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삐삐
‘11010(흥)’ ‘1010235(열렬히 사모합니다)’ ‘1200(지금 바빠)’ ‘0024(영원히 사랑해)’ ‘8255(빨리 와)’ ‘0027(땡땡이)’ ‘5875(오빠 싫어)’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 스틸컷. 영원할 것만 같았던 삐삐의 인기는 휴대전화가 등장하면서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첩보영화에서나 볼 법한 숫자 암호들이 현실에서 일상적으로 쓰이던 시절이 있었다. 1990년대를 주름 잡았던 무선호출기 ‘삐삐’가 만들어낸 풍경이었다. 1982년 12월 삐삐가 처음 국내에 등장했을 때만 하더라도 소위 ‘잘나가는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이후 1990년대에 접어들며 무선호출사업자가 증가했고 덩달아 가입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삐삐는 ‘만인의 것’이 됐다.
당시 삐삐는 평범한 직장인들은 물론이고 대학생, 청소년들에게까지 큰 인기를 끌며 전성기를 누렸다. 1997년엔 가입자만도 1500만 명에 달했는데 사무실, 버스, 지하철, 카페, 교실, 거리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삐삐가 울려댈 정도였다. 호출을 받고 연락을 위해 달려가는 사람들로 공중전화도 늘 북새통을 이뤘다.
삐삐의 쓰임새는 참 다양했는데 그중 가장 로맨틱한 역할은 ‘사랑의 메신저’였다. 좋아하는 이에게 음성메시지로 고백하고 연인관계에서는 저들만의 은밀한 암호로 사랑을 키워나갈 수 있게 도왔다. 때론 위치파악을 하기 위한 ‘족쇄’로 변할 때도 있지만 어쨌든 삐삐는 연인들의 필수품이었다. 다만 직장인들에게 삐삐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개인적으로 사용할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시도 때도 없는 상사의 연락에서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삐삐의 인기는 휴대전화가 등장하면서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언제 어디서든 숫자 대신 음성으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시대가 되자 더 이상 사람들은 삐삐를 찾지 않았다. 대기업들은 사업권을 넘겼고 나래앤컴퍼니, 새한텔레콤, 전북이동통신 등 지역 사업자들도 2000년부터 속속 폐업하며 그렇게 삐삐는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3만 5000여 개의 삐삐가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가입자 중 대부분은 병원에 근무하는 의사와 간호사, 대규모 공장 근로자, 증권정보서비스 이용자 등 특정 직업군이지만 약 1만 명은 그때 그 시절의 삐삐를 잊지 못해 계속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유일한 사업자인 서울이동통신은 최근 시범적으로 상수도 무인검침에 삐삐를 이용해 신선함을 주고 있다. 수도 사용량을 자동으로 인시한 후 무선호출 네트워크로 실시간 전송하는 방식으로 효율성 측면에서 후한 평가를 받고 있다.
# 공중전화카드
만인의 휴대전화이자 삐삐의 단짝 친구였던 공중전화는 본래 동전으로만 사용할 수 있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무겁고 거추장스러워도 항상 동전을 지니고 다녔다. 하지만 1986년 MS카드식 공중전화의 등장은 많은 이들에게 동전으로부터의 해방을 선물했다. 얇고 가벼운 공중전화카드는 휴대성이 용이할 뿐만 아니라 실제 충전금액의 10%를 더 제공해 훨씬 경제적이었다. 또한 충전금액이 넉넉해 동전이 떨어질까 전전긍긍하며 통화를 할 필요도 없어 큰 인기를 끌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지갑 속 필수품으로 자리 잡은 공중전화카드는 소중한 추억을 많이 선물했다. 길을 걷다 땅에 떨어진 공중전화카드가 보이면 주변의 눈치를 보며 슬쩍 주워 잔액을 체크해 혹시나 돈이 남아있으면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한창 수다를 떨었다. “잊어버리지 말고 이걸로 꼭 전화하라”며 수학여행을 떠나는 자녀들에게 쥐어주던 1000원짜리 공중전화카드는 부모님의 사랑을 대신했고 “힘들 땐 언제든 내게 전화해”라는 멘트와 함께 건네주는 공중전화카드는 좋은 고백수단이 되기도 했다.
한편 공중전화카드는 시간이 흐를수록 외형적으로도 변신을 거듭했다. 공중전화카드가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하더라도 카드의 앞면은 각 나라별 시차, 전국 지역번호, 지하철 노선도, 경조사 문구 등 생활정보를 담고 있거나 야생화, 동물, 풍경그림으로 채워졌다. 예쁜 그림이 그려진 공중전화카드를 수집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충전금액을 소진하면 버리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공중전화카드의 홍보 효과를 노린 기업들이 발 빠르게 자사의 광고수단으로 사용하면서 대기업뿐만 아니라 개업 선물, 결혼 답례품 헌혈 증정품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며 개성 가득한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당대 인기 스타의 사진이 인쇄된 공중전화카드를 손에 넣기 위해 온 동네 슈퍼마켓을 뒤져 싹쓸이하는 황당한 풍경도 연출됐다. 물론 그 카드들은 한 번도 사용되지 않고 보물처럼 모셔졌다.
이처럼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공중전화카드도 휴대전화가 보급되면서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더니 이제는 이주노동자들과 군인들만이 찾는 물품이 돼버렸다. 온갖 광고가 자리하던 카드의 앞면에는 그리운 가족 또는 연인들의 얼굴이 인쇄돼 사진 역할까지 하고 있으며 금액을 다 사용해도 충전이 가능해 버려지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도 변화된 점이다.
# 비디오테이프
지난 5일 서울역사박물관 기증유물전시실에서 ‘응답하라 1994, 그 후 20년’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임준선 기자
만화영화 비디오테이프를 재생시킬 때마다 등장하던 ‘무시무시한’ 이 경고문은 1990년대 유년시절을 보낸 이들이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비디오테이프가 한창 주가를 올리던 1990년대는 이른바 ‘홈 비디오 시대’로 불린다. 당시에도 VTR(Video Tape Recorder)은 고급 가전제품이었지만 ‘안방극장’으로 불리며 거의 두 가구당 한 대꼴로 널리 보급이 됐었다.
덩달아 비디오영화 대여 업소도 호황을 누렸다. 으뜸과 버금, 영화마을 등 유명 비디오영화 대여 업소들이 동네마다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유명 신작이 들어올 때면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때로 소식을 늦게 접하고 대여소를 달려가면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고 며칠씩 전화만 기다려야 할 때도 있었다. 지금이라면 인터넷에서 간단히 다운을 받아볼 수 있겠지만 그땐 대여소를 이용하거나 친구들이 불법으로 복사한 비디오를 빌려보는 게 전부였다.
비디오테이프는 영화감상뿐만 아니라 텔레비전 녹화용으로도 인기 만점이었다. 좋아하는 연예인이 나오는 드라마, 예능, 가요 프로그램을 녹화해 테이프가 낡을 때까지 돌려보기도 하고 꼭 봐야 할 프로그램을 놓치게 될 상황이면 가족들까지 동원해 녹화를 한 뒤 외출 후 재생시켜 보기도 했다.
그러나 비디오테이프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수명의 한계가 있었고 관리를 잘못하면 테이프가 훼손돼 화질이 크게 떨어졌던 것.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디지털 방식으로 데이터를 저장하는 1990년대 후반부터 CD가 등장했고 이는 크기도 작고 휴대가 편리해 비디오테이프의 자리를 빠르게 대체했다.
# 컴퓨터
불과 30년 전만 하더라도 컴퓨터는 전문가의 영역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몇 달치 월급을 모아야 겨우 살 수 있는 비싼 가격도 문제였지만 일반인들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어려운 도스 명령어로 작동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0년대를 넘어서면서 컴퓨터 가격이 저렴해지는 동시에 조작법도 간단해져 각 가정마다 한 대씩 보유하는 시대를 맞이했다.
몸값 비싸던 컴퓨터가 대중화되자 엄청난 열풍이 불었다. 컴퓨터를 다루지 못하면 밀레니엄 시대를 살아갈 수 없다는 불안감도 조성돼 동네마다 컴퓨터학원이 문전성시를 이뤘으며 컴퓨터 관련 도서들이 연일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대학에서도 컴퓨터 관련 학과의 인기는 단연 최고였다.
컴퓨터의 등장은 여가활동의 변화도 이끌었다. 오락실 혹은 비디오게임이 전부이던 시절을 지나 컴퓨터용 게임이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고 온 국민을 독수리 타법에서 해방시킨 ‘한메타자교실’도 히트를 쳤다. 특히 PC통신이 활발하게 사용되면서 채팅, 온라인 게임 등이 신세대를 대표하는 문화로 자리 잡았다.
당시 PC통신은 지금의 인터넷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한 수준이었지만 그만의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천리안, 하이텔, 나우누리, 유니텔 ‘4대 PC통신’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모뎀에 연결할 때마다 들리는 특유의 ‘삐-’ ‘찌지지직’ 소리는 새로운 세상에 접속하는 신호음이자 부모와의 전쟁을 알리는 선전포고였다.
“PC통신을 사용하면 누군가 전화를 걸어도 계속 통화 중이라는 신호음만 전해져 상대방이 꽤나 답답했었다. 그래도 아랑곳 하지 않고 채팅에 빠져 한때 전화요금이 30만 원이 나오기도 했다. 그날 부모님한테 엄청 맞았었다. 그 뒤로는 부모님 몰래 야심한 시간에 PC통신에 접속했는데 특유의 소리 때문에 혹여나 들킬까 가슴 졸이던 기억이 있다.”
“전화사용이 뜸하고 부모님이 잠든 밤이 PC통신을 사용하기 최적의 시간이었다. 그때 연인과 삐삐에 암호를 남겨 서로 PC통신 접속해 채팅을 하는 게 낙이었는데 나 같은 사람이 많았는지 그 시간대에는 접속이 상당히 느렸었다. 지금 같으면 열 받아서 당장 꺼버렸을 테지만 그땐 접속을 기다리는 그 순간도 설렘이 가득했었다.”
앞서 살펴본 1990년대의 아이콘 삐삐 공중전화카드 비디오테이프 컴퓨터 4가지는 모두 ‘모바일’ 스마트폰 하나로 대체되는 세상이 되었다. 20년 후에는 또 어떤 ‘괴물’이 지금의 스마트폰을 대체하게 될까.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
90년대 명절 귀성길 풍경 ‘차표 구하기 별따기’ 터미널서 1박2일 매년 설날과 추석이 돌아오면 3000만 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전국 각지로 이동하는 진풍경이 그려진다. 명절이면 당연하게 여겨지는 민족 대이동이지만 사실 역사는 그다지 길지 않다. 1980년대 급격한 도시화로 고향을 떠난 많은 젊은이들이 명절이면 귀성길에 올랐고 1990년대 그 인구가 급증하면서 본격적으로 ‘민족 대이동’이라는 단어가 쓰이기 시작했다. 고속도로 상황이 좋지 않던 시절, 고속버스는 ‘지옥 버스’였다. 서울에서 웬만한 지방은 10시간을 훌쩍 넘기기 일쑤였고 화장실을 가지 못한 승객들의 고통 에피소드는 하나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 특히 휴게소에서의 여자화장실은 고통의 장소였다. 남성용보다 상대적으로 수가 적은 여성용은 칸마다 긴 줄이 장사진을 이뤄 여성들의 큰 원성을 샀다. 휴게소에서의 버스 정차 시간은 대략 15분 정도였다. 허겁지겁 식사를 하다가 버스를 놓치거나, 반대노선 버스를 잘 못 타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시민의식도 심각했다. 당시에는 휴게소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휴게소마다 쓰레기통이 넘쳐 악취가 진동을 했고, 갓길에 쓰레기를 마구 버려 한 때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경찰의 즉흥적인 교통통제 때문에 서울-대전을 10시간 만에 도착한 사람도 있었다. 서울에서 교통체증을 뚫고 4시간만에 수원에 도착했지만, 경찰이 고속도로를 일방적으로 통제하는 바람에 차를 안성으로 다시 돌려 고속도로에 진입, 10시간만에 겨우 대전에 도착한 것이다.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모든 고속도로 상황을 손바닥처럼 볼 수 있기 때문에 서울-대전 10시간 에피소드는 추억의 얘깃거리가 됐다. 시간이 흘러 2015년 설날을 맞은 풍경은 참 많이도 변했다. 하늘의 별따기였던 귀성표를 구하기 위해 밤새 줄을 서는 대신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이용해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됐다. 또한 귀성길도 한결 간편해졌다. 커다란 짐들은 미리 택배를 이용해 고향집으로 보내고 두 손 가볍게 떠나는 사람들이 많다. 무엇보다 명절=귀성이라는 공식이 깨지기 시작하고 있다. 모처럼 연휴를 맞이해 가족끼리 해외여행을 떠나거나, 자식들에게 해외여행 ‘휴가’를 허락하는 부모들이 늘어나면서 명절만 되면 고향에 가야한다는 사회의식도 점차 변하고 있다. [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