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3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한 발언을 두고 당 3선 의원은 이렇게 풀이했다. 이날 김 대표는 “장관이라는 자리를 정치인의 경력 관리로 생각해선 절대 안 된다. 개혁을 성공하지 못하면 돌아올 생각 마라. (박 대통령은) 지역구 의원들 그만 데려가길 바란다”고 했다. 앞의 두 문장은 비장조로 마지막 문장은 웃으며 했다는데, 의원들 해석은 달랐다.
김무성 대표(앞줄 왼쪽)와 유승민 원내대표(앞줄 오른쪽)가 최근 공개적으로 청와대를 비판하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다. 2월 9일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의원총회.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앞서의 3선 의원은 “누가 입각했는지를 눈여겨봐야 한다. 청와대가 사실상 친박 의원 스펙 관리, 경력 쌓기를 해주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며 “사실상 김 대표는 이날 친박에 전면전 경고장을 날린 것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김 대표는 다음날 기자들과 만나 “어제 제가 한 말은 농담이 아니다”라며 재차 강조했다.
여권의 두 축인 청와대와 새누리당 관계는 최근 무게추가 당으로 크게 기울면서 내란 양상을 보이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민심이 청와대보다는 여당에 쏠리자 당 지도부 문장 강도가 한층 드세진 모습이다. 우회적으로 볼멘소리를 하던 지난 지도부완 달리 아예 대놓고 겨누는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2월 27일 단행된 청와대 인사 개편에선 모두가 쉬쉬할 때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쓴소리를 삼가지 않았다. 이병기 국정원장이 비서실장에 임명된 것을 두고선 “국정원에 얼마 안 있은 분이어서 유감”이라 했고, 주호영 윤상현 김재원 의원을 정무특보에 지명한 것에 대해선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께 건의 드린 부분은 반영이 안 됐다”고 했다. 유 원내대표는 박 대통령에게 “정무특보는 당 소외그룹이나 야당과 대화가 잘 되는 분으로 했으면 한다”고 제안한 바 있다.
여권 사정에 밝은 정치권 인사는 이를 두고 “추대가 아니라 직선제로 직접 뽑힌 지도부가 힘을 내기 시작했다”고 해석했다. 그는 “과거 전당대회도, 이번 원내대표 경선도 모두 박 대통령의 다소 노골적인 친박 지원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누르고 당선된 ‘K·Y(김무성·유승민)’ 아니냐”며 “일부 속도조절도 있겠지만 당과 상의하지 않는 청와대를 언제까지 비호할 수만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국회에서 열린 첫 당·정·청 정책조정협의회 비공개회의에서는 공개 발언 때와는 달리 냉랭한 분위기가 연출됐다는 후문이다. 우선 당에서는 비서실장이 아닌 청와대 수석들이 참여하는 것을 두고 “효율적이지 않다. 급이 맞지 않다”는 지적이 있었고, 공무원연금개혁, 공공·노동·교육·금융 4대 구조개혁, 연말정산 논란, 건강보험료 체계 개편 등의 안건을 청와대가 가져왔다는 데 대해서도 적잖은 불쾌감을 표했다는 것이다. 여당 원내지도부는 의제 설정도 당과 상의할 것을 주문하면서 이날 안건이 아니었던 세월호 인양문제를 거론했다는 전언이다.
눈에 쉽게 띄진 않지만 당의 공세는 산발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우선 당은 부실 당원협의회(옛 지구당) 위원장 교체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총선이 1년 남은 시점에 사고 당협 관리에 대대적으로 나선다는 차원에서다. 당협위원장 선정이 사실상 총선 공천의 예비단계여서 당 소속 의원들은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중앙선관위가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해 지역구 수는 줄이고 비례대표는 늘리는 정치관계법 개정 의견을 확정한 것을 두고서도 말들이 많다. 여권 한 관계자는 “선관위 월권이란 비판도 있지만, 공천권을 쥔 지도부로선 호재를 만난 것과 같다”며 “선관위 안대로 100% 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역구가 사라지는 문제는 의원들 줄 세우기가 가능한 사안이다. 지도부의 당 장악력을 한층 높일 수 있는 이슈”라고 해석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2월 23일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국회에서 부동산 3법을 지난해 연말 처리한 것을 두고 “아주 퉁퉁 불어터진 국수”로 비유했다. 사진제공=청와대
무엇보다 4·29보궐선거가 터닝 포인트가 될 것이란 해석이 심심찮게 들린다. 30%대에 머물고 있는 박 대통령 지지율보다 보선에 나선 후보자 득표율이 높으면 패하더라도 그 책임론이 청와대로 향할 수밖에 없다. 만약 한 석이라도 가져온다면 여권의 무게 추는 당으로 완전히 기운다.
‘지옥 아래 성남’이라는 새누리당 사지에서 자당 후보가 앞서 있다는 여론조사가 나오면서 당 지도부가 한껏 고무돼 있다. 특히 새정치연합과 정의당, 옛 통합진보당 후보들이 모두 나와 야권이 분열되면 나머지 두 곳도 승산이 있다는 얘기까지 들린다.
유승민 원내대표 당선으로 ‘김무성 포위망’이 뚫려버린 청와대 반격도 만만치 않다. 김무성 대표가 박 대통령을 겨냥한 발언을 한 23일 당일 박 대통령은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내각 중심의 강력한 정책 조정을 통해서 힘 있는 정책 추동력을 확보해 달라”고 말했다. ‘당 중심’을 설파하는 여당 지도부와는 완전히 다른 목소리였다. 게다가 이날 박 대통령은 크게 회자된 ‘불어터진 국수’ 발언을 이어갔다.
“우리 경제를 생각하면 저는 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든다. 여러 노력이 필요하지만 지난번 부동산 3법도 작년에 어렵게 통과됐는데 그것을 비유로 하자면 아주 퉁퉁 불어터진 국수였다. 그런 불어터진 국수를 먹고도 (경제가) 힘을 차리는구나.”
사실 부동산 3법은 여당이 야당에 무릎을 꿇다시피 하면서 얻어낸 결과물이었다. 이날 박 대통령 발언을 전해들은 실무진의 한 의원은 “우리가 야당 의원들 바짓가랑이 부여잡고 싹싹 빌면서 얻어낸 것을 대통령이 이렇게 평가하니 힘이 쭉 빠진다. 정말 우리 국회를 뭐로 보고 계시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토로했다. 박 대통령의 ‘내각 중심’ 발언이 곧 이완구 신임 국무총리에게 큰 힘을 실어준 것 아니냐는 해석이 적지 않다.
여의도 정가에선 최근 “판을 뒤집어야 한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청와대에 끌려 다니지 않기 위해선 여당이 야당과 손잡고 청와대를 압박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회는 잘하는데 청와대가 문제라는 의식을 심어줘야 한다는 논리다. 당직을 맡고 있는 한 재선 의원은 이런 말을 들려줬다.
“의원끼리 ‘사실상 지금 여당의 적은 BH 아니냐’는 얘기를 주고 받는다. 이번 정부 들어 잘하는 것은 모두 BH 덕, 정부 덕이고, 못하면 여의도 탓이었다. ‘불어터진 국수’가 이를 증명한다. 그런데 이런 판을 엎기 위해선 여야가 협상 잘하고 협조 잘하면 된다. 양당 지도부가 가까운 사이인 만큼 주위에서 적극적으로 권한다면 판이 바뀔 수도 있다.” 여야 협치, 선거가 없는 해의 역설이 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정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