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씨가 그동안 출간한 책들. | ||
인천지방검찰청 형사1부(부장검사 곽상도)는 18일 11억3천만원을 편취한 혐의로 경영컨설턴트 차아무개씨(41)를 구속 기소했다. 차씨는 기소 내용에 포함되지 않은 7억원을 다른 피해자 3명으로부터 빌린 뒤 도주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차씨는‘채권자를 지치게 하여 돈을 안 갚는 방법은 사기꾼에게는 고전’, ‘이혼도 방법이다. 무슨 방법을 쓰더라도 가족과 재산은 지키라’는 책 속 비법을 자신도 그대로 실행했다.
애초 이 책은 빚 때문에 재산과 가족과 자신의 생명까지 포기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기 위해 쓴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쩌다 자신이 그 ‘비법’을 사기에 이용하게 되었을까. 해당 출판사 관계자의 얘기와 수사 내용 등을 토대로 그 내밀한 사연을 뒤따라가봤다.
차씨는 20세 때부터 사업을 시작해 유통업, 제조업, 무역업, 금융업 등 다양한 업종의 회사를 운영했고, 명동에서 사금융 창업세미나를 개최할 정도로 사금융업에 정통한 인물이었다. 역삼동에서는 벤처기업의 창업상담 전문 컨설턴트로 나서 벤처기업의 자금운영과 자금조달 및 경영지도까지 해왔다. 한때 사금융 신문을 발행하고 인터넷에 금융정보 사이트를 운영하기도 했다.
사금융, 즉 사채업을 오랫동안 해온 것과 대조적으로 차씨는 봉사활동도 끊임없이 해왔다. 10여 년 전 척추수술의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해 목발을 짚고 다니는 차씨는 한 장애인 봉사단체의 회장을 맡고 사회봉사 활동에도 열성이었다.
차씨가 처음 자신이 쓴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찾아온 것은 2002년 7월. 그의 이 같은 전력 때문에 처음 차씨가 찾아왔을 때 사장 손아무개씨와 부인 이아무개씨는 ‘장애를 딛고 열심히 사는 사람’으로 여기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당시 손씨의 출판사는 대부업 관련 서적을 많이 펴내고 있었다.
두 달 뒤 차씨는 <합법적으로 돈 떼어먹는 방법 & 절대적으로 돈 안 떼이는 방법>이라는 책을 첫 출간했다. 차씨는 머리글에서 ‘현재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돈을 빌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주고, 돈을 빌려주는 입장에서 떼일 염려가 없는지를 체크하는 데 참고가 되려는 의도로 썼다’고 밝혔다. 자신의 사채업 경험을 최대한 살려, 대출과 할인 등 모든 금융수법을 어떻게 이용해 돈을 빌리고 빌려줘야 하는지 소개했던 것. ‘돈 떼먹는 방법’이란 돈을 빌리는 것을 어려워하지 말고 쉽게 생각하라는 뜻으로 쓴 일종의 반어적 표현이었다.
이듬해 차씨는 <빌린 돈은 갚지 마라>, <주부가 경제를 알아야 부자로 산다>, <돈맛을 알아야 부자가 된다>, <사장의 조건>과 같은 책들을 손씨의 출판사를 통해 연달아 출간했다.
차씨는 이 책들의 인세를 자신이 활동하는 장애인 봉사단체에 기부했다고 한다. 사채업으로 번 돈은 봉사단체에서 꺼려해, 차씨는 인세를 기부금으로 낼 수 있게 됐다며 좋아했다는 것. 자선활동에 열심인 차씨인지라 주변 사람들 또한 그의 부탁이라면 순순히 들어줄 정도로 신뢰했다. 물론 그 ‘주변 사람’ 중에는 출판사 사장 손씨도 포함돼 있었다.
차씨가 손씨에게 돈을 빌리기 시작한 것은 2003년 7월부터. ‘기업체에 당좌대월을 해주는 회사를 차려 월 3%에 해당하는 고율의 이자를 주겠다’는 조건이었다. 불황으로 출판업에도 찬바람이 불었고 차씨가 워낙 입심이 좋아 손씨는 차씨에게 1억원씩 모두 5억을 빌려주었다. 차씨는 매달 약속한 이자를 꼬박꼬박 보냈다.
12월 하순 차씨는 “당좌대월 3억을 급하게 막아야 되니 3일간만 빌려달라”며 손씨로부터 다시 3억을 빌렸다. 그러나 차씨는 12월30일 사업차 중국으로 출국한 뒤 소식이 끊어져 버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손씨는 차씨가 돈을 떼어먹을 사람이라는 의심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러나 차씨는 중국으로 출국하기 전날인 12월29일 또 다른 피해자 신아무개씨(여)에게서도 3억3천만원을 빌렸던 것이 드러났다. 신씨에게는 상품권 할인에 필요한 자금 명목으로 1천만원씩의 ‘소액’을 빌려 꼬박꼬박 원금과 이자를 갚아 신용을 쌓은 뒤 중국으로 출국하기 전날 3억3천만원을 빌렸던 것이다. 또한 차씨는 또 다른 3명의 피해자로부터 출국 직전 7억원을 빌린 것으로 알려졌다.
손씨는 뒤늦게 차씨의 집을 찾아갔지만 차씨의 아내로부터 “남편은 사업 때문에 중국에 갔다. 돈에 대해선 전혀 모른다”는 대답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올해 6월 손씨는 차씨 문제로 서류를 떼기 위해 동사무소에 들렀다 차씨가 아내의 병 때문에 귀국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연락이 닿은 차씨는 처음에 “어쩔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며 빨리 돈을 갚을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돈을 갚겠다는 약속보다는 “맘대로 해보라”는 식으로 태도가 바뀌었다고 한다. 결국 손씨를 비롯한 피해자들은 차씨를 사기 혐의로 고소했다.
손씨는 뒤늦게 차씨가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돈을 빌린 것을 알았지만 이미 차씨는 돈을 어딘가로 빼돌린 뒤였다. 부인과는 이미 합의이혼을 한 상태라 집을 가압류할 수도 없었다.
차씨는 자신이 쓴 책 <빌린 돈은 갚지 마라>에 나와 있는 대로 ‘돈을 남에게 빌려 줄 정도의 여유가 있는 사람의 돈은 떼어먹어도 된다’, ‘자택 이외의 자산이 있는 분은 회사가 기울기 시작하기 전에 명의를 바꾸어 놓아라’, ‘이혼도 방법이다. 무슨 방법을 쓰더라도 가족과 재산을 지켜라’, ‘채권자를 지치게 하여 돈을 안 갚는 방법은 사기꾼에게 고전’이라는 원칙을 충실히 이행한 것이었다.
차씨는 검찰에서 “일부러 갚지 않은 것이 아니다. 갚지 못한 것이다. 사정이 나아지면 반드시 갚으려고 했다”며 사기 혐의를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검찰은 빌려간 돈의 사용처에 대한 차씨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고 보고 있다. 돈을 따로 빼돌린 것 아니냐는 시각이다. 과연 차씨는 자신의 책 제목처럼 계획적인 사기극을 벌였던 걸까. 흑백은 법정에서 가려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