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기 신임 금융투자협회장이 당초 선거에서 열세에 몰릴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과반수를 얻으며 완승을 거뒀다. 사진은 금융투자협회 빌딩. 오른쪽은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 이종현 기자
이번 금융투자협회(금투협) 회장 선거는 박빙이 예고된 승부였다. 최근까지 현업에 몸담았던 김기범 전 KDB대우증권 사장이 출마한 데다, 우리투자증권을 업계 1위로 끌어올린 황성호 전 사장이 낙마하고 예선탈락이 점쳐졌던 최방길 전 신한BNP파리바자산운용 대표가 최종후보에 오르는 등 파란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황영기 신임 금투협 회장의 당선을 예측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협회 회원사들의 선거를 통해 뽑는 자리인 만큼 이해관계에 따라 표 분산이 이뤄지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금투협 회장은 투표권의 60%를 164개 회원사가 1표씩 나눠 갖고, 40%는 협회비 분담 정도에 따라 가중치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결정된다. 금투협 회원사는 대부분 증권사와 자산운용사들인데, 증권사는 당연히 증권사 출신을 선호하고 자산운용사도 업계 출신에게 표를 몰아주는 경향이 있다.
세 명의 후보 중 김기범 전 사장은 증권사, 최방길 전 대표는 자산운용사 출신인 만큼 ‘은행 출신’인 황영기 회장은 비빌 언덕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었다. 이런 구조 때문에 이번 선거는 1차 투표에서 김기범 전 사장이 과반수에 못 미치는 1위를 한 뒤 2차 투표에서 신임 회장이 될 것으로 예상하는 시나리오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황 회장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금투협 회장 선거 사상 처음으로 1차 투표에서 과반을 넘는 득표율을 얻으며 손쉽게 당선됐다. 황 회장은 지난 20일 서울 여의도 금투협 3층 불스홀에서 164개 회원사 중 161개사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임시총회에서 50.69%의 지지를 얻어냈다. 김기범 전 사장은 39.42%, 최방길 전 대표는 8.37%를 얻는데 그쳤다.
황 회장의 화려한 복귀는 익히 알려진 카리스마에다 겸손까지 보탠 덕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황 회장을 지지한 회원사들은 ‘힘 있는 협회, 섬기는 협회’라는 슬로건에 담긴 의미에 공감을 표했다고 전해진다. 정책의 최우선 순위인 은행이나 로비력이 막강한 보헙업계와 달리 늘 뒷전 취급을 받아온 증권사들에게 힘이 실리도록 해달라는 의중을 투표를 통해 표출했다는 것이다.
황 회장 자신도 ‘강한 금투협’을 바라는 여론이 당선에 큰 힘이 됐다고 평가했다. 그는 당선 확선 직후 가진 언론 간담회에서 “금융투자업계가 당면한 엄혹한 현실을 돌파하려면 대외 협상력이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한다고 설득했다”며 “이 같은 차별성을 통해 표심을 얻은 것 같다”고 말했다.
황 회장은 삼성증권 사장과 우리금융지주 회장 겸 우리은행장, KB금융지주 초대 회장 등을 거치는 동안 협상능력과 대외 네트워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국회는 물론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 등 권력기관 인사들과도 폭넓은 인맥을 갖추고 있다. 특히 금융권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국회 정무위원회에서는 소위 ‘말발’이 먹히는 몇 안 되는 금융인으로 꼽힌다. 그가 과거 금감원이나 예금보험공사를 상대로도 뜻을 굽히지 않는 모습을 보였던 것도 이런 배경이 작용했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다.
최근 몇 년간 야인에 가까운 생활을 했지만 과거 삼성증권과 우리금융, KB금융에 몸담으며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이번 금투협 선거에서 큰 힘을 발휘했다는 분석도 설득력 있게 들린다. 과거 부하 직원이던 이른바 ‘황영기 키즈’들이 지금은 증권사나 운용사 CEO 자리에 올라있는 만큼 직접 한 표를 행사했거나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너가 있는 대형 증권사들의 경우 황 회장과의 직접적인 친분이 힘을 발휘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잘 아는 외국계 증권사와 자산운용사들로부터도 몰표가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여기에 업계 CEO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몸을 낮추는 모습도 호감을 산 것으로 전해진다. ‘거물’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겸손함을 보임으로써 거부감을 없앤 셈이다.
금융투자업계는 중량급 협회장이 오게 돼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한 증권사 고위 인사는 “업계에서는 힘 있는 사람이 금투협에 와서 변화를 꾀해야 한다는 여론이 많았다”면서 “시장이 위축되면서 증권사들이 줄줄이 구조조정에 들어가는 등 가라앉은 업계 분위기를 바꿔줄 인물이라는 점에서 황영기 회장이 다른 후보자들을 압도했다”고 전했다.
금융당국은 황 회장에게 ‘어색한’ 축하인사를 건네고 있다. 파생상품 투자 실패 책임을 놓고 갈등을 빚은 끝에 사실상 그를 야인으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금융당국은 겉으로는 “능력있고 훌륭한 분이 회장으로 당선된 것을 축하한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소송전 등 ‘과거사’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있다.
황 회장은 우리금융지주 회장 시절 파생상품에 공격적으로 투자했다가 큰 손실을 냈던 적이 있다. 이후 그는 KB금융지주 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금융당국은 뒤늦게 ‘직무정지 3개월’이라는 중징계를 내려 사실상 황 회장을 퇴진시켰다. 황 회장은 2009년 금융위원회 등을 상대로 “징계 처분을 취소해달라”며 행정소송을 내 승소했다. “도덕적 책임은 있지만 법은 어기지 않았다”는 그의 주장이 법원에서 받아들여지자 금융당국은 체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로 금융당국은 여전히 황 회장에게 껄끄러운 속내를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 금융당국 관계자는 “황 회장이 승소한 것은 개인차원에서 법을 어긴 것이 없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으로 안다”면서 “당국의 징계는 금융사 건전성에 관한 임원의 책임을 물은 것”이라며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