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올드보이, 킹만수, 강고집, 경제대통령’으로 불린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의 소회다. 이명박 정부에서도 ‘만수무강’으로 통하며 막강한 권한을 휘두른 강 전 장관. 지난 5일 그가 <현장에서 본 경제위기 대응실록>이란 책을 냈다. 그는 1997년 IMF 사태 때는 차관으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는 장관으로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입안했던 정책, 대책, 국정 철학 등을 밝혔다. 머리말에서 “기록하는 과정에서 본의와 다르게 상처를 입을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한다”고 한 것처럼 기획재정부 과장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사람을 실명으로 비판해 파문이 일었다.
2009년 12월 청와대 춘추관에서 브리핑하는 강만수 당시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 그는 최근 펴낸 비망록에서 경제관료들을 실명으로 비판해 주목을 끌었다. 사진제공=청와대
<경제위기 대응실록>은 크게 IMF 사태와 글로벌 금융위기로 나눠볼 수 있다. 강만수 전 장관의 첫 번째 ‘저격’은 임창열 전 재정경제원 장관이다. 그는 1997년 IMF 구제금융 신청을 앞두고 장관직에 올랐다. 강 전 장관은 임 전 장관이 구제금융 신청 협상이 모두 끝난 후에도 구제금융 지원을 망설이다 시장의 신뢰를 잃게 했다고 썼다. 임 전 장관의 3일간의 망설임으로 단기자금의 회수가 계속됐고, 대외신뢰도에도 상당한 타격을 줬다는 것이다. 강 전 장관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피할 수 없다면 하루 빨리 가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적었다.
변양호 보고펀드 공동대표도 등장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선거에 이긴 뒤 관가에 세력 교체 바람이 불었고 1998년 1월 6일 뉴욕 외채협상 출장을 가기로 했던 강 전 장관 대신 정덕구 차관보를, 만기조정협상을 담당해온 진영욱 과장도 변양호 과장으로 교체됐다고 한다. 강 전 장관은 정 차관보와 변 과장을 불러 “우리가 벼랑 끝에 섰지만 지금 우리는 칼자루를 잡고 외국은행이 칼끝을 잡은 형국이다. 버티면 이긴다”고 당부했다. 하지만 강 전 장관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뉴욕 협상의 승리는 국제금융 전문가였다고 한다.
강 전 장관은 “당시 자문역으로 동행했던 미국 컨설팅회사 부즈 앨런 앤드 해밀턴 코리아의 장종현 대표가 좀 더 유리한 내용으로 할 수 있었는데 한국 대표들이 너무 빨리 승낙한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며 “당시 국제금융 전문가들은 과거 멕시코나 브라질에게는 대출 원금을 10~30%씩 탕감해주고 금리도 낮춰주었던 것에 비하면 한국은 정부보증에다가 금리도 높았다”고 아쉬워했다.
IMF 환란 이후 강 전 장관은 “‘단군 이래의 최대 국란’이라는 말을 앞세운 정치적 공세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갔고 언론의 비난도 더 강해져갔다”며 “임창열 장관은 외환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사람이 되었고 강경식 장관과 함께 외환위기를 관리했던 사람들은 모두 환란을 부른 사람의 대열로 밀려났다”고 분노했다. 강 전 장관은 “과연 누가 불을 냈고, 누가 불길에 기름을 부었고, 누가 불길을 잡았는가? 고독과 분노가 밀려왔다”고 회고했다. 강 전 장관은 “좌파정부 밑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없을 것 같았고 세력교체 분위기가 관가에도 강하게 불었다”며 “28년간의 공직생활을 정리하고 재정경제부를 떠났다”고 적었다.
강 전 장관은 2008년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환율 관리라고 말했다. 강 전 장관 재임시 가장 큰 비판에 직면한 정책도 고환율 정책이었다. 그는 “대외균형 우선론자인 최중경 차관을 2008년 7월 7일에 눈물로 보냈다”며 “위기보다 미국 경제학, 그리고 한국은행과 싸우는 것이 더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최 전 차관은 강 전 장관과 함께 이른바 ‘최강라인’으로 불렸다. 지식경제부 장관으로 돌아오기도 했던 최 전 차관은 환율 주권론을 주창하다 인위적 고환율 정책으로 환율 폭등을 부추겼다는 책임을 지고 경질됐다.
강 전 장관은 <현장에서 본 경제위기 대응실록> 구석구석에서 환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2008년 당시 강 전 장관이 생각하는 적정 환율은 1250원. 하지만 이성태 당시 한국은행 총재는 적정환율이 950~1000원 사이라고 말해 큰 격차를 보였다고 한다. 강 전 장관은 “한국은행은 그때(1997년)나 지금(2008년)이나 현실과 맞지 않는 실질실효환율을 가지고 고집하고 금리도 세계가 다 내리는데 우리만 올리고 있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금리인하에서도 시각차를 보이는 이 전 총재에게 전화를 걸어 “1%를 내렸으면 한다”고 말했지만 이 전 총재는 “0.5%까지는 생각해보겠지만 더 이상은 절대 안된다”고 해 더 이상 언쟁을 할 수도 없어 “내 판단대로 하는 것이 좋을 거요”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고 한다. 다음날 한국은행은 사상 최대인 0.75%를 인하했다.
강 전 장관은 “‘환율, 금리, 자금에 대한 한국은행의 갈등은 시장신뢰 상실’이라는 족쇄를 채웠고 퇴진압박으로 이어졌다”며 안타까워했다. 갈등이 쌓여가며 감당하기 힘든 와중에도 가장 힘든 사건을 ‘미네르바 사건’으로 꼽았다. 강 전 장관은 “(미네르바가) 인터넷에 떠도는 글 중 환율과 통화스왑, 리먼브러더스 등 닥치는 대로 인터넷에 올려 맞아 떨어지자 경제대통령이라 불리게 됐다”며 “어떤 교수는 국민스승으로 모시자고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고 비판했다. 당시 국민 스승으로 모시자고 한 ‘어떤 교수’는 김태동 성균관대 명예교수다.
감세 정책에 대해서 당시 부정적 견해를 폈던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도 저격을 피할 수 없었다. 강 전 장관은 “정운찬 교수는 감세 정책에 대해 ‘감세가 실제 경제 효과 없이 소수 부자들의 재산을 불려주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자신을 비판했다”며 “석학이라는 사람의 과격한 비판이었다. 뒤에 이명박 정부 총리가 된 그는 국회에서 ‘감세에 대해서는 적극적 찬성을 못하지만, 경제 상황에 따라서는 쓸 수도 있지 않나 싶다’고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고 정 전 총장의 말 바꾸기를 공격했다.
이에 대해 정 전 총리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일일이 대응하고 싶지 않다”며 말을 아꼈다. 앞서 언급했던 이성태 전 총재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구국의 결단’을 했다는 강 전 장관 회고록 출판 소식에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우석훈 민주정책연구원 부원장은 “나라 망하게 해놓고 나라 살렸다는 사람이 왜 이리 많으냐”며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가계부채가 늘어난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 장기 경기 부양 등 과도한 정부 개입으로 개인이나 기관이 조정을 못해 현재 1000조 원 이상의 가계부채가 경제 전체를 위협하고 있다. 그 씨앗은 그 문제(고환율 금리인하 등 강 전 장관의 정책)에서 시작됐다”고 지적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