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찬호 선수의 부친을 납치해 금품을 요구하려던 30대 남자가 검찰에 붙잡혔다. 사진은 강원도 춘천지검이 공개한 증거물들. 연합뉴스 | ||
11월 7일 춘천지방검찰청 형사2부는 지난 5일 최 아무개 씨(31)를 춘천시 서면의 모 초등학교 앞에서 인질강도예비 혐의로 긴급체포해 증거품을 압수했으며 6일 구속영장을 청구했다고 밝혔다. 검찰 조사에 따르면 최 씨는 박 선수의 아버지 박 아무개 씨(62)를 납치해 20억 원을 요구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최 씨는 인터넷 카페 등을 통해 범죄 정보를 얻고 공범을 모집했던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더하고 있는데 이를 계기로 인터넷을 이용한 ‘범죄 공모’ 문제의 심각성이 또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유명인사의 직계 가족을 납치해 거액을 뜯어내려던 이번 계획이 모방범죄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되고 있다.
이번 박 선수 부친 납치 미수 사건은 인터넷을 통한 ‘범죄 학습’과 공모 행위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특히 범인 최 씨가 부모를 모시고 아내와 자녀를 보살피는 한 가정의 평범한 가장이었다는 점에서 누구나 범죄의 유혹에 빠져들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최 씨는 채권추심회사에서 일을 하며 부업으로 선후배들과 함께 성인오락장에 거액을 투자했다가 오락장이 문을 닫으면서 큰 빚을 지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검찰 관계자가 ‘백지 상태’라고 표현할 정도로 폭력 전과조차 한 건 없는 보통 사람이었다. 이 같은 그가 검찰도 놀랄 만큼 완벽한 범행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인터넷을 통해 범죄의 ‘간접 체험’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온라인상에서 대체 범행모의가 어떻게 이뤄지는 것일까. 지금까지 검찰 조사에서 드러난 최 씨의 행각과 그동안 적발된 유사 범행의 사례를 바탕으로 그 과정을 살펴보면 이렇다.
인터넷에서 범죄 관련 카페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멀게는 추리소설 관련 카페부터 가깝게는 범죄분석 카페 등 그 수와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범죄를 꿈꾸는 이들 중 일부는 이들 카페에서 각종 범행에 대한 ‘지식’을 축적하고 계획을 세운다. 또 이 과정에서 같은 목적을 가진 다른 이를 만나 공범이 되기도 한다.
검찰에 따르면 이번에 붙잡힌 최 씨의 경우도 이와 흡사한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검찰 조사에서 최 씨가 사전에 범행 계획서를 작성하고 답사까지 마치는 등 치밀하게 범행을 준비했던 것으로 드러났는데 검찰은 그의 범행 계획서가 범죄수법에 대해 매우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최 씨가 각종 사이트를 통해 범죄지식을 구하던 중 범죄경험자로부터 이 같은 계획을 자문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는 것.
검찰 조사결과 최 씨는 지난 9월 20일께부터 납치 뒤 감금 장소로 경기도 청평 부근의 펜션을 정해놓은 뒤 대포차량을 구입하고 차량 번호판 2개, 수갑과 복면, 가발, 대포휴대폰 10개 등 범행도구를 준비하는 한편 도주로 등에 대한 답사까지 마쳤던 것으로 밝혀졌다.
최 씨의 범행 계획서는 납치와 수상교통을 이용한 현금 수송 등은 공범자에게 맡기고 자신은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배후에서 감시·조종하는 역할만 맡기로 하는 등 내용이 치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무런 범죄 전력이 없던 최 씨가 혼자서 이처럼 치밀한 계획을 짜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 이 때문에 검찰은 공범의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지만 10일 현재까지 조사한 바로는 공범이라 불릴 정도로 사건에 깊이 개입된 인물은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흔히 ‘초보 범죄자’들이 인터넷으로 범죄에 대한 지식을 모으는 방법 가운데엔 채팅을 이용하는 것도 있다. 지난 1월 특수절도 혐의로 경찰에 덜미를 잡힌 강 아무개 군(17) 등 2명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 경찰 조사 결과 이들은 한 채팅사이트에서 만나 사전에 범행 방법과 대상, 장소 등을 모의한 후 인적이 드문 복개천 주차장에서 택시만 전문적으로 털어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강 군은 경찰 진술에서 “인터넷 채팅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키가 없이 오토바이의 시동을 거는 방법 등 범죄의 수법을 쉽게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성매매 방법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경우처럼 최 씨 또한 범죄에 관한 지식을 모으기 위해 채팅을 이용했을 수도 있다. 최 씨는 검찰에서 채팅을 통해 범행을 공모했다고만 밝혔지만 채팅을 통해 범행 수법 등을 배우고 공유하는 과정에서 범행모의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에도 무게가 실리고 있다.
최근 경찰에 적발된 인터넷 범행 공모자들의 범죄 실행과정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언론에 보도되는 것처럼 노골적으로 드러내 놓고 ‘범행 파트너를 모집합니다’라며 카페를 만들거나 채팅방을 만들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범행계획을 가지고 있는 이는 먼저 범죄 관련 사이트나 카페를 찾아 그곳에서 회원들과 정보를 교류하며 자신과 비슷한 뜻을 가진 사람들을 찾는다고 한다. 그 다음 이른바 ‘간보기’라고 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것. 적당한 ‘공범 후보’를 찾으면 과연 나와 범행을 같이 할 수 있는지 이메일이나 채팅 등으로 서로의 의향을 탐지하고 확인한 뒤에 같이 범행에 나서는 것이다.
검찰에 따르면 최 씨는 한 포털사이트 카페에 ‘범죄 동업자를 모집합니다’라는 카페를 개설해 공범을 물색한 것으로 드러났다. 최 씨는 회원들에게 이메일이나 채팅을 통해 자신의 범행계획을 알렸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간보기’를 위해 회원들에게 익명으로 이메일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최 씨의 간보기 메일은 결국 그의 범행이 사전에 발각되는 통로 구실을 했다. 검찰은 최 씨가 의중을 떠봤던 ‘공범 후보’로부터 범행 계획에 대한 첩보를 입수해 그를 검거할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베테랑 범죄꾼의 경우 은어나 특정 사실 등을 통해 상대의 정체를 요리저리 재보고 접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최 씨가 ‘초보’가 아니었다면, 그래서 간보기가 성공했다면 사건이 과연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하는 우려가 나올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한편 이 같은 온라인 범행모의가 끊이지 않게 된 주된 이유로 일부에서는 경기침체 등에 따른 생활고를 들기도 한다. 하지만 범죄 모의자들이 카페나 채팅방 제목으로 가장 흔히 사용하는 문구가 ‘한탕 멋지게 할 분’ 또는 ‘제대로 한 건 해서 폼나게’ 등인 것에서도 드러나듯 이들의 범죄동기에는 한 번의 범죄로 큰돈을 쉽게 벌어보겠다는 속내가 가장 크게 작용하고 있다.
‘한탕주의 범죄모의꾼들’에게 스포츠 스타, 연예인 등 고수익을 올리는 유명 인사들은 부러움이나 긍지의 대상이 아니라 로또 복권과도 같은 존재일 뿐인 것이다.
이와 관련, 경찰 관계자는 “현행법상 카페 개설만으로는 사법처리가 어려워 사이버 범죄 모의에 대한 단속이 쉽지 않다”며 우려는 나타냈다.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인터넷을 통한 범죄학습과 공모 등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윤지환 프리랜서 tangohun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