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남양유업이 갑질 횡포 논란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자 김웅 대표이사와 임원들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왼쪽 작은 사진은 ‘을’의 모임 전국대리점협의회 출범식 모습. 이종현·박은숙 기자
“따로 공식입장을 밝힐 건 없습니다….”
법원의 과징금 일부 취소 판결이 논란이 되자 남양유업 관계자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남양유업은 지난 2013년 갑질 횡포 논란으로 여론의 거센 폭풍을 맞은 바 있다. 당시 남양유업의 대리점주들은 남양유업이 주문하지도 않은 제품을 강제로 사게 하고, 유통기한이 다 된 물건을 떠안겼다는 내용을 대대적으로 폭로해 파장을 일으켰다. 남양유업은 이번 법원 판결로 갑질 논란이 또 다시 ‘후폭풍’이 되어 불지 염려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후폭풍은 이미 불고 있는 모양새다. 당장 시민단체부터 판결에 대해 지적하고 나섰다.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전국네트워크 등 시민단체는 지난 5일 논평을 통해 “이번 판결은 사법부가 지난 남양유업 사태를 비롯해 국민들이 겪고 있는 불공정한 경제 현실에 얼마나 무지한지, 그리고 국민들의 법 감정에 얼마나 무관심한지를 보여 주었다”고 혹평했다.
논란이 일고 있는 판결은 지난 1월 30일 서울고등법원이 내린 판결이다. 앞서 지난 2013년 공정위는 남양유업이 거래상 지위를 부당하게 이용해 법 위반을 했다며 ‘124억 6400만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고, 남양유업은 지난해 2월 과징금 산정 기준이 부당하다며 서울고법에 소송을 제기했다. 공정위를 상대로 한 과징금 취소소송은 고등법원과 대법원을 거치는 2심제다.
1년여의 공방 끝에 서울고법 행정2부(이강원 부장판사)는 공정위가 남양유업에 부과한 124억 6400만 원의 과징금 중 ‘119억 원 6400만 원’을 취소하라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남양유업이 유통기한이 임박했거나 잘 안 팔리는 일부 물량에 대해서 강제로 구매하게 했을 뿐, 밀어내기 행위가 있었던 26개 품목의 판매물량 전부를 떠넘겼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쟁점은 재판부가 밝혔듯 ‘26개 품목의 판매물량’이다. 판매물량은 매출과 연결되고, 매출은 과징금의 기준이 된다. 공정위는 남양유업이 대리점에게 물량을 ‘밀어내기’ 했던 기간(2009년부터 2013년까지) 동안 공급한 26개 제품 품목에 대하여 ‘전체 매출액’을 산정해 과징금을 계산했다. 하지만 법원은 26개 품목의 전체 매출액을 계산하지 말고, 실제 밀어내기 행위가 이뤄졌다고 볼 수 있는 제품을 ‘특정’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유통기한이 임박한 제품이나 회전율이 낮은 제품 등에 대해서만 구입을 강제하였으니 이러한 품목을 특정해서 매출액 및 과징금을 산정하라는 취지다.
문제는 법원이 ‘특정’ 품목을 추산하라고 판단한 것에 공정위가 난색을 표하고 있다는 점이다. 공정위 내부에서는 법원이 ‘현실’을 잘 모르고 있다는 분위기다. 공정위 관계자는 “법원이 제시한 특정 품목 매출액은 굉장히 파악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당시 대리점 품목 등을 모두 정확하게 파악할 순 없기 때문에 통상 과징금 부과는 밀어내기 당시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친 품목까지 포함한다. 게다가 남양유업은 대리점의 주문기록이 남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대리점 주문시스템을 변경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확한 입증을 해내기는 무리라고 본다”라고 전했다. 실제로 2010년 남양유업은 대리점이 자신의 주문량을 검색할 수 없도록 대리점이 접속하는 주문시스템을 개편했다. 공정위 조사 결과 개편된 시스템은 남양유업 본사에서 주문량을 조작하고 좌지우지하는 데 쓰인 것으로 파악됐다.
결국 이러한 공방 끝에 ‘제품 밀어내기’ 부분 과징금 ‘119억 6400만 원’은 취소됐다. 남은 과징금 ‘5억 원’은 판촉사원의 임금을 대리점에 전가한 ‘이익제공 강요’ 부분이다. 재판부는 이 부분만을 인정하며 과징금을 부과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달랑 5억 원의 과징금이 남은 것에 일부 남양유업 대리점주들도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한 대리점주는 “법치국가에서 어떻게 이런 판결이 났는가 싶다. 너무 황당해서 밖에 나가서 다시 플래카드라도 걸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생각했다. 남양유업이 발전하기 위해선 잘못한 건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라고 전했다. 전국유통상인연합회 이동주 사무국장은 “통상 대리점에서 물품을 주문할 때는 주문내역을 문서에 적고 본사 쪽 시스템에 주문량을 기입하는데, 남양의 경우에는 이미 시스템을 변경해 상당 부분을 ‘증거인멸’한 상황이다. 공정위가 특정 물품을 파악하기 어렵다하는데 이는 대리점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인 상태”라고 전했다.
과징금이 대폭 축소된 것에 공정위에 잘못도 있다는 시각도 있다. 과징금 산정에 좀 더 신중했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민변 민생경제위원회 성춘일 변호사는 “남양 사건의 경우 피해 대리점주들이 1월경에 신고를 했는데 약 6개월만인 7월에 과징금 결과가 나왔다. 국민여론에 떠밀려 초고속으로 조사가 진행된 부분이 있다. 하다못해 피해 대리점을 특정하지 않은 공정위의 허술함도 있었다. 이 부분을 법원 역시 지적했다”라고 전했다.
공정위 관계자에 따르면 애초 공정위 내부에서는 남양유업에 대해 과징금을 부과할 당시 사안이 소송까지 진행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예상한 것으로 전해졌다. 공정위는 이미 지난 2008년 현대자동차가 대리점주들에게 판매목표를 할당한 것을 지위 남용으로 보고 과징금 ‘215억 원’을 부과했다가 소송에서 패한 전례가 있다. 자칫하면 당시의 패배를 재현할 수 있기 때문에 여러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하지만 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상황에서 적당한 과징금을 매기기에는 상당한 ‘눈치’가 보였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당시 상황에서 공정위 입장에서는 빠른 조치와 결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섣부르게 과징금을 ‘지른’ 측면이 없지 않아 있다. 소송을 대비해서 강력한 카드 하나 정도는 있어야 했다”라고 분석했다.
논란의 중심에 선 법원은 “억울하다”는 분위기다. 서울고법은 이례적으로 ‘남양유업 판결 관련 설명자료’를 기자들에게 배포하기도 했다. 서울고법은 해당 자료에서 “공정위는 이 판결이 확정될 경우 다시 과징금을 산정하여 재 처분을 하게 된다. 법원은 과징금을 ‘삭감’한 것이 아니라 다시 ‘산정’하도록 한 것”이라며 “공정위는 전액이 구입 강제 되었다는 증거를 법원의 입증촉구에도 전혀 제출하지 못했고, 공정위 과징금 산정에 위법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유력한 반대증거가 제출됐다”라고 해명했다. 공정위 측은 “입증 불가능한 증거를 어떻게 입증하느냐”며 “상고하겠다”라고 반박했다. ‘과징금 할인 논란’은 이렇듯 대법원행을 앞두고 있지만 공정위의 승소 가능성은 낙관적이지 않다는 시각이 높다.
결국 과징금의 대폭 할인으로 은밀한 미소를 짓고 있는 쪽은 남양유업이다. 남양유업에서는 과징금에 대한 행정소송을 제기할 당시 “여론을 감안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내부 의견이 제기되며 격론이 펼쳐졌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소송을 제기한 것이 ‘신의 한수’였던 셈. 소송을 제기하기 바로 직전인 지난해 1월, ‘갑질 횡포’로 기소된 남양유업 김웅 대표(61)와 임직원들은 법원으로부터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다. 법조계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남양유업 측은 무거운 과징금 부담을 이유로 법원에 선처를 호소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거액의 과징금을 변호 도구로 썼다가 형이 감경되자 과징금을 깎는 소송을 은근슬쩍 제기한 셈이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