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새누리당은 지난 22일 연말정산 관련 세법을 오는 4월 임시국회에서 재개정해 환급분까지 소급해서 돌려준다는 ‘땜질’ 처방을 내놓았지만, ‘유리지갑’이 털렸다는 정서적 반감이 극에 달해 있는 봉급생활자들의 분노는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한국납세자연맹은 같은 날 “이번에 바뀐 연말정산은 신뢰성이 전혀 담보되지 않은 정부의 세수추계를 진실로 믿고 법을 통과시킨 중대하고 명백한 잘못”이라며 이를 무효화하는 ‘근로소득자 증세 반대’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각 인터넷 사이트마다 ‘연말정산 폭탄’은 핫이슈로 지속되며 이를 비판하는 글이 빗발치고 있다. 전례 없는 국민 차원의 조세불복 운동이다.
납세자연맹은 “정부가 2014년 귀속 연말정산 세법개정을 하면서 연봉 5500만 원 이하인 직장인은 증세가 없고 7000만 원의 경우 3만 원, 8000만 원은 33만 원 정도 증세된다고 발표했지만 실제 증세가 훨씬 크게 나타나 직장인들이 분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 2013년 세법개정 당시 ‘덜 내고 덜 받는다’던 연말정산이 오히려 ‘더 내고 덜 받는’ 꼴이 됐다는 게 요지다.
초민감 정책부문인 조세에서 ‘거짓말하는 정부’가 돼버린 박근혜 정부는 치명상을 입었다는 게 지배적인 분석이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이후 최근 ‘정윤회 문건’과 ‘K·Y 수첩’ 파동 등 정치권의 혼란이 극심한 가운데, 연말정산 대란이라는 민생문제까지 겹치면서 여론이 악화일로를 걷고 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각 부처의 올해 업무보고를 받는 과정에서 수차례 국정 핵심 과제로 내세운 노동·금융·공공·교육, ‘4대 개혁’에 대한 의지를 거듭 표하면서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바탕으로 ‘국민소득 4만 달러 달성’이란 청사진도 제시했다. 하지만 그는 야당뿐만 아니라 식자층, 시민사회단체에서도 이번 사태의 ‘제1 표적’이 되고 있다. 서울대 민주화교수협의회 소속 교수들이 청와대 인적쇄신과 경제 민주화 등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긴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경제사회계에선 박 대통령이 구조개혁을 통해 경제체질을 개선하겠다는 개혁드라이브가 동력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개혁의 성패는 명분 싸움에 달려 있고, 거기서 주도권을 잡아야 여론을 등에 업고 이해당사자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데 정부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진 마당에 개혁 추진이 제대로 되겠느냐”고 우려했다.
경제부문 수장으로 개혁추진의 선봉장 역할을 해왔던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입지도 흔들리고 있다. 그는 당초 근로소득세 증세라는 주장에 ‘착시현상’이라고 맞서오다, 21일 기자회견에선 “2012년 9월에 간이세액표를 개정해 적게 내고 적게 환급받는 방식으로 변경된 데다, 2013년 소득공제에서 세액공제로의 전화하는 효과가 맞물려 소위 13월의 월급이 줄어들 수 있는 측면이 있다”고 사실상의 ‘증세효과’를 시인했다.
정부가 연말정산과 관련 직장인들의 거센 반발을 사자 지난 21일 당정협의를 통해 대책을 마련하는 모습이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일각에선 복지비용 증가로 인한 증세의 필요성을 솔직하게 국민들에게 제기하는 정공법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대선공약으로 내세운 ‘증세 없는 복지 확대’ 프레임에 갇혀 정책상 무리수를 두면서 국정 불신을 자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의 국정장악력 악화도 우려되는 대목이다. 박 대통령은 23일 조기에 국정혼란을 수습하고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새 총리에 내정하고, 청와대 비서실 개편을 단행했지만 반전의 계기를 만들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장관을 지낸 한 인사는 “불통 이미지가 굳어진 박 대통령 스스로 변화하는 결단이 없다면 개혁은 물론 국정운영까지 더욱 힘들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실제로 리얼미터가 21~22일 전국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33.2%였다. 세월호 참사 전까지 50%대를 견고하게 유지했던 지지율은 이후 40%대로 떨어지더니 신년 기자회견, 연말정산 폭탄 논란 등을 거치면서 연일 고꾸라지고 있다.
정치권에선 통상 정권 지지율이 30%대로 떨어질 경우, 권력 누수가 본격화되는 것으로 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임기 3년차,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임기 4년차 시기가 사례로 거론된다. 박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이 ‘임계점’에 와있다고 봐야하는 상황이다.
정치권도 연말정산 후폭풍에서 스스로 권위를 잃어버렸다는 지적이다. 연말정산 소급적용이 법적 안정성, 조세형평성 시비, 납세의식 저하 등의 우려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정희수 국회 기재위원장은 “법을 만들면서 소급적용을 안 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며 “(납세자에게) 혜택을 주든지 불이익을 주든지 법치주의 근간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기재위 야당 간사인 윤호중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원칙적으로 법적 안정성을 해치고 조세형평성을 깰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되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새누리당은 연말정산 소급입법을 주도하면서 ‘증세가 아니다’는 논리를 펴는 반면, 새정치연합은 부자증세와 법인세 인상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안종범 청와대 경제수석부터 최 부총리, 김무성 새누리당 원내대표 등이 나서 “이번 연말정산 사태를 증세문제로 연결짓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선을 긋고 있지만, 기업들로선 법인세 인상의 빌미가 될까 좌불안석이다.
가뜩이나 내수가 부진한 가운데, 연말정산 후폭풍으로 소비시장이 얼어붙어 더욱 민간 소비가 위축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일부 쇼핑몰에 따르면 지난 주말부터 고가의 겨울 의류 구매가 잇따라 취소되고 있다는 집계도 나오고 있다.
박웅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