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산 모 대학 경리부장 피살사건 피해자 김아무개씨의 사체가 발견된 하천 수로 내부. | ||
지난 연말 천안 경찰서에 의해 구속된 김아무개씨(43)와 공범으로 수배를 받고 있는 나아무개씨(43)가 함께 살았던 집과 차량에서 경찰관으로 위장하기 위한 허리띠, 검문용 플래시봉, 경광등 등의 도구들이 잇따라 발견됐기 때문이다. 지난해 충남 천안 일대에서 고급 승용차만을 노린 비슷한 납치 살인 사건들이 여러 차례 발생했으며 이 중 미수에 그친 사건 피해자가 김씨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기도 하다. 여기에 범행 수법과 도구, 사체유기 방법까지 유사해 일부에서는 ‘제2의 유영철’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2005년 12월30일, 실종된 지 40일 만에 사체로 발견된 아산 모 대학 경리부장 김아무개씨(52)는 고급 승용차를 몰다 납치된 뒤 살해당했다.
김씨가 실종된 것은 지난해 11월 18일. 경찰 조사에 따르면, 김씨는 퇴근 후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오후 8시 40분경 자신의 아파트 근처에서 내린 것으로 확인됐다. 이 지점에서 김씨의 아파트까지는 걸어서 5분 거리. 그러나 김씨는 귀가하지 않았고 두 시간 뒤 집으로 전화를 걸어 “손님을 만나 찜질방에 갔다가 들어가겠다”는 말을 남긴 후 소식이 끊겼다. 김씨는 아파트에 주차돼 있던 차를 몰고 다시 밖으로 나간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김씨가 납치된 것으로 밝혀진 것은 다음날 오후 한 택시 운전기사로부터 김씨의 자필 편지가 배달되면서다. “여보 내가 지금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으니, ‘05. 11. 21. 16:00에 서부역사 택시 승강장에 현금 5천만원을 아들의 차량에 싣고 가서 돈을 받으러 가는 사람에게 건네주기 바래, 여보 미안해 부탁이야.” 편지의 내용은 김씨의 절박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가족들 대신 편지의 내용대로 김씨의 아들 차량에 현금을 싣고 택시 승강장에 나가 기다렸다. 그러나 약속 장소에 나타난 것은 용의자가 아닌 퀵 서비스 배달원. 용의자가 요구한 장소로 현금 가방을 가져가던 배달원에게 다시 전화가 걸려왔고 용의자는 다른 동네의 한 식당으로 배달 장소를 변경했다. 이 식당에도 범인들 대신 배달을 의뢰받은 택시 기사가 나타났고 현금 가방은 다시 2차 장소인 한 포장마차로 옮겨졌다. 범인들은 포장마차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택배 가방이 도착했느냐”고 확인을 했으나 실제로 나타나지 않아 범인 체포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경찰은 현금 가방의 배달 장소였던 식당에서 결정적인 단서가 될 용의자들의 지문을 채취할 수 있었다. 식당 주인에 따르면 현금 가방이 배달되기 전날 두 명의 남자가 술을 마시면서 식사를 했고, “내일 가방이 하나 배달돼 오는 데 잘 맡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는 것. 식당에는 용의자들이 마시던 소주병이 보관돼 있었고 다행히 여기서 지문을 채취할 수 있었다.
경찰은 동종 전과자들의 지문 대조 작업을 벌인 결과 김아무개씨를 찾아낼 수 있었고 경리부장의 신용카드와 약속 장소 변경 때 쓴 휴대 전화 사용자까지 확인, 사건 발생 한 달여 만에 서울 모 병원에 입원 중이던 김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구속했다.
당초 김씨는 아파트 주차장에서 문이 잠겨있지 않은 승용차를 발견, 지갑과 골프채를 훔쳤을 뿐이라고 주장하며 범행을 부인했으나 경찰의 집요한 추궁에 “친구인 나아무개로부터 경리부장을 살해한 뒤, 아산시 배방면에 있는 한 하천에 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진술했다. 이를 토대로 수색에 나선 경찰은 지난해 12월30일 경리부장 김씨의 사체를 아산시 배방면 하천 수로에서 발견했다.
이들이 최근 발생한 연쇄 납치 살해 사건의 범인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은 이들이 마지막으로 함께 지냈던 서울의 거처와 버려진 나씨의 차량에서 경찰관 허리띠, 검문용 플래시봉, 케이블 타이, 차량 번호판 등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2월과 3월 발생한 천안시 백석동 이아무개씨 살인 사건과 쌍용동 민아무개씨 살인미수 사건, 충북 청원군 오창면에서 발생한 최아무개씨 살인사건이 모두 고급 승용차 운전자를 노린 납치살인사건이었다.
피해자들은 모두 외제나 국산 고급 승용차를 소유하고 있었고, 늦은 밤 귀가 길에 범행을 당했다는 점, 사체가 제3의 장소에 유기됐다는 점도 일치한다. 또 백석동에서 살해당한 이씨와 청원군 오창면에서 사체로 발견된 최씨의 경우, 손목을 묶은 끈이 용의자들의 집에서 압수한 증거물과 같은 것으로 밝혀졌다.
더욱이 지난해 3월 외제차를 몰고 가던 중 괴한 2명에게 납치당할 뻔했으나 가까스로 탈출한 민씨가 “붙잡힌 김씨가 그 때 나를 위협한 범인 중 한명이 확실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경찰 조사에서 민 씨는 “뒤에 있던 차가 내 차를 들이 받았고 경찰복 차림의 한 남자가 내려 ‘경찰’이라며 다가왔다. 사고 처리를 하지 않고 그냥 돌려보내겠다고 친절을 베푸는 척하며 차에 타고 있던 다른 한명에게 명함을 가지고 오라고 시켰고, 명함을 가지고 오는 척하면서 갑자기 강도로 돌변했다”고 진술했다. 민씨는 흉기로 위협받는 상황이었지만 두 명을 상대로 격투를 벌였고 완강한 반항에 범인들이 달아나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의심될 만한 정황과 증거품들이 잇따라 발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용의자 김씨는 아직도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범인 나씨가 붙잡히기 전에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고 버티고 있다는 것.
천안경찰서측은 “범행 현장에서 수거한 머리카락 등이 용의자의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구속된 김씨는 물론, 공범 나씨가 피웠던 담배꽁초 등을 찾아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유전자 감식을 의뢰한 상태”라며 “검사 결과가 나오고 공범 나씨가 검거되면 이번 사건은 물론 연쇄 살인에 대한 의혹도 풀릴 것”이라고 밝혔다.
양하나 프리랜서 hana01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