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자들은 김 씨를 납치한 뒤 피해자의 부동산을 담보로 78억 원을 대출받고 예금 30억 원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 중 대학동창인 이 아무개 씨는 자수를 해 현재 구속 상태이고 주범으로 알려진 K 씨(50·전과 17범)는 필리핀으로 도주한 상태. 경찰은 나머지 7명도 출국금지시키고 검거에 주력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담보대출에 관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제2금융권 업체 직원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필리핀으로 도주한 K 씨는 현지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현지법 위반 사실이 밝혀지지 않아 10시간 만에 풀려난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결과 이번 납치사건은 아이러니하게도 용의자들이 지나치게 용의주도했기 때문에 경찰의 추적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서 부동산업을 하고 있는 김 아무개 씨는 평소 대인기피증이 있을 정도로 사람들과의 왕래가 적은 사람이다. 처자식이 없는 그는 여동생에게도 거의 전화를 하지 않은 성격의 인물. 그런 그가 얼마 전부터 아침마다 여동생과 자신 소유의 건물 관리인에게 안부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김 씨의 여동생은 오빠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봤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다. 김 씨의 여동생은 “주로 저녁에 활동하는 오빠가 아침에 평소 하지 않던 안부 전화를 걸어온 점을 이상하게 생각해 경찰에 신고를 했다”고 밝혔다.
100억대 재산을 가진 재력가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신고를 받은 경찰은 김 씨의 금융거래 내역을 조사했다. 김 씨가 자신 소유의 건물을 담보로 제2금융권을 통해 거액을 대출받은 사실을 확인한 경찰은 김 씨가 납치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경찰수사결과 김 씨는 납치됐고 대학동창 등 9명의 일당이 범행에 가담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에 따르면 “가장 먼저 김 씨에게 접근한 이는 대학동창인 이 아무개 씨”라고 한다. 이 씨는 작년 10월경 가족 없이 혼자 사는 김 씨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 김 씨는 낯가림이 심한 성격이었지만 이 씨가 “경제적으로 무척 힘들다”며 사정해 자신의 주상복합아파트에서 함께 거주하게 된다. 경찰에 따르면 “이 씨는 이미 K 씨와 범행을 모의한 후 김 씨와 5개월 정도 함께 살면서 적당한 범행 시기를 엿봤던 것”으로 밝혀졌다.
김 씨의 납치를 실행한 것은 지난 3월 1일. 이 씨는 강남구 압구정의 한 식당으로 김 씨를 불러내 K 씨를 포함한 일당 2명과 합석했다. 이들은 저녁식사를 한 후 김 씨의 벤츠 승용차를 타고 이태원의 한 클럽으로 갔다. 클럽으로 가는 도중 이 씨가 “음료수를 사겠다”며 길가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그러자 차에 타고 있던 일당 2명이 김 씨를 납치해 달아났다.
주범인 K 씨는 김 씨를 납치한 뒤 전국 각지로 장소를 옮겨 다닌 것으로 알려졌다. 김 씨는 경찰 조사에서 “장소를 이동할 때는 눈가리개를 해 어디로 가는지 몰랐는데, 충남 천안 쪽으로 한 번 갔던 것 같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 범행 발각 후 해외로 도주했다가 필리핀에서 검거된 납치범 K 씨. SBS 캡처 | ||
K 씨 등 일당은 김 씨가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김 씨에게 여동생과 건물 관리인에게 안부 전화를 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를 이상하게 여긴 여동생이 지난 4월 12일 경찰에 신고했다. 말하자면 김 씨와 여동생의 관계를 잘 몰랐던 용의자들이 범행을 감추기 위해서 용의주도하게 한 작업들이 오히려 의심을 사 결국 범행의 꼬리가 잡힌 셈이다.
김 씨는 경찰서에서 “납치범들이 신고를 막기 위해 나에게 약물을 투여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씨는 “약물을 투여한 뒤 ‘신고를 하면 마약사범으로 함께 체포된다’고 협박했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김 씨의 진술에 따라 그의 모발을 수거해 마약 검사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경찰은 수사과정에서 K 씨 등이 범행을 저지른 정황을 파악하고 일당을 4월 15일 출국금지조치했다. 하지만 수사를 눈치 챈 K 씨는 하루 전인 15일에 이미 필리핀으로 출국했다. 반면 피해자의 대학동창인 이 씨는 지난 20일 경찰에 자수를 했다. 그는 “김 씨를 술자리에 데리고만 갔을 뿐이고 납치나 감금을 공모하지는 않았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경찰은 최근 이 씨의 계좌에 10억 원이 입금된 사실을 확인하고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한편 필리핀으로 달아난 K 씨의 소재도 파악되었다. 용의자 K 씨는 지난 23일 국제전화로 걸려온 112신고에 “K 씨의 소재를 알고 있다”는 내용이 접수되어 필리핀 연방경찰의 협조를 받아 수사기관으로 임의동행되었다. 하지만 필리핀 현지 경찰의 조사결과 K 씨는 현지법 위반 사실이 없다는 이유로 필리핀 이민청으로 재차 임의동행됐고, 이곳에서도 특별한 위반사실이 발견되지 않아 바로 풀려났다고 한다. 필리핀 이민청은 K 씨가 인터폴 적색수배가 내려져 있는 상태라 여권을 압수해 놓았다고 전해진다.
K 씨는 현지에서 변호사를 선임한 상태다. 필리핀 경찰은 “구속 영장은 한국 법원에서 발부된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죄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입장. 이에 경찰은 필리핀이 범죄인인도조약을 맺은 나라인 점을 감안, 법무부를 통해 필리핀 정부에 범죄인인도청구를 할 예정이다.
하지만 이도 여의치 않다. 해외로 도피한 범죄 용의자라도 현지법을 위반해 강제추방되지 않으면 국내에 송환되지 않기 때문이다. 경찰관계자는 “양국의 수사, 사법기관의 조치가 있어야 하는데 절차가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지금으로서는 K 씨를 붙잡고 있을 특별한 방법은 없다”고 전했다.
한편 경찰은 남은 용의자들에 대해서도 수사를 계속하고 있다. 납치·감금에 대한 가담 정도와 이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이들의 소재 등을 파악하는 데 수사력을 모으는 한편 납치범 일당들이 빼돌린 100억 원 중 회수한 14억 원과 BMW 승용차 등을 제외한 나머지 돈의 흐름을 추적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류인홍 기자 ledh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