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를 맡은 서울 영등포경찰서 관계자는 “은행원, 전직 증권사 직원, 사채업자, 전문 위조범 등 다양한 경력을 가진 14명 정도가 사건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며 “MBA 출신과 검사 출신 변호사도 공모 의혹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경찰은 이들 일당이 각각 CD 위조, 유통 및 할인, 돈세탁 등 역할을 나누어 맡아 조직적으로 범행한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고교 동창생인 국민은행 신아무개 전 과장(41)과 조흥은행 김아무개 전 차장(40)은 지난해 12월부터 올 7월 초까지 한국토지신탁(토지신탁)과 전기공제조합(전기조합)으로부터 CD 발행을 의뢰받고 진품 CD를 발행한 뒤 이를 컬러복사기 등으로 위조했다. 이들은 이렇게 만들어진 가짜 CD를 토지신탁과 전기조합에 넘기고 진짜 CD는 자신들이 편취해 시중에 유통시켰다.
이런 식으로 신씨와 김씨가 위조한 CD는 50억부터 2백억짜리 55장, 모두 4천4백50억원어치에 이른다. 이 가짜 CD들은 시중에 유통되지 못하고 모두 토지신탁과 전기조합의 금고에 차곡차곡 보관됐다.
토지신탁과 전기조합이 만기가 돌아온 가짜 CD를 은행에 제시하면 신씨와 김씨는 주로 더 액수가 높은 새 가짜 CD를 발행해 주는 ‘돌려막기’ 방식으로 결제를 해왔다. 그러다 지난 7월 하순 CD 만기를 앞두고 두 사람이 해외로 도망가면서 사건이 표면화된 것이다.
경찰관계자는 “위조된 CD가 아주 정교한 것으로 보아 전문 위조범이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CD의 유통과 돈세탁은 금융시스템 전반을 잘 알고 있는 전문가들의 소행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신씨 등은 빼돌린 진짜 CD 중 일부를 증권사와 보험사, 명동 사채시장 등을 통해 유통했다. 경찰은 이들이 CD 할인 등을 통해 약 8백50억원을 현금화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한 사채업자는 “신씨나 김씨 같은 간부급 은행원이 진본 CD를 들고 와 ‘CD 주인이 이민 가거나 세무조사 때문에 급하게 처리해야 된다’며 할인을 부탁하면 사채업자 누구라도 응했을 것이다”며 “보통 (사채시장) CD 할인율이 20~30%에 달하고 고액일수록 할인율은 더 높다. 웬만한 사채업자의 경우 수십억짜리 CD 한 장만 할인해도 1년 장사는 다한 거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은행원 둘만의 힘으로 CD할인을 통해 8백50억원을 현금화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게 사채업자들의 전언. 수사결과 신씨 등은 M물산을 통해 진본 CD를 시장에서 할인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이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M물산 대표 최아무개씨(41)를 검거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번 위조 CD 사건은 지난 8월30일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도피했던 조흥은행 전 차장 김씨가 귀국하면서 수사의 전기를 맞는 듯했다. 그러나 김씨는 “친구인 신 (전) 과장이 예금유치 실적을 높일 수 있다며 CD를 유통시켜 나도 모르게 범행에 가담하게 됐다. 하지만 CD를 위조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속았다는 걸 알고 발을 빼려 했지만 신 과장이 ‘너도 공범이다’라고 협박하는 바람에 여기까지 끌려왔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들이 현금화해 빼돌린 막대한 돈은 과연 어디로 갔을까. 돈의 행방은 이번 사건의 배후를 찾을 수 있는 핵심 키이기도 하다.
신씨 등이 M물산을 통해 현금화한 8백50억원은 모두 13명의 계좌로 나뉘어 빠져나간 것으로 드러났다. 이 중 30억원은 한 부동산개발회사를 통해 영종도 개발권에 속한 서해안 한 섬의 부지를 매입하는 데 사용됐다. 이 계좌의 명의자는 해외로 도피한 상태다.
이들 13명 중에는 미국 시민권자와 검사 출신의 김아무개 변호사도 포함돼 있었다. 김 변호사의 계좌에는 지난 6월 1백2억원이 입금됐다가 3일 만에 모두 빠져나간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김 변호사는 경찰 조사에서 “성당에서 알게 된 한 여성이 통장 하나 만들어달라고 해서 주민등록증을 빌려준 것밖에 없다. 그 돈에 대해서 아는 바 없다”며 자신의 혐의를 강하게 부인했다.
일단 경찰은 8백억이 넘는 돈을 범인들이 현금으로 인출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수사관계자는 “현재까지 영종도에 ‘투자’한 돈 30억원 외에는 밝혀진 돈의 흐름은 없다. 다만 용의자 중 상당수가 중국으로 도피한 점으로 미루어 환치기 조직을 통해 중국으로 불법송금됐거나 국내 여러 계좌에 분산됐을 것이라고 추측만 할 뿐이다”고 전했다.
한편 사채시장에서는 이 사건과 관련해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증권가의 큰손이 연관됐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사채시장에 정통한 한 인사는 “이들 일당이 지난 5월과 6월 거액의 CD를 할인하려 하자 금액이 너무 커 사채업자들이 주저했는데 이때 이들이 ‘우리 뒤엔 증권가의 큰손 A회장이 있다. 걱정하지마라’는 말로 안심시켰다는 풍문이 돌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경찰의 한 관계자는 “그런 소문은 들었지만 구체적인 단서가 나온 것은 아니다. 다만 사기 일당 상층부에 금융시스템 전반을 훤히 꿰뚫고 있는 주모자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주모자가 국민은행 신 전 과장을 끌어들여 이런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경찰은 이번 사건의 ‘피해자’ 격인 토지신탁과 전기조합 내부에서도 공모자가 있는지 여부를 수사하고 있다. 한 수사관계자는 “특히 토지신탁의 경우 위조된 CD의 거의 대부분인 4천억원의 CD를 가지고 있었다. 위조 횟수나 금액으로 볼 때 만에 하나 토지신탁 내부자의 공모 가능성도 있어 조사중이다”고 전했다.
그러나 토지신탁측은 “이번 사건은 해당은행 내부통제시스템 미비에 따른 은행 직원의 횡령사건이다. 우리는 선의의 피해자이므로 자금 회수에는 문제없다”고 반박했다.
한 수사 관계자는 “중국으로 도피한 신 전 과장과 그 뒤의 배후세력이 잡혀야 진상이 밝혀질 것 같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