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겐카운티 행정장과 함께 버겐카운티 위안부 기림비를 방문한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 오른쪽은 김동찬 시민참여센터 대표.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시민참여센터를 이끌고 있는 김동찬 대표는 지난 1989년 건국대 총학생회 부회장을 맡고 전대협 활동을 한 이른바 ‘386세대 운동권’ 출신이다. 그로 인해 뜻하지 않게 수배령이 떨어져 도피생활을 하다 1991년 경찰에 붙잡혀 집행유예를 선고받기도 했다.
김 대표는 이후 1994년 김영삼 정부때 사면을 받고 바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처음 미국으로 향할 때만 해도 학위만 마치면 바로 귀국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운명이었을까. 그는 미국에서 다시 ‘운동권’에 발을 담그게 됐다. 이번에는 한인사회의 권익신장을 위한 풀뿌리운동이었다.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캠퍼스에 가니 한인들이 모여 이런저런 활동을 하고 있었다. 건국대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나는 사람들을 어떻게 모으고, 어떤 식으로 활동을 전개해야 하는지 등을 배운 게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 옆에 떨어져 훈수만 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활동을 시작한 다른 사람들은 떠나고, 내가 그룹의 중심에 들어와 있었다.”
김 대표가 본격적으로 시민참여센터를 설립하기로 결심한 것은 4·29 LA폭동 영향이 컸다.
“당시 LA폭동은 한인사회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인 밀집 지역에 폭동이 일어나 약탈과 방화, 폭력이 벌어져도 백인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주 방위군은 한인 지역 뒤에 바리케이드를 세워두고 자신들의 구역으로 넘어오지만 않게 했다. 눈앞에서 절도가 벌어지는데도 미국 경찰들은 자기들끼리 서서 웃고 떠들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 대표와 한인들은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했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때까지 한인들은 ‘돈 많이 벌어서 우리끼리 잘살자’라는 생각에 미국사회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미국인들도 우리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그동안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학교에 가면 전부라고 생각했던 아메리칸 드림이 정작 위기의 순간에 직면하니 허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후 김 대표는 지인의 소개로 김동석 상임이사를 만나 지난 1996년 4월 LA폭동에 대한 행사를 하면서 시민참여센터(당시 한인유권자센터)를 설립하게 됐다. 한인들이 미국 사회에 목소리를 내고 권익을 찾기 위해서는 정치에 적극 참여해야한다고 판단하고 직접 한인들의 가정을 방문하며 유권자 등록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김 대표는 시민참여센터를 설립하고 초기 활동할 때까지도 ‘나는 유학생 신분이다’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김 대표는 시민참여단체를 통해 유권자등록 운동을 계속 진행했지만 한국 사회에 이목을 끌기 시작한 것은 미국 사회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제기하면서부터다.
“지난 2006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759 결의안이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했다. 하지만 결의안은 전체 회의에 채택되지 않고 하원 회기 종료와 함께 자동 폐기됐다. 우리는 ‘이래선 안 되겠다’ 생각해 마이클 혼다 민주당 의원을 찾아갔다. 혼다 의원이 결의안 통과에 의지를 보여 우리 단체와 결의안을 작성했다. 이어 공화당의 중진 의원인 크리스토퍼 스미스 의원도 함께하겠다는 뜻을 밝혀 2007년 1월 종군위안부 결의안 121을 공동 발의했다.”
결의안을 제출했지만 일본 정부의 반발로 하원 의회 통과까지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하원 결의안 121을 통과시키기 위해 시민참여단체 모두가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 뉴욕에서 워싱턴까지 차로 가면 왕복 10시간이 걸린다. 새벽 5시에 집에서 출발해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새벽 1시가 되기 일쑤였다. 그런 일정을 10번 이상 소화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결의안 통과 필요성을 의원들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일본의 로비스트들이 의회를 한번 돌고나면 의원들 사이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럼 우리가 다시 의원들을 만나 설득해야 했다. 그런 과정이 계속됐다.”
어려움 속에 지난 2007년 2월 15일 연방 하원 외교위원회 아태 환경소위원회에서 위안부 청문회가 최초로 개최됐다.
“위안부 청문회에 이용수·김군자 할머니와 네덜란드 출신 위안부였던 호주의 얀 루프 오헤른 할머니가 증인으로 출석했다. 특히 얀 할머니는 영어로 ‘내가 오늘같은 일이 있을 줄 알고 매일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내 딸에게 내가 겪은 일을 이야기했다. 그렇게 딸에게 확인을 받으며 위안부 기억을 간직해왔다’고 털어놨다. 백인 할머니의 증언에 의회 안은 충격으로 고요해졌다. 할머니들의 증언으로 판세가 한순간에 뒤집힌 것이다. 그런 과정으로 위안부 결의안 121은 외교위원회를 통과할 수 있었다.”
위에서부터 버겐카운티 위안부 기림비를 방문한 미 연방의회 거물 스캇 가렛 의원과 기념촬영. 유니온시티 위안부 기림비 제막식. 위안부 할머니와 동북아역사인턴십 인턴들의 만남.
“지난 2009년 시민참여센터의 박재진 변호사가 뉴저지 버겐카운티 청사 앞을 지나가다 흑인들이 모여 행사를 하는 모습을 봤다. 박 변호사가 ‘뭘 하고 있느냐’고 물으니 그들은 ‘흑인 노예’ 관련 기림비를 세우고 있다고 답했다. 흑인들은 ‘기림비를 세우는 데 10년이 걸렸다’고 덧붙였다. 이에 시민참여센터는 위안부 기림비 설치를 주요 의제로 삼고 2009년 4월부터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처음에는 기림비를 버겐카운티에 세우려고 했지만 진행이 안 됐다. 이에 버겐카운티에서 팰리사이즈파크를 소개해줬고, 팰리사이즈파크 시의회의 기림비 부지 지원 결의를 거쳐 팰리사이즈파크 공립도서관 옆에 최초의 위안부 기림비를 세우게 됐다.”
하지만 처음에는 사람들이 기림비가 중요한지도, 큰 관심도 없었다고 한다. 일본 정부나 극우세력의 반대나 저지 움직임도 없었다. 오히려 미국 재향군인회나 동네 주민들의 반발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다 북한 인권법 갱신을 위해 미국을 방문한 일본 의원 일행이 위안부 기림비를 보더니 ‘일본을 모욕하는 기림비를 왜 세웠느냐. 이 내용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기림비를 뽑으면 이 도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좋은 관계를 이어나가겠다’고 제안했다. 이어 일본 의원은 일본에 돌아가서는 기자회견을 통해 ‘기림비를 북한이 세웠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언론에 주목을 받고 세계적 이슈를 끌기 시작했다.
“위안부 기림비가 주목을 받기 시작하자 처음 세우고자 계획했던 버겐카운티에도 기림비를 건립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2012년 10월 버겐카운티의 캐슬린 도너번 카운티장이 한국 방문을 계획하며 시민참여센터에 도움을 구했다. 그래서 우리가 도너번 카운티장을 경기도 광주의 나눔의 집과 연결시켜줬다. 나눔의 집을 방문한 도너번 카운티장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로하면서 ‘내가 돌아가면 버겐카운티에 기림비를 세우겠다’고 약속했고, 2013년 3월 8일 ‘여성의 날’을 기념해 위안부 기림비를 세웠다. 이어 지난해 8월에는 뉴저지주 유니언시티에 위안부 기림비를 또 하나 세워 미국 뉴저지주에만 3개의 기림비가 있다.”
시민참여센터는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 시립공원의 위안부 소녀상이 세워지는데도 도움을 줬다. 하지만 김 대표는 소녀상보다는 기림비를 원했다고 한다.
“미국에 세워져 있는 것은 보통 기림비다. 기림비의 의미는 교육이다. 그런데 소녀상은 반대를 의미한다. 또한 한국적인 소재다. 그러다보니 한국과 일본의 갈등관계로 부각돼 일본과 충돌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일간 갈등이기에 앞서 인류 보편의 인권에 대한 문제다. 인류의 수치스러운 과거가 반복되지 않도록 후대에 끊임없이 교육하고, 일본이 이 문제에 대해 책임 있는 사과를 해야만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이 결의안을 채택하고 기림비를 세우는 등 위안부 문제에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미국이 왜 끼어들겠는가.”
시민참여센터 등 한인단체 이름으로 직접 위안부 기림비를 세우지 않고, 한국정부에 공식적으로 후원금을 받지 않는 것도 한국과 일본의 문제로 이슈를 축소시킬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시민참여센터는 앞으로도 풀뿌리시민운동을 펼쳐나갈 계획이다. 김 대표는 “시민참여센터는 뉴욕시립대의 퀸즈보로커뮤니티칼리지에서 3년째 진행하고 있는 동북아시아역사인턴십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을 연구해 교육 자료를 만들고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전문가를 지속적으로 양성해 나갈 계획”이라는 당찬 포부를 밝혔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