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적으로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그 영화의 에로티시즘’ 코너에 실릴 만한 수준의 영화가 아니다. 홍보 과정에서 과대 포장된 껍데기로 인해 ‘하는 수 없이’ 이 영화를 소개하는 기사를 작성하고 있지만 다시 한 번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 영화는 ‘그 영화의 에로티시즘’에 실릴 수준의 영화가 아니다. 다양한 성적인 표현을 시도했으나 스크린에 담긴 것은 대부분 여성의 얼굴이다. 이 영화는 원작 소설에 실린 다양한 성적인 표현의 절반 이상을 여배우의 표정에 의지하고 있다. 이는 원작 소설에 대한 모독이며, 관객에 대한 몰염치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영어 원제는 <Fifty Shades of Grey>다. E L 제임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무려 1억 부 이상 팔렸을 정도다. 해외에선 ‘엄마들의 포르노’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이 소설은 파격적인 성애 묘사로 유명하다. 특히 사도마조히즘(SM)을 다루는 수위가 어지간한 포르노를 뛰어 넘는 수준이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만큼 영화도 엄청난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지난 2월말까지 기준으로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북미 지역에서만 무려 1억4739만1785달러(한화 1600억여 원)를 벌어 들였으며 57개국에서 개봉해 3억 3840만 달러(한화 3800억여 원)를 벌었다.
반면 한국 극장가에선 기대 이하의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아무래도 원작 소설 자체가 한국 서점가에서 별다른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한 것이 결정적이다. 원작 소설에 열광한 독자들이 자연스레 극장을 찾는 해외와는 다른 분위기일 수밖에 없다.
개봉을 앞두고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측은 대대적인 홍보를 했다. 물론 매우 야한 영화라는 게 홍보의 주요 포인트였다. 원작 소설이 ‘엄마들의 포르노’로 불리며 유명했다는 점, 이를 스크린으로 옮긴 만큼 야하다는 점, 그리고 세계적인 흥행 열풍이 불고 있는 영화라는 점 등이 홍보의 주요 포인트였다.
문제는 영화가 그만큼 야하지 않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 영화의 에로티시즘’ 코너에 실릴 만한 수준의 영화가 아니다. 원작 소설이 그러했듯이 다양한 성애 묘사가 등장하긴 한다. ‘넥타이로 손 묶기’ ‘얼음 활용한 애무’ ‘손으로 엉덩이 때리기’ ‘정식 SM 도구를 활용해 손 묶기’ ‘밧줄로 손 묶기’ ‘눈가리개 활용하기’ ‘깃털을 활용한 애무’ ‘정식 SM 도구를 활용한 때리기’ 등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영화는 전혀 야하진 않다. 다양한 SM 성적 취향이 소재로 활용된 로맨틱 판타지 영화일 뿐이다. 그것도 다소 많이 지루한. 우선 노출 수위가 전체적으로 낮다. 여주인공 다코타 존슨은 가슴이 노출되며 음모도 살짝 나온다. 여주인공 다코타 존슨의 노출 수위만 놓고 보면 대중 상업영화가 허용하는 최대치에 접근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는 내내 노출 수위가 매우 낮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다. 그 이유는 영화에 다양한 성행위 장면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여배우의 노출 장면은 몇 차례 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성행위 장면은 여배우 다코타 존슨의 얼굴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크리스찬 그레이(제이미 도넌 분)의 사도마조히즘(SM) 성행위의 대부분은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아나스타샤 스틸(다코타 존슨 분)의 손을 묶는 장면 정도를 제외한 다른 SM 장면들은 대부분 그레이가 SM 도구를 들고 뭔가를 하려는 장면과 그런 행위로 인해 반응하는 스틸의 다양한 표정만 그려져 있을 뿐이다.
원작 소설에 등장하는 구체적이고 파격적인 성애 묘사를 영화는 오로지 관객의 상상에 맞기고 있다. 영화가 스크린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그로 인한 스틸의 표정뿐이다. 결국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성행위 장면의 절반 이상을 스틸 역할을 맡은 여배우 다코타 존슨의 표정으로만 묘사하고 있다. 이 정도면 관객을 모독하는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노출 수위는 딱 이 홍보용 스틸 사진 수준이다. SM 도구를 든 그레이와 흥분된 표정의 스틸의 승글샷만 반복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야한 영화라는 홍보 내용과 달리 홍보용 스틸 사진 가운데에는 야한 사진이 거의 없다. 그레이가 서랍에서 눈가리개를 꺼내는 장면과 스틸이 눈을 가린 채 뭔가를 느끼는 격렬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진 정도가 그나마 야한 스틸 사진이다. 그리고 실제 이 영화가 보여주는 성행위 장면의 수위 역시 그레이가 SM 도구를 들고 있는 모습과 스틸이 뭔가를 느끼는 얼굴 표정이 전부다.
게다가 뭔가 본격적인 성행위 장면이 나올 듯하면 화면이 바뀌고 이미 성행위를 끝내고 침대 위에 그레이와 스틸이 누워서 쉬는 장면이 나오는 경우도 여러 차례 등장한다. 이는 ‘청불(청소년관람불가) 야한 영화’가 아닌 ‘15세 이상 관람가’ 로맨스 영화에서나 주로 사용하는 방식이다.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야한 영화로 분류할 수 있지만 남성 관객이 아닌 여성 관객을 위한 영화다. 원작 소설부터 엄마들의 포르노로 불릴 만큼 여성 독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작품이다. 내용부터 전형적인 신데렐라 구조의 판타지로 여기에 성적인 요소를 추가했다.
순수한 사회 초년생인 여대생 스틸이 모든 것을 다 가진 매력적인 CEO 그레이를 만난 뒤 그에게 빠져든다. 27세의 갑부 그레이는 말 그대로 백마 탄 왕자다. 자신 소유의 헬기로 스틸에게 시애틀의 야경을 보여주고 졸업 선물로 스포츠카를 안긴다. 게다가 아침마다 애인인 스틸에게 피아노 연주를 들려준다.
이런 완벽남인 그레이는 SM이라는 독특한 성적 취향의 소유자다. 이런 ‘완벽남’ 그레이에게 빠져든 스틸은 그가 원하는 성적 취향인 SM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곤 점차 거부할 수 없는 본능에 눈을 뜨게 된다는 게 이 영화의 주된 스토리다. 평범한 여성이 엄청난 갑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를 통해 본능에 눈을 떠 쾌락의 세계를 접하게 된다는 내용으로 ‘하이틴 소설의 성인 버전’이라는 표현이 적합하지 않나 싶다.
따라서 영화의 성행위 장면 표현 수위 역시 여성 관객의 취향에 맞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남성인 기자가 영화평을 쓰는 터라 감독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여성 관객의 경우 여배우의 노출에 포커스를 두진 않을 터라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보여준 성행위 장면 묘사가 더 야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선 여성의 성적 판타지를 만족시킬 만한 영화다.
그럼에도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성행위 장면을 연출하는 과정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영화로 볼 수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는 있다. 성행위는 대상과 대상의 교류가 중요하다. 그렇지만 이 영화의 성행위 장면 묘사는 가장 중요한 교류가 배제됐다. SM 도구를 들고 있는 남성과 쾌감을 느끼는 여성의 표정만 그려졌을 뿐 둘 사이의 교류에 해당하는 장면은 모두 생략됐다. 그레이와 스틸이 함께 나오는 투샷(two-shot) 장면보다는 도구를 든 그레이의 싱글샷(single shot)과 표정 연기에 집중한 스틸의 싱글샷으로만 성행위 장면을 그려낸 것. 투샷을 최대한 배제하고 싱글샷 위주로 찍은 베드신이라는 얘긴데, 두 배우가 따로따로 찍어도 되는 베드신이라는 의미다. 그야 말로 ‘노른자 없는 달걀’이며 ‘앙꼬 빠진 찐빵’이다.
결국 야한 영화로 과대 포장됐지만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그 영화의 에로티시즘’ 코너에 실릴 만한 수준은 아니다. 따라서 ‘그 영화의 에로티시즘’ 코너의 핵심에 해당되는 ‘베드신/노출 정보’와 ‘에로지수’도 언급하지 않겠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