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젤로바니는 20년간 12편에 이르는 스탈린 선전 영화에 출연, 스탈린 역할만 맡아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왼쪽부터 미하일 젤로바니, 진짜 스탈린, 극 중 스탈린으로 분장한 젤로바니.
1893년 조지아 지역의 유서 깊은 부자 가문에서 태어난 미하일 젤로바니는 1913년 스무 살에 연극 배우가 되었고, 10년 동안 무대에 선 후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영화계에 진출했다. 유명 스타는 아니었지만 착실하게 경력을 쌓아가던 그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는다. 1930년대 소련 영화계는 독재자 스탈린을 선전하고 우상화하는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고, 스탈린을 주인공으로 하는 수많은 영화들이 제작됐다. 오디션은 당 차원에서 이뤄졌는데, 사실 오디션이라기보다는 스탈린의 의중을 묻는 과정이었다. 이때 젤로바니는 스탈린의 억양을 완벽하게 흉내 냈고, 스탈린은 젤로바니에게 “나를 완벽하게 관찰했고,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낙점을 받은 젤로바니가 출연한 영화는 바로 <위대한 새벽>(1938)이었다. 당시 45세였던 그는 볼셰비키 혁명 당시 30대 후반이었던 스탈린을 연기했다.
이후 젤로바니의 배우 인생은 봉인됐다. 1956년에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오로지 영화에서 스탈린 역할만 맡을 수 있었다. <위대한 새벽>부터 그는 12편의 영화를 찍었고, 그 영화에서 모두 스탈린으로 등장했다. 이것은 아직도 기네스북에 올라 있는데, 미하일 젤로바니는 “특정한 역사적 인물을 가장 많은 횟수로 연기한 배우” 항목에 “스탈린 12회”로 기록되어 있다. 그가 이토록 스탈린 역할을 독점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스탈린의 의지였다. 젤로바니는 스탈린과 닮았지만 스탈린보다 몸집이 컸고 훨씬 더 잘생긴 외모의 소유자였다. 즉 젤로바니는 스탈린의 외모 콤플렉스를 완벽하게 메워 주는 존재였고, 스탈린은 자신이 젤로바니의 이미지로 대중에게 영원히 기억되길 원했다. 즉 스탈린은 젤로바니를 통해 어떤 신화적 이미지를 얻길 원했던 것이다.
<위대한 새벽>으로 노동 훈장을 받은 젤로바니는 1941년엔 스탈린상의 수상자가 됐다. 스탈린 캐릭터로 각광을 받은 후 그가 ‘평범한 인간’ 캐릭터를 맡는 건 불가능해진 상태. 그는 다양한 캐릭터를 섭렵하는 일반적인 배우와는 다른, 하나의 캐릭터이자 국영화된 영화산업의 최종 실권자이자 독재자인 스탈린만을 위한 배우였다. 1945년에 2차대전이 끝나자 스탈린에 대한 우상화는 더욱 극심해졌다. 연합군 전체의 승리였지만, 영화 속에선 스탈린만의 승리로 포장했다. <맹세>(1946) <베를린의 몰락>(1950) <잊을 수 없는 1919년>(1951) 등의 영화들에서 드러나는 스탈린의 모습은 신에 가까웠고, 이 역할들을 통해 젤로바니는 스탈린상을 세 번 더 받았으며 1950년엔 인민예술가 칭호를 얻었다. 1953년, 스탈린이 세상을 떠나자 정권을 잡은 흐루시초프는 ‘스탈린 격하 운동’을 벌이면서 젤로바니가 스탈린으로 출연한 모든 영화를 금지시켰다. 그의 마지막 영화인 <적군의 회오리바람>(1953)은 젤로바니가 나온 모든 장면이 삭제됐다. 그는 더 이상 영화에 등장할 수 없었고, 1956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쓸쓸하게 모스크바 극단의 한구석을 지켰다.
펠릭스 다다에프는 메이크업과 타고난 노안 덕에 스탈린으로 완벽히 변신했다. 사진은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노년의 다다에프, 스탈린으로 분장한 다다에프, 진짜 스탈린.
어릴 적부터 스탈린과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그는 2차대전이 터졌을 때 고작 스무 살의 나이였다. 선전대로서 위문 공연을 다니며 저글링과 댄스를 선보였던 그는, 상황이 급박해지자 전선에 투입되었지만 큰 부상을 입고 후방으로 후송된다. 그렇게 1년 동안 병원 신세를 지던 그는 다행히 회복됐는데, 이때 KGB의 전신인 NKVD의 요원들이 그를 찾아와 모스크바로 데려간다. 1943년. 그가 23세 때 일이었다. 젊은 나이였지만 어릴 적부터 무대에 섰던 경험과 메이크업과 타고난 노안 덕에 그는 스탈린으로 완벽하게 변신할 수 있었다. 악명 높은 비밀경찰의 수장인 라브렌티 베리아가 직접 몇 달 동안 트레이닝을 했고, 이후 그는 스탈린 대신 고위 간부들과의 자리에 나가 위엄을 과시했고 대중 집회에 모습을 드러내 손을 흔들었으며, 뉴스 필름을 촬영했다. 공산당의 고위 간부들도 그 앞에선 바짝 긴장할 정도로 싱크로율이 높았다. 가장 큰 미션은 얄타 회담. 전후 세계 정세를 토론하기 위해 영국의 처칠과 미국의 루스벨트와 소련의 스탈린이 모인 자리였는데, 다다에프는 혹시 모를 암살 위협을 따돌리기 위해 투입됐다.
크렘린궁 한 구석의 비밀 지역에 감금되어 살았던 그는 가족이나 친척과 격리된 삶을 살아야 했다. 다다에프 같은 대역이 네 명이나 필요했던 건, 스탈린이 항상 암살의 공포 속에서 살았기 때문. 그의 동선은 엄중한 비밀로, 그가 움직일 때마다 대역들은 일사불란하게 교란 작전에 투입됐다. 하지만 그 대역들이 스탈린을 실제로 만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다다에프는 10년 동안 딱 한 번 스탈린을 접했고, 살짝 웃으며 눈빛을 건넸을 뿐 스탈린은 다다에프에게 말 한 마디 건네지 않았다고 한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