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0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김두우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책을 소개하고 있다. 구윤성 기자 kysplanet@ilyo.co.kr
“그런 얘기를 왜 하나. 술맛 떨어지게.”
지난 12월 18일 이명박 전 대통령은 송년회 자리에서 한 측근이 여야가 합의한 자원외교 국정조사에 대해 묻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제법 술기운이 오른 이 전 대통령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얼굴엔 언짢은 표정이 역력했다고 한다.
이 전 대통령은 송년회 참석을 위해 들어가는 길에 만난 기자들의 같은 질문에 “국회에서 할 일”이라면서도 “구름 같은 이야기 아니냐”며 에둘러 심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평소 이 전 대통령은 형식적인 말은 앞에 꺼낸 뒤 정작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끝부분에 하곤 했다. ‘구름 같은 이야기’는 정치권이 근거 없는 공세로 자원외교를 폄하하고 있다는 이 전 대통령 인식이 담겨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송년회에 참석했던 한 친이계 인사는 이렇게 귀띔했다.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다. 이 전 대통령이 직접 폭탄주를 돌리고 건배사도 했다. 퇴임 후 늘 이맘때 하던 송년회였는데 자원외교 국정조사와 겹치면서 시선을 많이 끈 것 같다. 지켜보는 눈들이 많은데 민감한 정치 얘기를 할 수 있었겠느냐. 다만, 참석자 대부분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도 우리가 모셨던 대통령인데, 국정조사 증인 얘기까지 나오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 전 대통령이 오히려 우리를 위해 기운 내라고 했다. 그러나 이 전 대통령도 친박까지 (증인 출석 요구에) 동조하고 있다는 얘기에 섭섭함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송년회가 끝난 후 이 전 대통령 증인 출석만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입장을 정리했다.”
친이계 불만은 그 후 더욱 쌓여갔다. 친박계가 친이를 포함한 비박 인사들을 노골적으로 배제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인 까닭에서다. 송년회 다음날인 12월 19일 박 대통령은 친박 중진 의원들만 불러 만찬을 열었다. 또 12월 30일엔 친박 의원들이 비박계 좌장격인 김무성 대표를 향해 비난에 가까운 거친 발언을 쏟아내기도 했다. 원내대표 경선 등을 앞두고 친박계가 본격적인 주도권 싸움에 나선 것이다.
일각에선 박 대통령 지지율 하락에 따른 친박계 이탈을 막기 위한 포석이란 관측도 나왔다. 특히 친이계는 자원외교 국정조사에서 야권이 요구하고 있는 이 전 대통령 증인 출석을 친박계가 합의해줄 것이란 소문에 격앙된 분위기다. 친박은 이 전 대통령 증인 출석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전 대통령은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서 자원외교를 적극 옹호하고 나섰다. 자원외교는 장기적 안목에서 바라봐야 하고, 투자 대비 회수율은 노무현 정권보다 높다는 내용이었다. 주목할 것은 자원외교 컨트롤타워는 한승수 전 총리라고 언급한 부분이다. 이는 자원외교 국정조사 특위가 이 전 대통령과 친형 이상득 전 의원을 증인으로 채택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반박 성격이 짙다. 새누리당의 한 친이계 의원은 “야권보다는 여권을 향한 경고 메시지로 보는 게 맞다. 이 전 대통령은 친박이 자신을 증인으로 세울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회고록을 통해 선을 그은 것이다. 친박이 계속 밀어붙이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말했다.
이처럼 이 전 대통령이 직접 해명에 나선 것은 자원외교가 그만큼 지난 정권 역점 사업이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런데 이와 관련 정치권과 사정당국 주변에선 다른 해석이 나오고 있어 관심을 끈다. 현 정부가 자원외교 비리에 대해 광범위한 내사를 벌이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2011년 당시 청와대에서 만난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청와대사진기자단
실제로 검찰은 MB 정부의 한 실세 친인척이 자원외교와 관련, 거액의 커미션을 챙겼다는 첩보에 대해 내사를 진행 중이다. 검찰 고위 관계자는 “아직 수사까지 발전된 게 아니라 밝히긴 어렵다. 그러나 MB 정부 실세 자녀가 자원외교 과정에 개입했다는 혐의를 내사하고 있는 것은 맞다. 꽤 신빙성 있는 첩보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전 대통령 측은 집권 3년차에 접어든 박근혜 정부가 국정조사 특위에서 다루고 있는 자원외교에 대해 별도의 사정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것을 놓고 정치적 의도가 있을 것으로 본다. 그동안 현 정부와의 마찰을 되도록 피하고자 했던 친이계가 전면전까지 불사하고 있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앞서 송년회에 참석한 친이계 인사는 “현직 대통령과 맞서봐야 우리가 뭐 이로울 게 있느냐. 그동안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친박이 ‘역린’을 건드리고 있다”며 “박 대통령 지지율이 추락하니까 전직 대통령을 잡아 회복하겠다는 것 아니냐. 친박이 이 전 대통령 증인 출석을 수용하는 대신 다른 것을 야권으로부터 얻어내려 한다는 얘기까지 돌고 있다”고 털어놨다.
이 전 대통령은 <대통령의 시간>에서 2009년 추진했던 세종시 수정안을 당시 의원이던 박 대통령이 반대한 것을 놓고 “정운찬 대세론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박 대통령이 원칙과 약속 때문에 세종시 수정안에 반대한 게 아니라 잠재적인 대권 후보의 급부상을 경계했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으로선 기분이 나쁠 법한 내용이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유감’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친박계 중진 의원은 “행간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종시 문제에서 왜 박 대통령을 언급했겠느냐. 이는 이 전 대통령이 박 대통령 관련 자료들을 더 가지고 있으며 여차하면 공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면서 “협박이나 다름없다. 이 전 대통령이 집권 내내 박 대통령 X파일을 수집했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전 대통령 측은 몇몇 친이 인사를 통해 자신의 의중을 청와대에 전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번엔 꽤 강도 높은 불만이 주를 이뤘다고 한다. 사실상 ‘최후통첩’이었던 셈이다. 이에 대한 친박계 반응은 크게 둘로 나뉘고 있다.
우선 친이계와의 ‘휴전파’다. 이들은 집권 3년차를 맞아 당의 뒷받침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에서 친이와의 싸움이 계속되면 결국 박 대통령에게 부메랑이 될 것이란 논리를 편다. 반면 자원외교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높은 상황에서 철저한 비리 수사를 통해 국면을 전환하자는 견해도 적지 않은 모습이다.
권대우 정치평론가는 “관건은 박 대통령 지지율이다. 좀처럼 회복하지 못한다면 결국 박 대통령은 전 정권에 대한 사정의 칼을 들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그래왔지 않느냐. 반면, 지지율이 올라간다면 박 대통령으로선 굳이 전 정권과 대립각을 세우진 않을 것으로 본다”고 점쳤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