 곳으로 뛰기 시작했다.
김 여인은 다행히 목숨을 건질 수는 있었지만 하 계장은 “이 사건으로 인해 범인이 더욱 잔인해졌다”고 분석하고 있다. 실패에 대한 자책, 혹은 실패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살해 후 그 전의 사건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음부난행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성의 성기를 우산으로 찌르거나(4차, 7차 사건), 볼펜, 포크, 수저를 삽입하거나(8차 사건), 양말을 삽입하는 등(9차 사건) 그 잔악함과 엽기성이 극에 달했다.
▲범인이 경찰의 수사를 바로 잡아주었다?
마지막 9차 사건까지 공통적인 것은 범인이 흉기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2차와 8차 사건에서 피해자의 가슴을 드라이버나 칼을 이용해 상처를 내기는 했지만 모두 피해자 자신의 소지품 중 일부였다. 이러한 사실은 범인이 얼마나 치밀한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는 것. 특히 자칫 흉기를 사용했을 때 피가 옷에 튀면 타인의 시선을 받을 수 있고 경찰의 검문검색에서 단속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한 치밀한 전략이라는 것. 또 하 계장은 범인이 경찰과 치밀한 두뇌싸움은 물론이거니와 마치 경찰의 수사를 바로 잡아주는 듯한 느낌도 받았다는 것. 그는 책에 이렇게 적고 있다.
‘(범인은) 자기 혼자 수많은 경찰과 대적하고 있는 것에 대한 묘한 흥분을 느끼고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 와중에 진범인 자신을 놔두고 수사본부에서 엉뚱한 사람을 검거하여 그 사실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 범인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또다시 범행을 저지르는 듯 보였다. 마치 경찰의 어긋난 수사를 바로 잡아주려는 행동 같았다.’
▲한 역술인의 전화 ‘언덕 위 함석집에 사는 남성이 범인’
6차 사건 이후 수사본부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자신을 ‘전북의 한 역술인’이라고 소개한 그 남성은 ‘기(氣)로써 음양의 조화를 알 수 있고 이를 이용하면 범인을 잡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범인의 위치까지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