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은 현장 상황과 불에 탄 사체의 상태 등을 토대로 하루 전에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했다. 자신의 차 안에서 불에 타 숨진 채 발견된 남자. 도대체 그의 죽음에는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었던 것일까.
이번에 수원 서부경찰서 폭력1팀 한상윤 형사가 전하는 사건은 배신한 남자에게 앙심을 품고 잔인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한 여성의 치정살인극에 대한 것이다. 평택경찰서 형사과 근무 당시 이 사건을 담당했던 한 형사는 다음과 같은 소회를 밝혔다.
“살인사건으로 판단하고 수사에 착수한 지 약 일주일 만에 용의자를 압축해 범인을 검거한 사건이었다. 수사가 상당히 잘된 케이스였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남녀 간의 그릇된 애증이 얽혀 빚어낸 참극이랄까. 복수에 눈이 먼 한 여성의 치밀하고도 과감한 범행수법에 수사팀원들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직업상 수많은 살인사건들을 다루게 되지만 남녀 간 치정이 얽혀 발생하는 사건을 담당할 때마다 수사팀의 마음이 우울해지는 게 사실이다. 남녀 간 문제는 당사자들만 아는 것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을 포함하고 있는지라 공개하기 어려운 사항이 많다. 다만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남녀 간의 부적절하고 위험한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후유증을 낳을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당시의 숨 가빴던 수사과정을 되돌아보려 한다.”
우선 사건 초기 상황에 대한 한 형사의 얘기를 들어보자.
“사건 현장을 둘러본 결과 ‘분명 이건 살인사건이다’라는 확신이 들었다. 무엇보다 차량 번호판이 떼어져 있는 것은 단순 사고나 자살이 아닐 가능성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범인이 범행을 저지른 후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번호판을 떼어갔으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살인사건이라면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터. 우발적인 강도살인인지 원한에 의한 살인인지를 밝히기 위해 수사팀은 사체로 발견된 이 씨의 신상을 파악하고 우선적으로 그의 주변 인물들을 상대로 수사에 들어갔다.”
탐문 결과 이 씨는 특별히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한다. 버스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던 이 씨는 성실한 근무 자세와 싹싹한 태도로 인해 직장 내에서도 상당히 평판이 좋았다. 그나마 특이한 것이 있다면 그의 가정사였다. 이 씨는 그 무렵 불화로 인해 부인과 거의 별거상태로 지내오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씨의 주변사람들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진행하던 중 수사팀의 눈에 수상한 한 인물이 포착된다. 다음은 한 형사의 얘기.
“이 씨에게는 얼마 전까지 만나던 열 살 연상의 내연녀가 있었다. 바로 같은 회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홍영란 씨(가명·58)였다. 당시 홍 여인은 이 씨가 다니던 회사를 나와 다른 운수업체에서 마을버스 기사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3년 정도 이 씨와 내연관계로 지내온 것으로 확인됐다. 홍 여인은 최근까지 이 씨와 동거를 해왔던 사이로 주변 사람들도 상당수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을 정도였다.”
경찰이 수사한 바에 따르면 홍 씨는 최근까지 숨진 이 씨와 자주 연락을 취하며 가장 가깝게 지낸 인물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진술이나 개인 통화기록 등을 검토한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사건이 발생하기 얼마 전 두 사람이 헤어진 상태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즉 동거를 해오던 중 관계가 파탄이 난 상황이었던 것.
수사팀은 홍 씨에 대해 은밀하게 조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 뭔가 석연찮은 정황들이 발견됐다. 한 형사의 설명을 들어보자.
“홍 여인은 과거 한 지방도시에서 남편과 함께 호프집을 운영했는데 그때 단골로 가게를 찾아오던 이 씨와 안면을 트게 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얼마 후 두 사람은 내연관계로 발전하게 됐다고 한다. 당시 홍 씨는 남편과 법적 절차만 밟지 않았을 뿐 사실상 별거상태였다. 다 큰 자식들도 있는 처지였는데 홍 씨는 가정도 버리고 집을 나와 이 씨와 동거에 들어간 것이었다. 홍 여인의 남편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해 그녀의 가정은 사실상 파탄이 난 상태였다.”
수사팀이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각자 가정이 있었던 두 사람은 부적절한 내연관계를 유지해왔으며 특히 가정까지 버렸던 홍 씨는 이 씨와의 관계가 드러나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은 상태였다.
조사 결과 추가로 드러난 주목할 만한 사실은 홍 씨가 이 씨를 만나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금전적인 거래를 해왔다는 점이었다. 다음은 한 형사의 얘기.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사건 발생 수개월 전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고 결국 사건이 발생하기 얼마 전 두 사람은 결별을 하게 된다. 이유는 이 씨의 또 다른 여자관계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씨가 동거녀인 홍 씨를 두고 다른 여자를 만나곤 했다는 것이다.
수사팀이 수집한 여러 정황으로 추측컨대 홍 씨 입장에서는 이 씨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을 만한 상황이었다. 또한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평소 홍 씨와 이 씨가 밀회를 위해 자주 갔던 곳으로 드러났다. 특히 홍 씨는 사건이 벌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날 저녁에 예정시간보다 늦게 차고지에 들어온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홍 씨는 범행 관련성에 대해 펄쩍 뛰며 완강히 부인했다고 한다. 무조건 ‘모르는 일이다. 이 씨를 만나지 않았다’는 것이 홍 씨의 항변이었다.
그러나 그간 파악한 모든 정황을 토대로 살펴본 결과 홍 씨가 이번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라는 것이 수사팀의 판단이었다. 계속되는 수사팀의 추궁에 홍 씨는 결국 자신의 범행사실을 실토하기에 이른다. 홍 씨의 진술은 수사팀의 예상과 놀라울 정도로 딱 맞아떨어졌다. 다음은 한 형사의 얘기.
“홍 여인의 범행 동기는 한마디로 이 씨에 대한 극심한 배신감과 분노 때문이었다. 가정을 버리면서까지 이 씨를 택했건만 이 씨가 언제부터인가 다른 여자를 만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특히 이 씨에게 거액의 돈까지 줘가며 관계 유지를 위해 나름 혼신의 힘을 다해왔던 홍 여인에게 이 씨의 변심은 견딜 수 없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실제로 두 사람은 이 문제로 심한 갈등을 빚었고 자주 다퉜다고 한다. 급기야 홍 여인은 이 씨에게 그간 빌려준 돈을 갚으라고 했지만 이 씨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돈을 갚지 않았다고 한다. 이 씨로서는 돈을 갚을 능력도 없었을 뿐 아니라 사귀는 사이에 아무 목적 없이 받은 돈을 굳이 갚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하지만 홍 여인 입장에서는 돈도 갚지 않는 데다가 뻔뻔스럽게 다른 여자를 만나는 이 씨의 행동을 참을 수 없었던 거다.”
배신감에 치를 떨던 홍 씨는 급기야 무서운 생각을 품게 된다. 이 씨를 살해하기로 결심한 홍 씨는 사건 수일 전 범행에 사용할 밧줄과 망치, 휘발유를 사서 준비해두는 등 치밀하게 준비를 했다. 그리고 8월 8일 오후 11시경 홍 씨는 이 씨에게 ‘용돈을 주겠다’는 말로 평소 두 사람이 자주 밀회를 즐기던 공터로 이 씨를 불러냈다. 그리고 밧줄로 운전석에 타고 있던 이 씨의 목을 조르고 둔기로 머리를 때려 살해한 후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사체와 차량에 불을 질렀던 것이다.
조사 결과 홍 씨는 범행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유유히 차고지로 돌아갔으며 범행 후에도 태연하게 출근해 일을 계속해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사체가 발견된 지 약 일주일 만에 사건에 대한 수사는 종결됐다. 하지만 범인이 밝혀지고 나서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공범 여부였다. 다음은 한 형사의 얘기.
“과연 여자의 몸으로 건장한 남자의 목을 조르고 둔기로 때려 살해하는 것이 가능할지에 대해 수사팀 내에서 의견이 분분했다. 홍 여인의 체격이 아무리 좋다 해도 남자의 저항을 이겨내고 살해한다는 게 쉽사리 이해가 안 됐던 것이다. 더구나 당시 50대 중반의 나이였던 홍 여인이 자신보다 무려 열 살이나 젊은 남자를 혼자 제압할 수 있겠느냐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추가 조사결과 홍 여인에게는 또 다른 동거남이 있었는데 이 동거남은 홍 여인이 검거되기 하루 전 만리포에 다녀온 뒤 어디론가 잠적해버린 상태였다. 특히 홍 여인은 조사과정에서 동거남의 가담 가능성을 일부 시사하는 진술을 하기도 했다. 별 다른 직업이 없던 동거남이 ‘생활이 어려우니 당신이 과거 사귀던 남자(이 씨)에게 빌려준 돈을 받아내자’고 한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수사팀은 동거남이 범행에 가담했는지 여부를 두고 몇 차례 추궁했으나 증거가 없는 데다가 홍 여인도 끝까지 혼자 저지른 일이라고 주장해 공범 여부를 밝혀내지는 못했다.”
경찰에서 홍 씨는 자신이 살해한 이 씨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증명’이라도 하듯 특별한 죄책감이나 반성의 기미를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자식들에게 미안하다’는 짤막한 말만 남겼다는 것.
하지만 홍 씨에 대한 법원의 판단은 냉정했다. 홍 씨는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는데 지난해 3월에 있었던 항소심에서 법원은 이례적으로 원심보다 무거운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피고인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진술을 번복하는 등 잘못을 뉘우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 가치이므로 이를 해하는 범죄는 엄중한 처벌을 면할 수 없다. 특히 피고인이 2주 전부터 망치를 마련하는 등 사전에 치밀하게 범행을 준비했고 그 범행수법이 지극히 잔인해 원심에서 선고한 형은 너무 가벼워 부당하다’는 것이 당시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