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팀이 놀랄 만한 비밀병기를 선보이고 싶다.”
“신무기가 어느 정도 완성됐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많은 투수들의 인터뷰에 등장하는 얘기다. 투수라면 누구나 팔색조처럼 다양한 변화구를 구사하고 싶어 한다. 시즌이 끝나면 늘 새로운 구종 장착을 모색하고, 스프링캠프에서 완성시키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그런데 이런 장담들이 현실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구종 하나를 완벽하게 익혀 실전에서 적절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즌 내내 마운드에서 상대팀 타자들과 싸워야 하는 투수들에게는 그 공 하나에만 매달려 있을 시간이 없다. 끝내 미완성으로 남거나,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투수들은 캠프지에서 새로운 무기를 손에 넣기 위해 애쓰고 있다. 정상급 선수들은 자신의 자리를 계속 지키기 위해, 그리고 평범한 투수들은 더 나은 투수로 성장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린다.
# 얼마나 걸려야 배우나
두산의 장원준은 체인지업을 익히는 데 3년이 걸렸다고 한다. 장원준이 스프링캠프에서 연습 투구를 하는 모습. 사진제공=두산 베어스
물론 유독 새 구종을 더 빠르게 익히는 선수들도 있다. 감각을 타고난 선수들은 시즌 도중 새 변화구를 찾아 곧바로 써먹기도 한다. 기존에 던지던 공에 대해 기본기가 잘 잡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A 감독은 “직구, 커브, 슬라이더를 기본 구종으로 놓고 볼 때, 이 공들의 기본을 잘 배운 투수가 다른 공도 금방 배운다”고 했다. 게다가 투수별로 신체적 특징과 폼에 따라 잘 맞는 구종의 궁합이 따로 있다. 예를 들어 손가락이 유난히 긴 SK 윤희상은 우연히 포크볼 그립을 잡고 던져봤다가 자신의 주무기를 얻었다. 똑같은 우완 정통파라 해도 타점이 높은 최동원은 커브, 타점이 낮은 선동열은 슬라이더가 주무기였던 것도 같은 이유다. 또 많은 투수들은 “체인지업과 슬라이더를 동시에 잘 던지기는 무척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체인지업에 이어 슬라이더까지 최고 수준으로 끌어 올린 LA 다저스 류현진이나 팔색조 변화구로 유명한 볼티모어 윤석민이 그 ‘흔치 않은’ 유형으로 동료들의 부러움을 샀다.
# 어떤 과정을 거치나
예전에는 지도자가 먼저 투수에게 새 구종 장착을 권유하는 일이 많았다. 요즘은 투수들 스스로 새 무기를 갖고 싶다고 조른다. 스프링캠프에서는 투수들이 삼삼오오 모여 서로 관심 있는 변화구의 그립을 보여주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다. B 구단 투수코치는 “투수들은 연차가 쌓여 가면서 새 구종을 장착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기존에 갖고 있는 레퍼토리의 한계를 느끼기 때문”이라며 “만약 직구, 커브, 슬라이더를 던졌을 때 성적이 좋았다면 그대로 밀고 나가면 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기존의 공들을 믿지 못할 수밖에 없다. 이때 새로운 구종을 찾고 싶은 마음이 고개를 든다”고 설명했다. 앞서의 A 감독은 “선수들끼리 얘기를 많이 하면서 정보를 교환해서 배운 뒤 투수코치에게 보여주고, 그 후에 조언을 해주는 일도 많다”고 했다.
그래픽=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선수들은 주로 마무리캠프나 스프링캠프를 앞두고 신무기 개발을 고민한다. B 코치는 “이때 선수와 지도자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원래 갖고 있는 공의 장점을 극대화시킬지, 아니면 새 구종을 장착해 다양한 레퍼토리로 상대를 현혹시킬지 결정을 해야 한다”며 “기존에 던지던 공 가운데 잘 먹히지 않는 공을 과감히 버리는 작업도 할 수 있다. 또 같은 구종이라도 속도를 다르게 던질 수 있다면 효과가 더 커진다. 쉬운 훈련은 아니지만, 한 구종의 속도 조절을 훈련하는 것도 좋은 절충안”이라고 설명했다.
새 구종을 던지기로 결정했다면, 당연히 그립부터 먼저 배운다. 감각을 손에 빨리 익히기 위해 잠을 잘 때조차 새 변화구의 그립으로 야구공을 쥐고 잤다는 선수가 있을 정도다. 그러나 C 투수는 “그립이 같다고 같은 궤적이 나오는 게 아니다. 그립은 기본일 뿐, 오히려 공을 손에서 뺄 때의 느낌에 따라 성공 여부가 달라진다”며 “선수에 따라 일반적인 그립과 달리 조금씩 손가락 위치에 변화를 줘서 자신만의 방식을 만들어내기도 한다”고 했다. D 투수 역시 “같은 변화구라 해도 궤적에 따라 다른 효과를 낼 수 있다. 종으로 떨어지는 변화구가 횡으로 휘는 변화구와 같은 효과를 볼 수도 있는 것”이라며 “손의 어떤 부분에 굳은살이 박였는지를 보면 다른 느낌을 서로 짐작할 수 있다”고 귀띔했다.
# 주무기를 잘 던지는 데 집중해야
그런데 의문 하나. 과연 변화구를 많이 장착한다고 좋은 투수가 되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E 구단 투수코치는 “갖고 있는 구종을 경기에서 골고루 쓴다면 상관없지만, 오히려 많은 구종을 잘 던지려다가 함정에 빠질 수 있다. 불리한 볼카운트에서 스트라이크를 잡을 수 있는, 제구에 자신 있는 변화구가 진짜 그 투수의 주무기인 것”이라며 “그립만 잡아서 던질 수 있는 건 무기가 아니다. 구종의 숫자를 늘리기 위한 습득이라면 시작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슬라이더에 일가견이 있는 F 투수 역시 “내가 정말 자신 있게 던질 수 있고, 타자가 그 의도에 맞게 반응하는 공이 진짜 내 변화구”라고 단언했다. 실제로 프로 통산 161승을 따내 역대 최다승 2위에 올라 있는 정민철 MBC+ 해설위원은 현역 시절 직구와 커브만 주로 쓰는 ‘투 피치’ 투수였다. 정 위원은 “한창 좋을 때는 직구 하나에 확실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변화구가 별로 필요 없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봉중근은 최근 신무기로 슬라이더와 포크볼을 장착했다. 사진제공=LG 트윈스
무엇보다 새로운 구종을 익히는 과정 자체에 부작용이 따르기도 한다. G 야구 관계자는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은 공이 가는 방향이 다르다. 팔의 감각에도 미세한 차이가 있다”며 “투수가 훈련과정에서 공을 던지는 개수는 한정돼 있다. 새로운 구종을 연마하기 위해서는 그 공을 던지는 비율을 높일 수밖에 없는데, 이 과정에서 기존에 갖고 있던 구종의 감각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변화구를 많이 던지기 시작하면 직구 구속이 떨어진다’는 속설도 이런 시각에서 나왔다. A 감독 역시 “변화구는 각각 그립과 투구 메커니즘이 다르다. 한 투수가 모든 변화구를 던질 때 그 특성이 몸 안에서 충돌할 때가 많다”며 “성공한 투수 중에서도 새 변화구를 연습하다 구위가 평균 이하로 급격히 추락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변화구가 더 필요하다면 프로에서 충분히 적응한 뒤 변화를 시도해도 늦지 않다”고 강조했다.
배영은 스포츠동아 기자 yeb@donga.com
한국 야구 변화구 유행 한일전 뒤 ‘포크볼’ ML붐 뒤 ‘체인지업’ 한국 프로야구가 33년간 놀라운 성장을 이뤘듯, 투수들의 변화구도 끊임없는 진화를 거듭했다. 지금은 직구(포심 패스트볼)가 변형된 형태인 투심 패스트볼, 컷 패스트볼(커터), 싱킹 패스트볼(싱커)까지 각광을 받을 정도. 그러나 초창기에는 투수들이 선택할 수 있는 구종의 범위가 무척 좁았다. 원년 스타인 OB 박철순이 미국에서 배운 팜볼을 구사해 반짝 화제를 모았을 뿐, 대부분의 투수들은 커브와 슬라이더로 한 시즌을 나곤 했다. 최동원은 ‘폭포수 커브’로 선동열은 ‘슬라이더’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한국 투수들이 처음으로 포크볼이라는 구종에 눈을 뜬 건 1991년 한·일 슈퍼게임 때였다. 일본 프로야구의 수준이 한국보다 한참 앞서 있던 시절이다. 한 야구 관계자는 “당시 우리나라 타자들이 일본 투수들의 포크볼을 눈앞에서 보면서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더그아웃에서 다들 ‘저게 무슨 공이냐’고 쑥덕거렸고, 이후 그 포크볼의 위력을 실감한 투수들이 하나둘씩 익혀 나가기 시작했다”고 했다. OB 이광우는 포크볼을 잘 던지기 위해 검지와 중지 사이를 살짝 찢는 수술을 감행했을 정도다. 1990년대 후반 들어서는 최초의 한국인 메이저리거 박찬호가 돌풍을 일으키면서 체인지업이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다. ‘코리안 특급’을 메이저리그 정상급 투수의 반열에 올려놓은 구종에 국내 투수들의 관심이 쏠렸다. 당대의 스타 투수였던 한화 구대성 역시 체인지업을 완벽하게 구사하면서 유행에 기름을 부었던 선수다. LA 다저스 류현진이 한화 시절 구대성에게 서클 체인지업 그립을 배운 뒤 곧바로 실전에 활용했다는 일화는 이미 잘 알려진 얘기다. 한 투수코치는 “박찬호 때문에 메이저리그를 보는 선수들이 많아지고 용병 제도까지 도입되면서 2000년대부터는 투심과 커터처럼 해외에서만 보던 변종 직구들도 한국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며 “요즘은 인터넷이 발달하고 메이저리그와 일본 프로야구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 프로야구 투수들이 ‘몰라서 못 던지는’ 변화구는 없는 것 같다. 그만큼 다양해지고 수준이 높아졌다”고 했다. [은] |
최고의 ‘마구’ 탄생 비화 리베라 캐치볼 중 커터 ‘발견’ 야구 역사상 최고의 구종은 무엇일까. 메이저리그 전문가들은 세계 최고의 소방수였던 마리아노 리베라(전 뉴욕 양키스)의 컷 패스트볼(커터)을 꼽는다. 리베라는 1997시즌 마무리투수 전환을 앞두고 심란한 마음으로 캐치볼을 하다 우연히 이 역사적인 공을 발견했다. 캐치볼을 함께 하던 동료가 “계속 공이 조금씩 왼쪽으로 휘어서 들어온다”는 지적을 했고, 그 순간 자신이 무의식중에 중지에 힘을 준 채 던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탄생 스토리마저 영화 같은 이 커터로 리베라는 메이저리그 역대 최다 세이브(652개) 기록을 세운 뒤 영광스럽게 마운드를 내려왔다. 지난해 말 한국을 방문한 리베라는 기자회견에서 “내가 마지막 공을 던지던 순간까지 내 커터는 한 번도 휘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자부심을 보였다. 일본인 메이저리거 다나카 마사히로는 스플릿 핑거 패스트볼(스플리터)을 앞세워 양키스와 7년간 1억 5500만 달러짜리 대형 계약을 성사시켰다. 현지 언론이 ‘마구’라고 표현할 만큼 관심을 받은 공이다. 다나카가 2010년 야구 잡지를 읽다가 당시 소프트뱅크 용병투수였던 브라이언 폴켄버그의 스플리터 그립을 따라한 게 이 공의 탄생 비화. 다나카는 잡지를 보고 공부한 그립으로 불펜에서 단 한 차례 던져본 뒤 실전에서 스플리터를 제대로 활용해 일본을 놀라게 했다. 이뿐만 아니다. 또 다른 일본인 메이저리거인 다르빗슈 유(텍사스)는 올 시즌 중반 다나카에게 이메일로 스플리터를 어떻게 던져야 하는지 방법을 물어봤다. 그리고 답장을 받은 당일 밤 클리블랜드전에서 스플리터로 삼진 세 개를 잡아냈다. 더 놀라운 점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두 투수의 대답이 똑같았다는 점이다. “불펜에서 아무리 좋은 공이라고 생각해도 타자를 앞에 두면 다른 공이 될지도 모른다. 경기 때 직접 던져보는 게 낫다.” 대단한 재능에, 대단한 배짱이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