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임기가 남은 이완구 원내대표를 총리로 차출함에 따라 당내 여러 인사가 자신의 정치적 스케줄을 변경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사진은 21일 연말정산 파동 관련 당정협의에 앞서 이 원내대표가 최경환 경제부총리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친박계 한 중진 의원은 “임기가 남은 여당 원내대표를 총리로 앉힘으로써 인사는 ‘망사’라 불린 불량 후보 청문회를 돌파하겠다는 의지가 가장 커 보인다”며 “연말정산 파동으로 일단 직장인과 중산층의 표심이 깎였고, 공무원연금 개혁은 공심(공무원 마음) 이반을 불러올 텐데 이런 현안에 가장 깊숙하게 개입해 파악하고 있는 이완구 원내대표를 빼내갔다는 것은 박 대통령으로서도 시국이 그만큼 불안해보였기 때문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이완구 총리 카드는 청문회용이라고만 치부하기에 정치적 함의가 다양하다. 일단 이 원내대표가 빠지면서 여러 사람이 자신의 정치적 타임 스케줄을 변경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박 대통령이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과 ‘문고리 권력 3인방(이재만·정호성·안봉근)’을 보호하면서 연말정산 세금폭탄 정국을 돌파하고자 당내 권력지형을 어지럽혔다는 소리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2차 개각과 청문회 정국을 지켜봐야하겠지만 1월 말의 ‘2PM(이완구 총리)’ 카드는 다목적 포석”이라며 “이완구 원내대표 공백을 메워야하는 사람들은 물론, 이완구 원내대표의 차기 용도(?)를 떨떠름하게 생각하는 분들로 여럿이 됐다”고 했다.
개각 정국으로 연말정산 세금폭탄 입씨름이 일시 정지됐다. 파문이 가라앉은 것은 아니지만 일단 언론에서는 개각 정국을 소란스럽게 보도하기 시작했다. 정가에선 박 대통령이 4월까지 공무원연금 개혁을 마무리해달라고 주문한 것도 그 뒤 이완구 총리 카드를 꺼내놓으려 하기 때문으로 봤다. 4월 재·보궐 선거에서도 개각 카드는 필요조건이었다. “박 대통령의 용인술이 원칙을 저버리면서까지 정치공학적이진 않다”고 말했던 한 친박계 의원은 23일 통화에서 다소 머쓱해했다.
앞서의 관계자는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율이 30%라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온 날 신임 총리를 지명했다. 그것도 여권의 원내 사령탑을 빼갔다”며 “여론조사가 플러스마이너스(±) 오차범위가 있는 것을 감안하면 20%대로 폭락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쯤 되면 박 대통령도 원칙을 버릴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앞으로 자신의 국정운영 스타일을 예측하지 말라는 박 대통령의 경고로도 읽힌다.
김무성 대표가 16일 서울 강서구의 어린이집에서 새누리당 안심보육 현장 정책 간담회를 가진 후 어린이들과 간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등 잠룡군에 이완구 총리 지명자가 합류하면서 포스트 박근혜 구도에도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김 대표는 PK(부산·경남), 김문수 당 보수혁신특별위원장은 TK(대구·경북, 영천), 정몽준 전 대표는 수도권을 기반으로 했다면 이 총리 지명자로 인해 충청권 주자까지 가세한 셈이다. 이 총리 지명자를 뺀 세 주자가 모두 비박계 내지는 반박계 주자라면 이 총리는 범친박계로 분류돼 일각에선 총리가 아니라 ‘박근혜 후계자’를 지명한 것 아니냐고 해석하기도 했다.
이 총리 지명자가 “직언을 하겠다”는 약속을 실현하고, 야당과의 협상에서 박근혜 정부에 유리한 각종 제도와 법안을 순조롭게 처리하면 단숨에 급부상할 가능성이 있다. 행정고시 출신으로 충남지사 경험에다 여권 핵심부에서 존재감을 나타냈다는 측면에서 스토리텔링이 다른 주자군과 비교해 손색이 없다. 특히 선거구 재획정으로 충청권 의석수가 늘 가능성이 커 ‘충청권 역할론’도 먹힐 수 있다.
가장 흐트러진 것은 차기 원내대표 경선이다. 새누리당 당헌·당규대로라면 원내대표 궐위가 생긴 7일 이내에 조기 경선에 돌입해야 한다. 5월 경선이 1월로 당겨졌으니 물밑에서 준비하던 주자군은 자기 홍보 시간을 잃게 됐다. 지난해부터 유승민 의원이 뛰고 있고, 해양수산부 장관에서 물러난 이주영 의원도 상수 후보다. 친박 핵심으로 ‘수도권 역할론’을 주장하며 홍문종 의원이 나섰고, 이밖에 수도권에선 정병국 원유철 심재철 의원이 거론되고 있다.
정가 사정에 밝은 정치권 인사는 “문제는 정책위의장 구인난이다. 정두언 나경원 한선교 황진하 의원 등이 거론되는데 시간이 촉박하다.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추락하는 시점에서 청와대와 선긋기가 먹힐지, 청와대 보완재가 먹힐지 가늠하기가 힘들 것”이라며 “시간이 촉박한 탓에 일종의 오더(Order) 논란이 일 수 있다. BH(청와대)에서 원하는 후보는 누구, 김 대표가 지지하는 사람은 누구, 하면서 보이지 않는 손 논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큰데 어수선한 시국에서 의원들이 자율 판단을 내리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전망했다.
1차 개각의 전반적인 평가는 긍정보다 부정 쪽이다. 친박계 한 의원은 “우리 쪽에서도 청와대에 인적쇄신을 주문했다. 그것은 청와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인적 요소에 대해 ‘징벌적 인사’를 하라는 얘기와 같았는데 이번 개각은 그런 여론을 수렴하지 않았다. 특보단도 수석보다 위에 있는 옥상옥이란 비판이 많다”며 “대통령이 국민적 요구의 핵심을 파악하고 있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마이웨이를 하겠다는 것인지 2차 개각을 보면 드러날 것”이라고 했다. 불만이 많아 보였다.
친박은 역대 계파 중 결집력이 가장 약한 축에 든다. ‘모래알 친박’은 그런 의미에서 나온 조어다. 최근 ‘연말정산 대란’ 정국에서 친박에서 목소리를 낸 이는 이정현 최고위원뿐이었다. 하지만 최고위원·중진연석회의에서 이번 논란에 대해 ‘정부의 홍보 부족일 뿐 잘못은 아니라’고 조목조목 설명하는 이 최고위원을 김 대표는 한마디로 눌렀다. 일부 언론에서 다루긴 했지만 김 대표의 풀 워딩은 이랬다.
“세율관계가 너무 복잡하므로 일반 국민은 이정현 최고(위원)가 말하는 부분에 대해 이해가 잘 안 된다. 결과적으로 정부가 9300억 원 세금 더 들어오도록 설계가 안 된다. 증세냐 아니냐를 떠나 일반 국민들은 사실상 세금 더 내는 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김 대표가 공개 면박을 준 셈이다. 정가의 한 소식통은 “김 대표가 친박계 최고위원을 공개회의에서 면박을 준 점, 역대 당 대표와 달리 특별한 이유가 없는 현장 투어에 나서고 있는 점 등을 두루 봤을 때 김 대표가 김무성식 대권 행보를 시작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있다”며 “BH가 만약 총리 지명에 대해 김 대표와 상의한 바가 없다면 김 대표의 다소 우호적인 태도도 달라질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이정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