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인숙 씨와 아들 정 씨의 옛 모습. | ||
1970년 3월 17일 밤 정인숙 씨가 자신의 차량 안에서 괴한의 총에 맞아 숨진 사건이 벌어지자 경찰은 운전기사였던 넷째오빠 정종욱 씨를 범인으로 체포했고 그는 20년 가까운 수감 생활을 했다. 정종욱 씨는 89년 5월 가석방으로 풀려나면서 “나는 동생을 죽이지 않았다”며 “두 명의 낯선 괴한에 의해 동생은 살해됐고, 난 죄를 뒤집어써야 했다”고 밝혀 이 사건을 더욱 미궁으로 빠트렸다.
당시 정 여인에게 세 살 난 아들이 있는 것을 두고 세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이라느니, 정일권 국무총리의 아들이라느니, 이후락 비서실장의 아들이라느니 하는 소문들이 퍼져 나왔다. 그때 그 세 살 난 아들이 바로 이번에 납치 공모 혐의로 체포된 정 씨다. 그렇다면 정 씨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을까.
베일에 싸인 정 씨의 성장 과정은 그가 지난 93년 쓴 자서전 <저는 당신의 아들이었습니다>에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돼 있다. 그는 자신의 출생 비밀을 모른 채 외할머니 손에 자랐으나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친척에 의해 어머니의 존재를 알게 된다. 막내외삼촌 집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인 85년 미국 유학을 떠났다. 그는 미국에서 한국의 잡지를 통해 정 여인 사건을 인지했다.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U.S.C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LA의 한 금융회사에서 근무하기도 한 것으로 책에서 밝혔다. 정 씨가 다시 한국에 들어온 것은 대학생 때인 91년 2월. 그는 출소해서 사업을 하고 있던 넷째외삼촌 정종욱 씨를 통해 자신의 아버지가 정일권 전 총리였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그해 6월 정 전 총리를 상대로 친자확인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셋째외숙모와 막내외삼촌 등 다른 친척들의 강경한 만류로 끝내 한 달 만에 소송을 취하했다. 이후 LA로 돌아갔고 일본도 자주 드나들었던 것으로 쓰고 있다. 정 여인이 죽기 전 일본에서 지냈는가 하면 외삼촌들이 일본에서 사업을 하는 등 외가 친척들이 일본에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책에서 정 씨는 ‘어려서부터 일본말을 자연스럽게 배워왔기 때문에 당시 일본어 소통에 별 어려움이 없을 정도였다’고 쓰고 있다.
특히 책 후반부에는 정 씨가 92년경 도쿄에서 자신의 양아버지로 알려진 J 씨를 찾아 나섰다가 야쿠자로 추정되는 자들의 방해로 위험에 처하기도 한 장면이 소개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양아버지 J 씨 또한 도쿄에서 손꼽히는 야쿠자 거물인 것으로 설명했다.
그는 93년 다시 귀국해서 한 번 더 친자확인소송을 시도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고, 정 전 총리는 94년 별세했다. 정 씨는 이후 LA에서 거주하며 세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지냈다. 그는 현지에서 사업을 하며 강 아무개 씨와 결혼해서 딸을 낳았으나 사업은 잘 안 된 것으로 전해졌다. 정 씨는 2002년 6월 한인 4명의 명의로 신용카드 여러 장을 발급받아 사용한 혐의로 검거돼 실형을 살고 2005년 말 강제 추방돼 귀국했다.
귀국한 뒤 그는 M&A 전문가로 일하며 지난해 6월 강남에 S 사를 설립, 사무실을 내고 압구정동 아파트에서 외제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등 제법 호사스런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자신이 추진하던 풍력발전소 계획이 차질을 빚고 또 뚜렷한 사업 실적이 없어 최근 사무실 임대료를 못 낼 만큼 생활에 쪼들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일요신문>은 정 씨가 설립한 S 사의 등기부를 조사한 결과 이 회사의 이사에 이 아무개 전 의원이 등재되어 있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전 의원은 대전에서 15, 16대 의원을 지낸 인물로 박정희 정권 때 공화당 중진의원의 비서관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 씨와는 어떤 인연이 있는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아무개 전 의원(63)은 17일 아침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아는 분의 소개로 만났지만 정 씨를 잘 알지는 못 한다”면서도 “그가 정인숙의 아들이라는 점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다음은 이 전 의원과의 통화 내용이다.
―정 씨를 언제 알게 됐나.
▲작년 이맘때쯤 아는 분의 소개로 만났다. 풍력사업을 한다고 도와달라고 했다. 그후로 몇 번 만났지만 (이젠) 안 만난 지 오래됐고 잘 알지도 못한다.
―정 씨 회사에 이사로 올라 있는데.
▲당시 사업 때문에 내게 도움을 청했고 그래서 함께 현지를 확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바람이 별로 없고 환경 여건이 좋지 않아 결국 일을 못했다. 아직도 이사로 등재되어 있던가. 몰랐다.
―정 씨가 정인숙 씨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나.
▲정확히는 모르고 그냥 간접적으로…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는데 잘은 몰랐다.
―정 씨와 특별한 친분 관계나 인연은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 특히 이번 불미스런 사건과도 전혀 연관이 없기 때문에 내 이름이 불명예스럽게 오르내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