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뉴엘은 담뱃갑에 기프트카드를 넣어 전달하거나 와인상자, 티슈통에 5만 원권 현금 다발을 넣어 건네기도 했다. 또 강남 고급 유흥주점에서 하룻밤에 1200만 원을 접대비로 써 논란이 인 바 있다. 사진은 영화 <강남 1970>의 한 장면.
‘8억 600만 원.’
중견가전기업 모뉴엘이 한국무역보험공사, 수출입은행 간부 등에게 쓴 총 뇌물 비용이다. 모뉴엘은 이를 토대로 지난 2007년 10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허위 수출 실적을 제시해 시중은행에서 막대한 사기대출을 받았다. 현재까지 확인된 사기대출 규모만 ‘3조 4000억 원’이다. 고작 8억 원대의 뇌물로 수천 배의 효과를 본, 크게 남는 장사를 한 셈이다.
모뉴엘의 뇌물 수법은 한마디로 기상천외했다. 모뉴엘 박홍석 대표가 주로 이용한 것은 ‘담뱃갑’이다. 박 대표는 무역보험공사 고위 간부를 만난 자리에서 담뱃갑 하나를 건넸다. 담배가 들어있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 안에서는 50만 원짜리 기프트카드 수십 장이 들어있었다. 박 대표는 직급이 높을수록 기프트카드를 더 꽉꽉 채워 전달한 것으로 파악됐다.
한국무역보험공사 조계륭 전 사장에게는 담뱃갑뿐만 아니라 ‘각티슈통’이 동원됐다. 검찰에 따르면 5만 원권으로 각티슈통을 꽉 채우면 최대 ‘5000만 원’이 들어간다고 한다. 하지만 박 대표는 주변 시선을 의식해 각티슈통에 3000만 원을 넣고 나머지 공간은 휴지로 채워 건넸다. 각티슈통뿐만 아니라 와인 상자도 동원됐는데, 여기에는 한 번에 4000만 원에서 5000만 원을 넣을 수 있었기에 로비에 유용하게 쓰였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모뉴엘에게 돈을 받은 공무원 중에는 술값을 대납시키거나 허위 고문계약을 체결하고 고문료를 받는 사례, 심지어 자녀를 취직시킨 사례까지 확인됐다”라고 전했다.
이렇듯 모뉴엘의 로비는 최신 로비의 정석을 보여준다. 특히 담뱃갑에 넣었던 ‘기프트카드’는 뇌물의 신 트렌드로 불릴 정도다. 실제로 최근 200억 원대 비자금을 조성하고 군 관급공사와 관련, 평가위원들에게 뇌물을 전달한 혐의로 임직원들이 대거 입건된 ‘대보그룹 사태’ 때도 다량의 기프트카드가 동원됐다. 지난해 4월 한국공항공사 직원 뇌물수수 사건 당시 협력업체 직원들이 사용한 뇌물도 역시 기프트카드였다.
무기명 선불카드인 기프트카드는 2002년 처음 등장해 대부분의 카드사에서 발행하고 있다. 기프트카드는 통상 5만 원부터 50만 원, 금액이 높으면 500만 원까지 종류가 다양한데, 이중 특히 뇌물로 자주 쓰이는 기프트카드는 ‘50만 원 권’이라고 한다. 500만 원의 경우 기명이지만, 50만 원은 무기명이기 때문. 뇌물 사건을 자주 다룬 한 경찰 관계자는 “기프트카드가 로비 용도로 사용된다는 얘기는 자주 들었다. 일단 현금에 비해 부피가 가볍지만 금액은 크다는 점도 있고 받는 사람 입장에서도 현금보다는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뇌물 카드’로 우리끼리 부를 정도겠느냐”라고 전했다. 이밖에 기프트카드는 사용해도 카드 고유 일련번호만 기록되어 흔적이 남지 않기에 로비에 유용하게 쓰인다는 전언이다.
서울 금천구에 위치한 모뉴엘 본사 전경. 최준필 기자
로비하면 ‘유흥 로비’를 빼놓을 수 없다. 앞서 언급한 ‘명함 방식’은 2차에도 어김없이 사용되고 있다는 얘기가 돌고 있다. 식당과 유흥업소가 연계된 곳도 있는데, 식당에서 1차를 먹고 전용 승합차를 탄 뒤 유흥업소로 곧바로 이동하는 방식이다. 앞서의 재계 관계자는 “명함 방식으로 2차도 당연히 보장된다. 그 와중에 진상도 존재하기 마련인데 정해둔 업소에 아가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몇 군데를 옮겨 다니는 경우도 봤다. 이 과정에서 비용이 몇 배로 늘어나기도 한다”라고 전했다.
모뉴엘의 경우 강남 고급 유흥주점에서 하룻밤에 ‘1200만 원’을 접대비로 써 논란이 인 바 있다. 접대비도 고액인 데다가 유흥비까지 대납시킨 파렴치한 방식이다. 하지만 이 방식은 너무 흔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까지 암암리에 계속해서 진행되는 것은 ‘법인카드 카드깡’이다. 예를 들어 50만 원 정도 술값이 나왔다면, 100만 원을 법인카드로 긁은 뒤 나머지 50만 원을 현금으로 돌려받은 후 공무원들에게 ‘차비’ 형식으로 챙겨주는 방식이다.
무엇보다 로비와 뇌물이 가장 횡행하는 곳은 건설업계다. 입찰 경쟁을 포함해 각종 인허가 과정이 따라 붙기에 로비가 ‘필수 코스’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로비와 관련한 얘기는 일종의 ‘금기’처럼 여겨지고 있다. 기자는 복수의 건설업 관계자에게 접촉을 시도했으나 “이미 다 나온 얘긴데 알아서 뭐하느냐”라는 퉁명스러운 답밖에 들을 수 없었다. 이 와중에 한 중견 건설사 관계자는 특이한 접대 방식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해당 관계자는 “골프로 접대를 많이 하긴 하는데 야외로 나가기 힘들면 스크린 골프장을 이용하곤 한다. 스크린 골프장은 단연 도우미가 필수다. 게임을 하다가 ‘나이스샷’을 날리면 도우미가 옷을 하나씩 벗는 스크린골프장도 있다. 골프 내기를 할 때 미리 봉투를 준비해두는데 승부에 아슬아슬하게 져주는 것도 하나의 팁”이라고 귀띔했다.
이밖에 건설업계에서는 무조건 ‘현금박치기’가 대세라고 한다. 뒤끝도 없고 탈이 없기 때문. 업계에 따르면 돈 봉투를 책상 서랍에 놓아둔 후에 전화로 귀띔하는 방식도 종종 쓰인다고 한다. 실제 대보건설의 한 이사는 군 관급공사와 관련해 심사위원 책상 서랍에 돈을 놓아두고 후에 전화로 통보하는 방식을 쓴 것으로 전해진다.
정치권에서는 보다 고차원적인 로비 방식이 쓰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름하야 ‘정보로비’다. 이 중에서도 부동산과 주식정보가 가장 많이 쓰이는 로비 방식이다. 정치권 관계자 A 씨는 최근 한 기업 관계자가 ‘설명회’를 한다며 초청을 했다고 한다. 사무실을 찾아가니 ‘부동산 컨설팅’이라는 명목으로 정치권에서 아는 얼굴이 몇 명 있었다고 한다. A 씨는 “부동산과 관련해 솔깃할 만한 고급정보들이 오고 갔다. 기업 투자가 어떻게 벌어지고 어느 땅이 오를 것이란 정보다. 그때 부동산을 사진 않았지만 샀다면 돈 꽤나 벌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주식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는 대기업 핵심 관계자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앞서의 A 씨는 “대기업 핵심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었는데 종이에 자기들 계열사 딱 3개를 적어주며 ‘이거예요. 이거’라고 하더라. 무슨 뜻인지 몰라 ‘이게 뭔가요’라고 물었는데 알고 보니 해당 계열사 주식을 사라는 얘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안 있어 계열사 주식이 상승해 있었다”라고 전했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
‘모래성 벤처신화’ 모뉴엘 사건은? 3조원 사기대출 “날 좀 말려줘~” 2012년 11월 세계 최대 가전전시회인 CES에서 모뉴엘은 7개 부분에서 제품 혁신상을 받았다. 모뉴엘의 ‘벤처신화’가 우뚝 서는 순간이었다. IT기반의 종합가전회사인 모뉴엘은 지난 2004년 설립돼 2010년에는 한국무역보험공사 ‘우량수출기업’, 2012년에는 한국수출입은행 ‘히든 챔피언’으로 꼽히고 매출 1조 원을 달성하며 승승장구했다. 박홍석 모뉴엘 대표 2009년 본격적으로 범행을 시작한 박 대표는 허위 수출 서류를 시중은행에 내고 대출을 받는 형식으로 범행을 이어갔다. 대출을 받기 위해 보증을 서는 한국무역보험공사와 수출입은행이 로비대상이었다. 이렇게 7년 동안 받은 사기대출은 무려 ‘3조 4000억여 원’에 이르렀다. 박 대표는 후에 관세청 조사가 들어가자 “누군가 나를 말려줬으면 좋겠다”라고 털어놓을 정도로 범죄 행각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박 대표는 대출금 중 440억 원을 빼돌려 도박과 개인별장 구매, 생활비 등으로 탕진했다. 이렇게 모뉴엘 사태는 ‘희대의 사기극’으로 결론이 났지만 후폭풍은 쉽게 가시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검찰에 따르면 사기 대출로 현재 상환되지 않은 금액만 ‘5500억 원’ 상당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지만, 모뉴엘이 파산하면서 회수가 사실상 불가능해 금융기관들이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미상환금은 모뉴엘의 인수대금이나 운영비, 제주사옥 건축 등에 대부분 소진됐다”라고 설명했다. [환] |
뇌물 운반수단의 진화 사과상자→명품백→담뱃갑 작고 슬림한 게 ‘대세’ ‘검은돈’을 운반하는 수단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나날이 진화해왔다. 과거 ‘사과박스’에서부터 최근 모뉴엘의 ‘각 휴지통’까지 점점 더 교묘해지는 뇌물 전달 수법은 ‘비리 공화국’을 방불케 할 정도다. 하지만 사과박스가 뇌물 운반 수단으로 바뀐 대표적 사례는 역시 1997년 ‘수서비리사건’이 꼽힌다. 1997년 한보 정태수 전 회장은 은행장들과 정관계 인사들에게 라면상자와 사과박스에 든 거액의 떡값을 뿌려 ‘한보비리 수사’를 받았다. 이후 한동안 사람들은 사과박스를 보면 “돈이 들어있는지 살펴봐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2002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이 ‘차떼기’로 대선자금을 받았을 때도 40여개의 사과박스가 쓰였다. 당시 한 재벌그룹이 고속도로에서 100억 원이 넘는 돈을 트럭째 한나라당에 전달하면서 ‘차떼기당’이라는 오명을 쓰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사과박스가 유명해지자 그 다음에는 여행가방이나 골프가방이 뇌물 운반수단으로 등장했다. 여행가방은 1998년 불법 대선자금 사건인 ‘세풍사건’ 때 등장했다. 당시 여행가방에는 5억 원 상당의 현금이 들어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골프장에서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건넬 수 있는 골프가방도 뇌물 운반 수단으로 이용됐다. 1억~3억 원 상당이 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진 골프가방은 2001년 ‘진승현 게이트’ 의혹이 불거지면서 등장했다. 당시 MCI코리아 진승현 부회장이 측근을 통해 수억 원의 현금을 골프가방에 넣어 서울시내 특급호텔 객실 등에 배달시켰다는 주장이 제기됐으나 검찰은 정관계 로비설 등을 속 시원히 밝히지 못했다. 2009년 5만 원 신권이 나오면서 부터는 뇌물 운반 수단이 ‘경량화’, ‘소형화’ 된다. 이때부터는 한 손으로 들 수 있는 쇼핑백이나 명품백이 뇌물 운송수단으로 등장한다. 2012년 새누리당 공천헌금 의혹 사건에서는 명품 가방과 쇼핑백이 대대적으로 등장하면서 파문이 일었다. 2013년 김종신 전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은 원전 용수 처리 업체로부터 생수 상자와 포도주 상자에 담긴 뇌물 1억 3000만 원을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최근 모뉴엘 사건에서는 담뱃갑에 50만 원씩 든 기프트카드를 수십 장씩 넣거나, 티슈 상자에 5만 원 권을 수천만 원씩 넣은 것이 드러났다. 최신 뇌물 수법은 이렇듯 작고, 의심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수법으로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뇌물 용기가 작아질수록 수사당국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