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랜드 카지노장에 때아닌 ‘히치하이킹 주의보’가 내려졌다.
정선 강원랜드 카지노장에서 밤새도록 게임을 즐기고 새벽에 게임장을 나오다 시내까지 차를 태워달라고 접근한 남성 혹은 여성에게 유인당해 수억원대 돈을 뜯기는 피해가 속출하고 있는 것.
이 같은 사건은 지난 12월11일 강원도 정선경찰서에 한 사기도박단이 검거되면서 드러났다.
경찰조사 결과 사기도박단은 지난 7월부터 모집책을 동원, 카지노 고객을 사북 부근의 식당이나 여관으로 유인한 뒤 마약이 든 커피나 음료수를 먹여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어놓고 도박판을 벌려 수억원대를 갈취했다는 것이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신종 사기도박이 등장한 셈.
지난 10월2일 정선 강원랜드 카지노. 이날 원주에 거주하는 배아무개씨(35)는 초저녁부터 슬롯머신을 즐기다 새벽 6시께 카지노장을 나섰다. 배씨는 졸린 눈을 부비며 자신의 승용차로 향하고 있었다.
배씨가 막 출발하려고 했을 때 40대 남자가 엄지를 치켜들며 차로 다가왔다. 그는 ‘근사하게 늙었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미남형이었다. 그는 “택시가 없다”며 사북 시내까지 좀 태워줄 것을 부탁했다. 배씨는 인상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별다른 거부감없이 그를 차에 태웠다.
올해 49세의 김아무개씨라고 신분을 밝힌 이 남자는 연신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감사의 표시로 아침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다”고 말했다. 배씨도 마침 출출하던 터라 김씨가 안내한 정선군 소재 H식당으로 갔다.
그러나 이 식당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김씨는 서서히 돌변하기 시작했다. 김씨는 식사를 하면서 배씨가 가게를 오픈하기 위해 꽤 많은 돈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뒤 본격적인 ‘작업’에 나섰다. 김씨는 배씨의 커피에 ‘슬리반’ 두 알을 몰래 탔다. 슬리반은 환각효과를 일으키는 로라제팜 성분의 향정신성 의약품이다.
김씨는 배씨의 정신을 몽롱하게 만든 뒤 도박을 하게끔 해 돈을 뜯어내려는 계산이었다. 슬리반은 다른 조직원인 조아무개씨가 입수한 것. 평소 충남 홍성의 한 병원에서 우울증 치료를 받아오던 조씨가 범행을 위해 같은 조직원인 자신의 내연녀를 시켜 담당의사 김아무개씨(39)에게 슬리반 4백20알을 얻어온 것이었다. 의사 김씨도 지난 12월11일 아무런 처방전 없이 슬리반을 제공한 혐의로 뒤늦게 구속됐다.
어쨌든 배씨가 커피를 마신 지 20분 정도가 지난 뒤 몽롱한 상태에 빠지자 김씨는 자신의 조직원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김씨의 연락을 받고 식당으로 달려온 조직원들은 그야말로 사기도박단원들이었다.
경찰조사 결과 이들은 태백 지역 내의 펜션, 민박집 등을 돌며 이런 수법으로 강원랜드 고객을 유인, 사기도박을 벌이고 수억원대 이득을 취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도박단 구성원들은 대부분 사기 전과 7∼8범의 ‘전문가’들이었다.
이들은 범행 대상을 유인하는 모집책, 사기도박을 벌이는 행동대원, 그리고 수표 세탁이나 계좌 이체를 담당하는 기술진 등으로 역할분담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날도 여느때처럼 식당 손님으로 가장한 뒤 배씨에게 접근했다. 경찰 진술서에 의하면 이들은 정신이 몽롱한 배씨에게 “강원랜드에 놀러 오셨나봐요. 재미 좀 보셨습니까” 등의 말을 건네며 접근했다. 그런 다음 배씨에게 미끼를 던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배씨에게 “카지노는 10시에 개장인데, 우리 남은 시간 동안 음료수 내기 고스톱이나 한 판 치자”는 제안을 했다.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인 배씨. 그러나 그것이 화근이었다. 고스톱에는 일가견이 있다며 덤벼든 배씨였지만 ‘짜고 치는 판’에서 힘을 쓰지 못한 것은 당연지사.
수중에 갖고 있던 현금 5백만원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이후 ‘도리짓고땡’ ‘포커’ ‘훌라’ 등 다양한 종류의 판이 벌어지면서 판돈은 더욱 커졌다. 기본 판돈은 수십만원을 넘어섰다. 판이 시작된 지 두 시간쯤 지났을 때 배씨가 잃은 돈은 무려 억대가 넘었다. 1억3천5백만원이라는 거금이 두 시간 만에 이들 사기도박단이 관리하는 차명계좌로 이체된 것이다.
경찰이 이들 사기도박단에 대한 첩보를 입수한 것은 지난 7월. 당시 꼬리를 잡지 못하고 있던 경찰은 배씨의 신고로 도박단을 일망타진했다. 경찰은 현재 김씨 등 5명을 사기 및 마약류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하고 다른 한 명은 불구속 입건했다. 달아난 나머지 조직원 14명을 전국에 수배한 상태.
경찰 조사 결과 이 사기도박단은 올 초부터 배씨를 포함해 9명을 대상으로 범행을 저질러 2억원 상당을 편취한 것으로 밝혀졌다.
흥미로운 것은 배씨를 제외한 나머지 피해자들의 경우 미모의 여성을 동원해 유혹한 뒤 비슷한 방법으로 사기도박판을 벌여 돈을 갈취했다는 점.
최근 강원랜드에는 이 같은 사기도박단 이외에도 카드깡 등 불법적인 방법의 금전범죄가 부쩍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카드깡의 경우 이동식 신용카드 단말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카지노에서 돈을 모두 잃은 고객들을 상대로 즉석 현금대출 등을 유혹하고 있다. 문제는 대출을 해줄 때 파격적인 비율의 선이자를 뗀다는 것. 일부 악덕 카드깡업자의 경우 대출금의 30%까지 선이자를 떼는 것으로 전해졌다.
정선경찰서 관계자는 “카드깡 전문업자들은 워낙 비밀리에 고객에게 접근하는 데다 카드기계의 상표 등록을 수시로 바꿔 사용하기 때문에 적발하기가 쉽지 않다”며 카지노 고객들의 각별한 주의를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