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투수 사첼 페이지가 자신만만하게 남긴 명언이다. 페이지는 흑인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만 42세였던 1948년에야 메이저리그에 입성한 비운의 천재 투수다. 20대 시절 니그로 리그와 멕시칸 리그에서 뛰면서 50타자 연속 탈삼진이라는 비공인 기록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스트라이크’의 위력을 직접 보여줬던 인물이기에 이런 자신감도 가능했을 터다. 페이지의 말대로, 마운드에 선 투수들의 첫 번째 임무이자 가장 중요한 무기는 스트라이크다. 초구 스트라이크의 중요성은 더 이상 강조할 필요도 없을 정도다. 투수들은 홈플레이트 위에 설정된 가상의 ‘네모’ 안으로 공을 통과시키기 위해 어릴 때부터 무수한 훈련을 반복한다. 야구는 투수가 던진 공이 스트라이크냐 볼이냐에 따라, 그리고 그 결과로 볼카운트가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 공수 전반이 요동치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스트라이크가 중요하고, 스트라이크존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올 시즌부터 스트라이크존 상한선이 공 반개 정도 높아지면서 투수들이 심리적 부담을 한결 덜게 됐다. 사진제공=두산 베어스
#스트라이크는 무엇인가
야구규칙 2.72에는 스트라이크의 정의가 ‘투수의 정규투구로서 심판원이 “스트라이크”라고 선언한 것을 말한다’고 명시돼 있다. 단순히 스트라이크존을 통과한 투구만이 스트라이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범위는 생각보다 더 넓다. ▲타자가 쳤으나 투구에 방망이가 닿지 않은 것 ▲타자가 치지 않은 투구 가운데 공의 전부 또는 일부분이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한 것 ▲노 스트라이크 또는 1 스트라이크일 때 타자가 쳤으나 파울볼이 된 것 ▲번트한 것이 파울 볼이 된 것 ▲타자가 친 공이 타자의 몸이나 옷에 닿은 것 ▲스트라이크 존에서 타자에게 닿은 것 ▲파울 팁이 된 것 등이 모두 스트라이크로 선언된다.
초창기 야구에는 아예 ‘스트라이크’라는 개념이 없었다. 타자가 공을 치는 것이 야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투수는 타자가 배트에 공을 맞힐 때까지 ‘던지는’ 임무에만 충실했다. 현대 야구의 아버지라 불리는 알렉산더 카트라이트가 1845년에 ‘삼진아웃’이라는 규칙을 처음으로 만들면서 조금씩 변화가 시작됐다. 스트라이크존은 따로 없이, 타자가 헛스윙을 세 번 하면 아웃으로 간주됐다. 1871년에야 처음으로 ‘스트라이크존’이라는 개념이 생겼다. 일단 타자가 투수에게 높은 쪽(허리부터 어깨까지)이나 낮은 쪽(바닥부터 무릎까지)으로 던져달라고 요구하고, 투수가 그 주문에 맞는 공을 던지면 스트라이크, 아니면 볼로 판정하는 식이었다. 요즘 야구와 유사한 스트라이크존은 1887년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지금보다 훨씬 넓었다. 타자의 무릎 아래 부분부터 어깨까지가 상하 범위였고, 좌우는 타자의 어깨 넓이에 해당했다. 야구가 점점 발전하고 규칙이 세분화되기 시작하면서 스트라이크존도 자연스럽게 좁아지기 시작했다.
#스트라이크 존의 기준은?
야구규칙 2.73에는 스트라이크 존에 대해 ‘유니폼의 어깨 윗부분과 바지 윗부분 중간의 수평선을 상한선으로 하고, 무릎 아랫부분을 하한선으로 하는 홈 베이스 상공을 말한다. 스트라이크 존은 투구를 치려는 타자의 스탠스에 따라 결정된다’고 설명돼 있다. 대략 타자의 팔꿈치에서 겨드랑이 사이가 상한선의 기준이라고 보면 된다. 타자가 스트라이크존을 좁히기 위해 일부러 몸을 한껏 숙여 봐도 달라지는 건 없다. ‘투구를 기다리는 타자가 스트라이크 존이 좁아 보이게 하려고 평소와 달리 지나치게 웅크리거나 구부리더라도 주심은 이를 무시하고 그 타자가 평소 취하는 타격자세에 따라 스트라이크 존을 정한다’는 세부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스트라이크존은 그동안 정해진 규칙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세밀하게 넓어졌다 좁아지기를 반복해왔다. 매 시즌이 끝나면 한국야구위원회(KBO) 기술위원장과 심판진이 회의를 통해 시즌 중의 문제점을 개선하려는 시도를 하기 때문이다. 투수들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스트라이크존에는 가급적 변화를 주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그 해 프로야구 양상에 따라 조정이 불가피한 경우도 있다. 투고타저가 너무 심하면 스트라이크존을 좁히고, 반대로 타고투저가 심하면 더 넓히는 식이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프로야구는 전례를 찾기 힘든 타고투저로 몸살을 앓았다. 결국 KBO와 심판진은 2015시즌부터 스트라이크존을 확대하기로 합의했다. 스트라이크존 상한선이 공 반 개 정도 높아지면서 투수들이 바깥쪽과 몸쪽 높은 코스의 공을 활용할 때의 심리적 부담감을 한결 덜게 됐다. 물론 심판들과 투수들 모두 새로운 존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 심판들은 올해 동계 합동훈련에서 스트라이크·볼 판정 연습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앞으로 각 구단의 일본 전지훈련 캠프에서 치러질 연습경기와 시범경기 기간이 심판들과 투수들에게는 좋은 모의고사다.
#좋은 스트라이크는 따로 있다
투수에게 ‘스트라이크 던지기’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단순히 스트라이크존을 통과한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힘없이 한가운데로 몰리거나 높게 뜬 스트라이크는 오히려 타자에게 가장 좋은 먹잇감이 된다. 투수 출신인 A 야구 관계자는 “스트라이크 존에 공을 던질 수 있는 프로 선수들은 많다. 프로에 지명됐을 정도라면 80% 이상은 타자가 없을 때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있는 투수일 것”이라며 “그러나 존으로 공을 던지는 것과 스트라이크 선언을 받는 것은 별개의 일”이라고 잘랐다. “실전에서는 타자의 강점과 약점을 잘 파악하고 머리를 쓰면서 실수 없이 공을 던져야 하기 때문에 훨씬 더 정교한 제구력과 대담한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수준급 투수와 그렇지 않은 투수의 차이가 여기서 갈린다”는 설명이다. 베테랑 B 투수도 “목적의식을 갖고 공격적으로 던진 스트라이크는 타자에게 강한 메시지를 던진다. 반대로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특정 지점을 ‘조준한다’는 마음으로 던진 스트라이크는 과녁을 맞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며 “투수들끼리는 후자 같은 공을 ‘갖다 놓는다’고 표현한다. 승부를 위한 스트라이크를 던지려면 결단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진짜 영리한 투수는 한 발 더 나아간다. 환경에 개의치 않고 언제 어디서나 자신만의 스트라이크를 던질 줄 안다. LA 다저스 류현진이 좋은 예다. 류현진이 한화 시절 처음으로 메이저리그에 도전한다고 선언했을 때, 국내의 일부 야구 전문가들은 “공이 전체적으로 높은 편이라 파워 히터들이 즐비한 메이저리그에서는 고전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오판이었다. 류현진은 데뷔 첫 해부터 새로운 리그의 새로운 스트라이크존에 완벽하게 적응했다. 오히려 바뀐 존의 구석구석을 누구보다 잘 활용했다. C 투수코치는 “스트라이크를 잡는 능력은 ‘스트라이크존’을 통과하는 공을 던지는 능력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공을 던지는 능력”이라고 했다.
#스트라이크존은 경기시간도 좌우?
스트라이크와 볼을 가려내는 구심의 역할은 막중하다. 때로는 그 판정이 경기 시간을 좌우하기도 한다. 승부가 한 팀 쪽으로 크게 기운 경기에 한해서다. 점수 차가 많이 벌어지면, 지고 있는 팀은 대체로 추격조, 이른바 ‘패전처리조’에 속한 투수들을 마운드에 올린다. 이들은 아무래도 선발투수나 승리조 불펜투수들에 비해 스트라이크의 비율이 낮은 편이다. 이 때 구심이 경기 초반과 같은 스트라이크존을 엄격하게 유지하면 경기가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지게 마련이다.
D 관계자는 “이럴 때 눈치 빠른 심판들은 ‘운영의 묘’를 발휘한다”고 귀띔했다. 이 관계자는 “승부가 거의 결정된 경기가 너무 길어지면 선수들, 심판들은 물론 팬들도 지치기 마련”이라며 “경기가 접전 상황이라면 심판들도 평소보다 더 엄격하고 정확한 판정을 위해 힘을 쏟지만, 반대로 거의 승패가 결정됐다고 판단되면 경기 후반에는 스트라이크존을 초반보다 아주 조금씩 넓게 조정해 흐름을 빠르게 한다”고 했다. 물론 양 팀에 공히 똑같은 존을 적용한다는 전제 하에서다. E 야구 관계자도 “한국 야구 경기 시간은 심판진들의 경력에 비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경력이 적은 심판들은 경기 초반이나 후반이나, 접전이나 원사이드 승부나 관계없이 초지일관 자신의 존을 고수한다. 투수들은 결국 계속 볼넷을 주고, 그러다 보면 심판 스스로도 지치고 집중력이 흐트러져서 오히려 판정이 오락가락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배영은 스포츠동아 기자 yeb@donga.com
스트라이크 판정에 얽힌 비화 몸쪽공에 야박하던 C 심판 과거 알고보니… 스트라이크·볼 판정은 모두가 인정하는 심판의 고유 권한이다. 아무리 심판의 권위가 바닥을 치고 비디오 판독의 다른 말인 ‘심판합의판정’ 제도가 신설됐다 해도, 투수가 던진 공이 스트라이크인지 볼인지 판정하는 역할만큼은 심판들이 지켜야 할 최후의 자존심이자 마지노선이다. 야구규칙 9.02에도 ‘투구가 스트라이크냐 볼이냐 하는 심판원의 판단에 따른 재정은 최종의 것이다. 선수, 감독, 코치 또는 교체 선수는 그 재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명시돼 있다. 베테랑 A 심판은 “다른 판정에 대해 감독이나 선수가 항의할 때는 우리도 최대한 잘 설득하고 좋게 대화로 풀어 보려 한다. 그러나 스트라이크·볼 판정에 대해 불만을 표시할 경우에는 그 어느 때보다 엄격하게 경고를 준다”고 했다. 심판의 스트라이크 판정에 놀란 두산 김현수. 사진제공=두산 베어스 반면 E 심판은 눈에 띄게 특정 팀에 유리한 판정을 내린다는 의혹의 시선을 많이 받았다. 한 구단 관계자는 “그 심판이 좋아하는 팀 투수들은 같은 경기 안에서도 상대팀보다 공 한 개 정도 넓은 스트라이크존을 활용할 수 있었다”며 “우리 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팀이 같은 생각을 해서 불만이 많았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F 심판은 선수의 커리어나 이름값에 따라 판정이 달라진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또 다른 구단 관계자는 “백업 선수가 서 있었다면 스트라이크였을 공이 스타 선수가 서 있을 때는 볼로 둔갑하는 일도 많았다”고 덧붙였다. 만나기만 하면 스트라이크·볼 판정 때문에 신경전을 벌이는 ‘악연’의 심판들도 팀마다 한두 명씩은 있다. 시즌 도중 중요한 경기에서 그 심판을 구심으로 만나게 되면 구단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다. 심판과 투수들이 서로 민감해져 있기에 더 그렇다. 감독들이 직접 나서 스트라이크·볼 판정에 반기를 들면 일이 커지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1999년 한화 이희수 감독의 폭행사건이다. 이 감독은 당시 선발투수 구대성이 구심의 볼 판정에 불쾌한 심기를 드러내다 퇴장당하자 더그아웃을 박차고 나와 해당 심판에게 강하게 항의했다. 그리고 경기가 끝난 뒤 심판에게 다가가 야구공을 쥔 손으로 얼굴을 냅다 때렸다. 그 결과 이 감독은 12경기 출장 정지와 벌금 200만 원이라는 중징계를 감수해야 했다. [은] |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을 아시나요 훨훨 날던 투수가 이유 없이 겔겔 혹시? 잘나가던 투수가 어느 날 갑자기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한다면?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표현조차 부족할 지경일 것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갑자기 제구력을 잃게 되는 무서운 증상. 많은 야구 영재들의 꿈을 앗아간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Steve Blass Syndrome)’이다. 실제로 이 증상은 신체적으로 원인을 찾을 수 없다. 극심한 스트레스와 기억력 저하가 불러오는, 일종의 정신적인 문제로 여겨질 뿐이다. 국내에서도 일부 투수들이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의 경험담을 호소한 적이 있다. 한 선수는 “고교 시절부터 150㎞를 던지며 잘나가던 동기생 투수가 고3 때 이 증후군 때문에 야구를 그만두는 모습을 봤다”고 했다. 야수들 역시 송구가 마음대로 안 되는 증상 때문에 고생하기도 한다. 두산 홍성흔은 최근 한 TV 프로그램에서 “갑자기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 때문에 1루 송구가 불가능해져서 포수 마스크를 벗었다”고 고백해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을 성공적으로 극복한 대표적 사례는 세인트루이스의 거포 릭 엔키엘이다. 엔키엘은 2000년 150㎞대 중반의 강속구를 앞세워 11승을 올린 좌완 투수였지만, 그해 내셔널리그 디비전시리즈 1차전에서 1이닝 동안 폭투만 다섯 개를 기록하면서 강판됐다. 이후 마이너리그에서 부상까지 겹치면서 재기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끈질긴 노력 끝 타자로 대성하는 기쁨을 맛봤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