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관: 7년을 함께 산 아내의 이름도 알지 못하고 나이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동안 귀신하고 살았나요?
남자: 정말… 몰랐습니다.
수사관: 돈 안 갚으려고 아내를 빼돌리고 거짓말하는 것 아닙니까? 열두 살이나 많은 아내를 동갑으로 알고 지냈다는 걸 누가 믿겠어요?
남자: 아내가 저와 동갑인 줄만 알았지 그렇게 나이가 많은지도 몰랐습니다. 부끄럽지만 저도 아내한테 속았습니다.
끝내 눈물을 보인 이 남자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나둘씩 털어놨다. 7년을 함께 살며 두 아이까지 낳아 키웠지만 정작 아내에 대해 자신이 아는 ‘진실’은 하나도 없었다는 고백과 함께.
이 황당한 사연의 장본인은 전남 장성군에 사는 최아무개씨(36). 자동차정비업자인 최씨는 얼마 전 몇몇 금융기관으로부터 ‘채무불이행’으로 고소를 당했다. 처음에 그는 아내 ‘전진옥’이 자신의 명의를 도용해 빚을 진 것이라고 항변했다. 그의 아내는 가출한 지 2년 가까이 지난 상태였다.
하지만 경찰 조사 결과 최씨와 동갑내기라는 아내 ‘전진옥’은 유령인물로 판명됐다. 대출 관련 서류를 단서로 신원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최씨 아내의 진짜 신상이 밝혀졌다. 올해 48세의 김아무개씨. 최씨보다 12세 연상으로 주거지가 불명확한 상태였다. 최씨 주장대로라면 아내 김씨와 7년간 결혼생활을 하며 두 아이까지 낳았지만 김씨가 이름과 나이를 그간 속여왔던 것.
과연 남편 최씨는 이 사실을 전혀 몰랐을까. 애초 경찰은 최씨가 거액의 채무를 회피하기 위해 아내와 짜고 ‘쇼’를 벌이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조사가 진행되면서 최씨의 주장이 하나씩 사실로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김씨는 남편 최씨가 종용하자 마지못해 혼인신고를 하긴 했지만 이마저도 다른 여자의 이름을 도용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 관계자는 “처음엔 최씨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여자와 두 명의 아이까지 낳고 7년 동안 함께 살았다는 걸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호적등본 등 최씨가 제출한 서류를 확인한 후 그의 말을 믿게 됐다”고 말했다.
현재까지의 정황을 보면 김씨는 돈을 빼돌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최씨와 결혼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씨가 남편 최씨의 명의를 도용해 빼돌린 금액은, 현재까지 드러난 것만 해도 신용카드를 이용한 쇼핑 및 현금서비스 등 2억4천만원, 금융기관과 이웃주민들에게 빌린 6천여만원 등 3억원이 넘는다. 그러나 도망간 김씨가 계속해서 최씨의 명의를 도용할 가능성이 커서 피해액은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부부가 7년간이나 ‘자신’을 숨기고 사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최씨는 12세나 연상인 여인을 어떻게 동갑내기로 여겼던 걸까. 최씨의 경찰 진술에서 그 의문을 풀어보도록 하자.
최씨가 아내 김씨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95년 5월. 결혼에 한번 실패해 홀몸으로 지내던 최씨는 한 친구로부터 김씨를 소개받았다. 이때 김씨는 자신이 29세의 미혼녀라며 ‘전진옥’이라는 가명을 밝혔다. 최씨는 ‘동갑내기’라는 김씨를 보자마자 참한 인상에 호감을 갖게 됐다. 나이가 조금 들어 보이는 외모이긴 했지만 그는 김씨의 얘기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최씨는 7개월간의 연애 끝에 김씨에게 청혼했고 그해 12월에 ‘부부’가 됐다. 그러나 결혼식은 올리지 못했고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다. 김씨가 이런저런 핑계로 두 ‘대사’를 차일피일 미뤘던 것. 그러나 큰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자 최씨는 혼인신고와 아이들 출생신고를 서둘렀다. 김씨는 최씨의 종용에 마지못해 혼인신고를 했고 큰아들이 7세가 돼서야 출생신고를 했다.
경찰에 따르면 최씨와 김씨의 결혼생활은 한동안 더없이 행복했던 것 같다. 김씨는 최씨와의 사이에서 난 두 아들을 애지중지 키웠고 최씨의 노모도 지극정성으로 대했다. 실제로 동네 주민들 사이에선 그런 김씨를 두고 “며느리가 살림도 잘하고 참 참하다”, “젊은 여자가 어른 공경할 줄도 알고, 김씨가 장가 한번 잘 갔다”며 칭찬이 자자했다고 한다.
경찰조사에서도 최씨는 “아내가 가족들에게 너무 잘 대해줘 늘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씨에 따르면 결혼생활 중 수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김씨는 유난히 사진 찍는 것을 싫어해 온 가족이 함께 찍은 가족 사진이 한 장도 없었다. 심지어 아이들 돌잔치 때 찍은 사진도 없었다. 경찰은 “김씨를 수배하기 위해 최씨에게 아내의 사진을 요구했으나 가지고 있는 사진이 한 장도 없다고 하더라. 김씨는 처음부터 최씨를 속이고 ‘한탕’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던 2002년 5월 최씨는 카센터를 개업하기 위해 전남 장흥에 있는 논 3천 평을 팔려다 기막힌 사실을 알게 된다. 부동산등기부를 살펴 보니 이 땅에 금융기관과 사채업자의 근저당권이 설정돼 있었던 것. 당황한 최씨는 자초지종을 김씨에게 추궁했다. 그러나 김씨는 자신도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다. 최씨는 어떻게 된 까닭인지 알아보려 근저당을 설정한 금융기관과 사채업자를 찾아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최씨는 자신의 주민등록등본을 떼어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김아무개(37)라는 낯선 여자의 이름이 자신의 부인으로 기재돼 있었던 것. 이때까지만 해도 최씨는 자신의 아내 이름을 ‘전진옥’으로 알고 있었다. 최씨는 아내 김씨에게 어찌된 영문인지 계속 캐물었고 김씨는 자신의 ‘신분’이 탄로날 것을 염려해 2002년 10월 아무 말 없이 집을 나갔다.
최씨는 그후 2년 가까이 김씨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나중에 경찰 조사를 통해 밝혀진 바로는 등본상에 최씨의 부인으로 등재된 여인은 바로 김씨의 이복동생이었다. 경찰은 “이웃주민은 물론이고 최씨의 아이들까지 김씨를 ‘전진옥’으로 알고 있었다”고 전했다.
더욱 황당한 일은 김씨가 집을 나간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갑자기 신용카드회사에서 카드 연체금을 갚으라는 고지서가 날아오기 시작한 것.
영문을 모르는 최씨가 카드사용 내역을 조회해본 결과 김씨가 동거 7년 동안 홈쇼핑과 현금서비스, ‘카드깡’ 등으로 2억4천만원을 사용한 사실을 알게 됐다. 김씨는 최씨의 명의를 도용해 신용카드를 만들어 썼고 결국 최씨가 모든 부채를 부담해야 할 처지가 된 것. 뿐만 아니라 김씨는 남편 최씨 몰래 동네 주민들에게도 최씨의 명의로 3천5백만원을 빌린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씨는 신용카드로 홈쇼핑에서 3천여만원의 물품을 구매했지만 최씨의 집에는 이와 관련된 살림살이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이런 점으로 보아 경찰은 김씨가 이중살림을 했거나 적어도 공범이 있을 것으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경찰은 김씨가 철두철미하게 자신을 숨긴 탓에 수사에 애를 먹고 있다. 한 수사관은 “김씨는 최근 몇 년간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명의를 사용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통장, 휴대폰, 혼인신고 서류까지 모두 다른 사람의 이름을 도용해 서류상으로 김씨의 이름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게다가 전과도 없어 그의 존재는 그야말로 ‘증발’된 상태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 경찰은 수사를 진행하면서 김씨의 ‘과거’를 유추할 수 있는 한 가지 단서를 잡았다. 이 사건을 담당한 한 수사관은 “동료 형사가 2년 전 김씨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는 얘기 들었다. 당시 티켓다방 여종업원들이 선불금을 갚지 않고 도망간 소위 ‘탕치기’ 사건이었는데 그때 김씨를 참고인으로 조사한 것이다. 동료 말로는 김씨가 최씨를 만나기 전에 티켓다방 종업원으로 일한 적이 있는 지능적인 사기꾼이라고 하더라”고 전했다.
당시 사건을 조사했던 한 형사에 따르면 김씨는 유흥가에서 잔뼈가 굵은 여자였다. 이 형사는 “김씨는 소위 그쪽 세계(티켓다방)에서 ‘선수’로 통했다. 그만큼 고단수다. 김씨라면 충분히 이런 일을 저지르고도 남을 사람이다”라며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이런 주도면밀한 사기꾼에게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던 걸까. 김씨는 집을 나간 후 세 차례 최씨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최씨는 “아내가 ‘미안해요’라며 울기만 하더니 전화를 끊었다”고 말했다. 최씨가 만나서 얘기하자고 설득했으나 김씨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원망보다는 애틋함이 아직 더 큰 탓일까. 남편 최씨는 증발해 버린 ‘낯선 아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