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초롱초롱빛나리양 유괴사건 범인인 전 여인이 1997년 9월 17일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
지난 1997년 9월 9일 오전 서울 서초구 잠원동의 한 아파트에서는 한 무리의 교회 신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주인 없는 쓸쓸한 생일파티가 열렸다. 조그만 상에 놓여진 케이크에는 양초 8개가 꽂혔다. 바로 열흘 전 유괴된 박초롱초롱빛나리 양(8)의 생일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지 열흘이 지났지만 박 양은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는 상황. 생일파티는 신나는 생일축하 노래 대신 박 양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애끓는 기도와 찬송가만이 이어졌다. 박 양의 어머니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얼굴 없는 범인을 향해 애원했다. “제발 나리를 살려주세요. 나리만 무사히 보내주시면 모든 것을 용서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애원도 소용이 없었다. 그로부터 나흘 후 잠원동의 한 초등학교 2학년 교실에서는 꼬마친구들과 학부모들이 참석한 가운데 박 양의 추모식이 열렸고 그날 오후 박 양의 유해는 성남 화장장에서 끝내 입어보지 못했던 빨간 드레스와 곰인형과 함께 한줌 재로 변했다.
이번에 서초경찰서 강력1팀 조상복 팀장이 전하는 사건은 11년 전 이맘 때 온 국민을 분노케 만들었던 ‘박초롱초롱빛나리 양 유괴살해사건’이다.
박 양이 유괴된 것은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8월 30일 한낮이었다. 이날 오후 2시 45분경 박 양은 집 근처 백화점 스포츠센터에 위치한 어학원에서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길이었다. 박 양의 친구들에 따르면 박 양을 데려간 사람은 20대로 보이는 한 젊은 여성이었다. 박 양이 유괴당한 것으로 판명난 것은 이날 오후 6시경. 나긋나긋한 말씨의 20대 여인이 “나리는 잘 있어요”라는 전화를 걸어오면서부터였다. 다음은 조 팀장의 얘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유괴됐다는 것을 안 가족들의 심정이 어땠겠는가. 더구나 박 양은 초등학교 2학년에 불과한 아이였다. 유괴범죄의 특성상 시간을 끌수록 아이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은 자명한 일. 수사팀은 피가 바짝바짝 말랐다. 범인은 총 세 차례의 협박전화를 걸어왔다. 전화가 걸려온 시각은 사건 당일 오후 6시, 다음날 오후 3시 52분과 오후 9시 3분께였는데 명동의 한 은행 앞과 그 부근의 S 커피숍이었다. 범인의 목적은 돈이었다. 범인은 ‘나리를 잘 데리고 있다. 2000만 원을 준비해 명동전철역에서 남대문 쪽 OOO 건물 8층으로 나오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그것이 범인의 마지막 전화였다. 범인은 그 길로 연락을 끊고 잠적해버렸다.
수사팀이 파악한 단서는 범인이 전화를 건 장소였다. 박 양의 어머니가 받은 두 번째 협박전화는 서울 명동 퍼시픽호텔 맞은편 공중전화 부스에서 건 것으로 확인됐다.
“수사팀은 범인의 지문채취를 위해 범인이 협박전화를 걸었던 전화를 찾아내 수화기 전체를 몽땅 끊어왔다. 그리고 다시 걸려올 범인의 전화를 기다렸다. 오후 9시가 조금 지나서 세 번째 협박전화가 걸려왔다. 박 양 어머니가 범인과 대화를 하는 동안 신속하게 발신지 추적에 들어간 수사팀은 발신지를 확인, 명동의 S 커피숍으로 형사대를 급파했다. 당시 커피숍 안에는 손님 13명이 있었다. 수사팀은 손님들을 상대로 일일이 신원확인 작업을 벌였는데 만삭의 임산부도 그 중 하나였다. 하지만 ‘임산부를 상대로 뭐하는 짓이냐’는 주변 사람들의 제지를 받아 임산부는 지문만 채취했다.”
‘키 159㎝가량에 둥근 얼굴형. 오른쪽 볼에 여드름 자국이 많이 있는 20대쯤의 여성. 나긋나긋한 표준말 사용’.
목격자들의 증언과 전화 목소리 등을 통해 잡아낸 범인의 윤곽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범인은 이곳에서 협박전화를 걸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지만 수사팀은 범인 검거에 실패하고 만다. 결국 사건발생 나흘째인 9월 3일 박 양 유괴사건은 공개수사로 전환된다. 목격자들의 진술을 상대로 6만 장에 달하는 20대 여성의 몽타주를 제작해 배포한 수사팀은 1000만 원이라는 파격적인 현상금을 내걸었다. 당시 수사과정에 대한 조 팀장의 얘기.
“서초경찰서 강력반 형사 전원이 투입됐다. 수사팀은 범인이 머물렀을 잠원동과 명동 일대를 샅샅이 수색했다. 또 범인이 그 지역 일대를 돌아다니다 CCTV 화면에 범인의 모습이 찍혔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백화점과 호텔, 금융기관 등의 CCTV 화면을 긴급 입수해 분석하는 작업도 벌였다. 하지만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했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면식범의 소행일 수도 있다는 판단에 따라 수사팀은 박 양 부모의 주변인물들에 대한 탐문조사에 들어갔다. 동네에서 인테리어 가게를 하는 박 양 아버지와 금전적인 거래가 있는 인물들은 물론 박 양이 다닌 학원의 전·현직 강사와 동네에 드나드는 학습지 교사에 대한 행적도 조사했다. 하지만 박 양 유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의심스런 인물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다.
유력한 용의자가 수면위로 떠오른 것은 9월 11일이었다. 그동안 수사팀은 범인이 마지막으로 협박전화를 걸었던 명동의 커피숍에 있던 손님 13명의 지문감식을 의뢰해놓고 지속적인 주변 탐문조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당시는 온 국민이 합심해 ‘나리 양 찾기’ 운동에 동참하고 있던 때로 ‘박초롱초롱빛나리’라는 이름은 유치원생들까지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전 여인의 아버지도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수사팀이 협박 내용이 녹음된 테이프를 들려주자 전 여인의 부모는 “내 딸의 목소리가 틀림없다”고 확인해주었다. 그리고 이는 얼마 후 나온 지문감식 결과와도 일치했다. 범인이 협박전화를 걸었던 전화기에서 채취한 지문과 전 여인의 지문이 일치했던 것. 범인은 바로 만삭의 몸을 이끌고 커피숍에 태연히 앉아있던 전 여인이었던 것이다. 다음은 조 팀장의 얘기.
“1분 1초가 급한 상황이었다. 전 여인을 빨리 체포해야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박 양의 생사 여부였다. 우리는 박 양이 살아있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전 여인이 도피 중에도 가끔씩 집으로 전화를 건다는 사실을 확인한 우리는 전화 발신지와 착신지를 추적했는데 11일 밤 11시 10분경 전 여인이 은평구 불광동에서 전화를 건 사실을 알아냈다. 우리는 전 여인이 아직 서울에 머물고 있다고 판단, 서울 시내 여관에 대한 일제 탐문수사를 실시해 다음날 오전 9시 20분경 관악구 신림동의 한 여관에 은신 중인 전 여인을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압송 당시 전 여인은 검은색 임산복을 입고 있었는데 머리가 온통 산발이었다. 전 여인은 완전히 맥이 빠진 상태로 두 눈을 감은 채 겨우 걸음을 옮겼다. 박 양이 유괴된 지 꼭 13일째 되는 날이었다.”
2주 가까이 온 국민들의 가슴을 졸이게 했던 유괴범이 검거됐다는 소식에 국민들은 환호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온 국민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박 양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다음은 조 팀장의 얘기.
“박 양은 이날 오전 11시 45분께 동작구 사당동의 한 지하 셋방에서 발견됐다. 그 곳은 인형극단을 운영하던 전 여인의 남편이 소품제작실 겸 창고로 사용해온 공간이었는데 수개월간 남편은 물론 외부인의 출입도 없이 월세까지 밀려있던 상태였다. 방안은 온통 먼지투성이인 데다 물건들이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져 있었는데 들어가자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해서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박 양은 빛도 들지 않는 지하 1층 계단 옆에 놓여있던 자주색 등산가방 속에 옷이 모두 벗겨진 채 몸을 구부린 자세로 들어있었다. 온몸은 발끝까지 퉁퉁 부어 있었고 이미 부패가 상당히 진행되고 있는 상태였다. 코와 입은 테이프로 봉해졌고 양 손과 양 발은 청테이프로 결박돼 있었다. 목을 졸린 흔적도 뚜렷이 보였다. 악마가 아니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전 여인이 진술한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사건 당일 전 여인은 오후 1시 30분쯤 학원으로 가던 박 양을 우연히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된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전 여인은 박 양의 단정하고 예쁜 외모를 보고 부잣집 딸로 판단, 위험한 범행을 계획하게 된다.
전 여인은 박 양이 학원을 마치고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재미있는 곳에 가자’고 꼬여 사당동에 있는 남편의 사무실로 데려갔다. 그리고 나리 양의 집에 첫 번째 협박전화를 한다. 그날 저녁 박 양에게 수면제 세 알을 먹인 전 여인은 밤 11시경 목을 졸라 살해했다. “수면제를 먹였는데도 잠들지 않고 칭얼대는 바람에 두려워 살해했다”는 것이 전 여인의 진술이었다.
수사팀을 가장 경악케 한 것은 전 여인이 출산을 불과 1개월 앞둔 만삭의 임산부였다는 사실이었다. 전 여인이 검거된 후 당시 수사에 투입됐던 수사팀원들은 하나같이 “임산부가 범인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전 여인은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 대학 출신 여성으로 단편집에 자신의 시를 게재할 만큼 문학에 소질을 지니고 있었던 인물로 전해진다. 실제로 전 여인은 시 <그리움의 강으로 시월의 밤은 흐르고>를 쓰기도 했다.
도대체 무엇이 꿈 많은 문학도를 ‘악마’로 만들었던 것일까. 넉넉한 환경에서 성장한 그녀는 결혼 후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 여인이 소규모의 인형극단을 운영하는 남편과 신혼살림을 차린 곳은 신길동에 위치한 16평 규모의 반 지하방이었다. 범행 당시 1100만 원 상당의 빚이 있었던 전 여인은 거주하고 있던 신길동의 연립주택이 차압당하고 수백만 원에 달하는 사채의 변제기일마저 다가오자 범행을 결심한 것으로 드러났다.
전 여인은 박 양을 유괴한 직후에 살해해놓고도 살아있는 것처럼 꾸며 박 양의 부모에게 2000만 원을 요구하는 협박전화를 건 것으로 확인돼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전 여인이 박 양을 살해한 후 태연하게 후배들을 불러 ‘파티’까지 벌였다는 점이다. 한 주민은 “지난 7일 회식이 있다며 상을 빌려 갔었고, 그날 밤 11시쯤 생일 축하 노래가 들렸다”고 증언했다. 전 여인이 ‘파티’를 벌였다는 날짜는 박 양의 생일 하루 전날이었다.
유괴살해 혐의로 기소된 전 여인은 법정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복역 중이다. “일시적인 경제적 궁핍을 모면하기 위해 어린 생명을 앗아간 범행은 극형에 처해 마땅하지만 우발적인 범행인 데다 피고인의 나이 경력 등을 고려해 볼 때 무기징역에 처한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