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결혼한 안 아무개 씨(사망 당시 65세)는 10여 년 전인 2001년 부인과 이혼했다. 안 씨에게는 전처소생 자녀 3명이 있었지만 이혼과 함께 자연스레 자녀들과 연락이 소원해졌다.
1년 후, 혼자 지내던 안 씨는 지인의 소개로 김 아무개 씨(여·60)를 알게 됐다. 비슷한 처지에 있던 두 사람은 금방 가까워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 씨는 인천 남구에 위치한 안 씨의 거주지로 옮겨 함께 생활하게 됐다.
환갑을 앞둔 나이에 만난 두 사람은 혼인신고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여생을 함께 보낼 좋은 친구를 만났다고 생각한 두 사람은 2004년 11월 1일 단출하게 언약식을 올리고 그날을 결혼기념일로 정하는 것으로 결혼식을 대신했다. 2009년에는 김 씨가 안 씨의 주소지로 주민등록 전입신고를 마쳤고 두 사람은 단란한 노후를 꿈꾸는 동반자가 됐다.
안 씨와 김 씨는 함께 호프집을 운영하여 살림을 꾸려나갔다. 호프집 이름은 안 씨와 김 씨가 가장 좋아하는 팝송에서 착안해 만들었다. 두 사람이 운영하던 호프집은 언제나 손님이 많아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김 씨의 한 지인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두 사람이 운영하던 호프집은 70평형 규모로 좌석도 넓고, 장사도 잘됐다. 김 씨가 카운터와 주방을 오가며 안 씨와 함께 운영했다”며 “지금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내놓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적지 않은 나이에 자신을 도와 궂은 주방일도 마다하지 않는 김 씨에게 안 씨는 언제나 애틋한 마음을 표했다. 안 씨는 자신의 일기장에 김 씨를 ‘집사람’이라 표현하며 고마운 감정과 사랑한다는 말을 남겼다. 김 씨에게 결혼사진을 남겨주지 못한 것이 내심 마음에 걸렸던 안 씨는 김 씨와 틈틈이 여행을 다니며 함께 많은 사진을 남기기도 했다.
2011년 9월 안 씨가 후두암 절제수술을 받아 수차례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안 씨 옆을 지킨 사람은 김 씨 혼자였다. 그러나 완치의 기쁨도 잠시, 다시 건강을 회복하는 듯했던 안 씨는 2013년 7월 갑작스러운 가슴통증을 호소해 병원에 입원했고 담당의사는 안 씨에게 관상동맥중재수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수술에 앞서 담당의사는 안 씨에게 “수술 전 동의 절차를 거쳐야 하니 자녀들에게 연락을 하라”고 말했지만 안 씨가 전처소생 자녀들의 전화번호를 모르고 왕래 가 없다고 답했다. 다급한 상황에서 의사는 수술실 밖에서 안 씨를 기다리던 김 씨에게 서명을 하라고 했다. 그러나 김 씨가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안 씨는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다.
안 씨의 상태가 악화돼 경황이 없던 김 씨를 챙긴 사람은 안 씨의 친구들이었다.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했던 안 씨가 가까운 지인들에게 “김 씨와 내가 혼인신고를 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 달라” “김 씨를 잘 부탁한다”는 당부의 말을 남겼던 것이다. 김 씨는 안 씨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구청에서 안 씨와의 혼인신고를 했다. 그러나 혼인신고를 한 다음날인 2013년 7월 31일 안 씨는 급성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에 인천지법 가사1단독 재판부(이동호 판사)는 “법률혼주의를 채택한 우리나라 법제에서 비록 사실혼 관계에 있는 한쪽의 당사자가 일방적으로 혼인신고를 했더라도 사실혼 관계를 해소하기로 서로 합의한 사정이 인정되지 않으면 무효라 할 수 없다”며 김 씨를 상대로 소송을 낸 안 씨 세 자녀의 청구를 기각했다.
이어 재판부는 안 씨가 생전 작성한 일기장에서 김 씨의 동생을 ‘막내 처제’라 표현하고 ‘김 씨를 처로 맞아 동반한 지도 5년이 넘어 또 새해를 맞는구나’라는 등의 증거자료를 토대로 “안 씨가 의사무능력 상태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 이전에 안 씨가 혼인의사를 명백히 철회하였다거나 김 씨와의 사실혼 관계를 해소하기로 합의하였다는 등의 사정을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는 이상 사실혼관계를 형성했던 안 씨의 혼인의사가 추정된다”고 기각 사유를 밝혔다.
현행법상 민법은 사실혼 배우자에게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상속을 둘러싼 법적 분쟁 여지가 있고 사실혼과 법률혼이 동등하지 않다는 이유로 헌법재판소는 사실혼 상속권을 위헌으로 보고 있다. 김 씨의 경우 안 씨의 사망 하루 전 혼인신고를 함으로써 법률혼으로 인정받았지만 만약 김 씨가 혼인신고를 하지 못했다면 김 씨는 혼인신고 무효소송이 아닌 상속권 문제로 또 다른 법적 분쟁에 휘말렸을 가능성이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사실혼 배우자라도 예외적으로 상속권을 인정해 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혼 관계를 입증하는 과정이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인천지법 장준아 공보판사는 “이 사건의 경우 원고 측이 ‘사실혼 관계가 아니다’라는 입증을 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이 같은 판결이 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 씨 변호인은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망인의 지인에 따르면 안 씨는 전처소생 딸들의 결혼식도 참석하지 못할 만큼 관계가 소원해진 상태였다고 한다”며 “사실혼 관계를 입증하려면 많은 자료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다만 김 씨는 함께 살던 집에서 찍은 사진들과 주변인들의 진술, 안 씨가 김 씨를 향해 남긴 생생한 사랑의 기록들로 사실혼 관계라는 것을 100% 입증할 수 있었던 경우”라고 말했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