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봉
이상봉 디자이너는 14일 발표한 사과문을 통해 “주식회사 이상봉의 근로 환경, 처우 및 운영에 관련된 일로 상처받았을 패션업계의 젊은 청년들과 국민 여러분께 깊이 사과한다”며 “이번 기회에 급여뿐 아니라 패션업계의 문제점까지 개선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국내 대표 디자이너인 그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변화의 계기가 생긴 셈이다.
하지만 패션업계의 ‘미생’들은 그리 큰 기대를 안 하는 눈치다. 패션업계에 종사자인 L 씨(25)는 “이상봉 디자이너의 경우 지난해 10월 서울패션위크 때부터 시끄러웠다. 견습이라고 10만 원 주고 야근까지 시키고 하니까 그게 결국 수면 위에 오른 것”이라며 “그럼에도 관행처럼 이어져 온 것이기 때문에 거의 모든 디자이너가 다 그럴 뿐더러 무급으로 일을 시키는 디자이너도 많다. 털 거면 다른 디자이너도 다 털려야 완전히 바뀔 텐데…”라고 말꼬리를 흐렸다.
‘열정페이’는 사진작가, 스타일리스트 등 지원자는 많지만 문이 좁은 분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사실 열정페이의 진수는 영화판이다. 보통 영화는 감독 밑에 조감독, 그 다음이 써드, 그리고 막내 이렇게 내려가는데, 영화 몇 작품하면 막내가 써드 되고, 더 견디면 조연출 되는 식으로 계단처럼 올라 감독까지 간다. 그래서 ‘못 받아도 버텨보자’는 애들도 많고, 반대로 고용하는 입장에서는 ‘너 말고도 영화하고 싶어 하는 애들 많아’ 같은 마인드를 갖고 있다고 보면 된다.” 열정페이는 사진작가, 스타일리스트, 영상 분야 등 지원자는 많지만 문이 좁아 ‘너 말고도 하고 싶어 하는 애들 많아’란 소리가 나오는 분야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인턴십 프로그램의 경우에도 최저 임금을 못 받는 경우가 많았다. 졸업직전 인턴을 했다는 J 씨(27)는 “정부에서 학생에게 일정액의 지원비를 주고 기업에서는 직업체험 프로그램 형식으로 대학생들을 썼다”며 “당시 공공기관에서 오전 9시 출근, 오후 6시 퇴근하며 근무했다. 특별히 배우는 것도 없고, 간단한 잡무인 복커청(복사, 커피, 청소)만 하면서 50만 원 받았다. 대학생들은 경력으로 안 쳐주는 알바보다야 어쨌든 끝나고 나면 나중에 취업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지원하는 것 같았다. 사실 나는 어쨌든 경력도 되고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도 줘서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20만 원, 30만 원처럼 극단적인 경우가 아닌 취준생(취업준비생) 사이에 인턴치고는 나쁘지 않다는 기준인 100만 원을 받는다면 어떨까. 최근 규모가 작은 홍보회사를 다니다 그만뒀다는 K 씨(28)는 “월 96만 원을 받았지만 오히려 통장에 잔고는 줄어 갔다. 일을 하면서 전화비, 교통비도 많이 나오고 식대도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었다”며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취업을 준비하다보니 서울의 비싼 집값까지 부담하는데 집에만 있지 않는 한 어떻게 96만 원으로 한 달을 살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의 하소연은 이어진다.
“인턴은 같은 일을 하면서 정규직보다 적게 주고 싶을 때 쓰는 이름 같다. 똑같은 일을 해도 옆에 앉은 정규직은 두 배를 받는다. 솔직히 회사원들이 때려치우려고 하다가도 보너스 받으면 ‘그래도 참자’하는 경우가 있을 테지만, 나는 원체 돈이 부족해 그럴 수도 없었다. 그만둘 때가 돼서야 회사에서 정규직 계약서 이야기를 꺼냈지만 이미 마음이 떠난 후였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의류업체에서 일하는 K 씨(26)는 “열정페이는 업계가 강요하기도 하지만 사실 진짜 열정이 있으니까 가능한 것 같다”며 “나도 영상미술하고 싶었을 때 CF 미술하면서 이틀 밤새서 최저임금도 못 받고 일해봤다”며 “대학 졸업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 있겠나’는 막막함이 커져 고민하다 다른 길을 찾았다. 자기 일 아니라고 세상이 ‘하고 싶은 것을 해라’ 이런 얘기 책임감 없이 하니까 한 번쯤은 그런 느낌으로 접근한 것도 같다”고 털어놨다.
일요신문DB
열정페이를 감수하고서라도 경력을 쌓기 위해 최저임금도 못 받는 젊은이들에 대해 <88만원 세대> 저자 우석훈 민주정책연구원 부원장은 “책을 쓸 때만 해도 사장과 비정규직 정도의 문제였다면 지금은 파견직까지 끼어들면서 훨씬 악화됐다”고 운을 떼며 목소리를 높였다.
“열정페이를 받는 일은 안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서 국내에서 그 정도 노력이면 이민 가서 한국에서보다 훨씬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서류심사에서 보는 자기소개서가 대학교 최종 성적이 아닌 매 학기당 성적을 쓰라는 식에 인권침해로 보이는 요소가 많아졌다. 서류를 통과하고 인턴으로 근무해도 정직원 전환을 미끼로 성희롱 사건까지 늘어나는 추세다.”
젊은 세대에서 기회도 적고, 기회를 잡아도 어렵긴 마찬가지라 현재가 <국제시장>의 ‘덕수 시대’보다 크게 나을 게 없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현재 백수(무직)로 지내고 있는 K 씨(29)는 “이런 말하면 욕먹을지 모르지만 솔직히 지금 나에게 당시 파독 광부나 사우디 건설 노동자로 갈 기회가 있다면 주저 않고 가겠다”며 “그때는 한 번 갔다 오면 목돈을 벌 기회가 있었지만 지금은 일자리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때는 대학생 때 신나게 놀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대학만 들어가면 돼’ 소리를 듣고 입학해 1학년 때부터 토익공부를 했지만 지금 백수 신세”라고 토로했다.
역시 무직인 L 씨(30)는 “내가 지금 힘들긴 해도 덕수 시대보다 지금 물질적인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게 분명하고, 그 시대가 우리보다 고생한 것은 맞는 것 같다”면서도 “다만 그때는 희망은 있었고, 지금은 희망이 없다는 게 차인 것 같다”고 말했다. 약 2주 전 직장을 그만뒀다는 J 씨(32)는 “어느 시대가 더 살 만하다, 누가 고생했다 말하는 것은 웃기는 이야기”라며 “그 시대도 <국제시장>처럼 모두 다 힘들게 살았던 게 아니라 힘들게 일한 산업역군도 있고 같은 시대를 다룬 영화 <고고70>처럼 노는 사람도 있었던 게 당연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
‘무급인턴’ 미국에선 백악관 꼼수에 집단 항의 미국은 무급인턴(Unpaid Interns)이나 최저임금 미만을 지급하는 인턴에 관해 6가지 기준을 두고 있다. 무급인턴은 이 6가지 원칙을 모두 충족해야만 급료를 지불하지 않고 일을 시킬 수 있다. 미 연방 노동부 임금감시국(U.S. Department of Labor, Wage and Hour Division)이 제시한 무급인턴의 6가지 원칙은 △인턴십은 교육적 환경에서 제공되는 트레이닝과 유사해야 한다 △인턴에게 실제적인 배움의 이득이 있어야 한다 △인턴은 정규직 직원을 대체하지 않으나 직원의 밀접한 감독하에 일한다 △고용주는 인턴의 활동으로부터 즉각적인 이익을 얻어내지 않아야 한다 등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비영리단체나 자원봉사단체는 자원봉사 등의 명목으로 무급으로 일을 시킬 수 있다. 또 공공기관을 위한 별도취급 직원도 있다. 이렇게 꼼꼼한 규정이 있음에도 지난 2013년 8월 백악관 무급 인턴들의 집단 항의가 있었다. 무급인턴 예외 조항인 공공기관을 위한 별도취급 직원에 속하는 백악관 인턴들은 고용주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최저임금 인상을 추진해온 대통령이 백악관에 무급인턴을 두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하며 임금 인상을 촉구하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같은 무급인턴에 관한 정확한 규정을 갖고 있지 않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수익을 목적으로 할 경우 근로기준법을 적용 받아 최저임금 이상을 지급해야 한다”면서도 “그 외에 무급인턴에 관한 자세한 규정은 없다”고 말했다. 한 미국변호사는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무급인턴에 관한 자세한 규정을 갖춰야 할 것 같다”고 조언했다. ‘열정페이’의 범위가 점점 넓어지는 만큼 인턴에 관한 정확한 규정의 필요성이 요구되고 있다. [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