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규 전 대검 중수부장의 폭로로 그동안 마찰을 빚어왔던 국가정보원과 검찰의 앙금이 수면 위로 드러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사진은 이병기 신임 비서실장(왼쪽)과 우병우 민정수석. 두 사람은 각각 국정원과 검찰을 대표하는 인물로 꼽힌다.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주요 권력기관 인사를 단행한다. 그 중 가장 공을 들이는 자리가 바로 국정원과 검찰 수장이다. 집권 초 국정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선 두 곳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필요성에서다. 과거 몇몇 대통령은 이를 이용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고도 했다. 국정원과 검찰을 정치 보복 수단으로 동원했던 것이다. 이는 국정원과 검찰이 필연적으로 정치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는 배경이기도 하다.
한 전직 검찰총장은 “검찰과 국정원을 쥐고 흔들겠다는 대통령이 일차적인 문제이긴 하다. 그런데 지금 국정원과 검찰은 너무 막강해져서 통제하지 않으면 오히려 대통령이 힘들어질 수 있다. 언제 자신을 향해 비수를 들이댈지 모르는 것 아니냐. 대통령이 믿을 수 있는 최측근을 기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대선 승리 직후부터 국정원장과 검찰총장 인선에 남다른 신경을 쓴 것으로 전해진다. 박근혜 후보 캠프 출신의 한 원로는 “국정원 댓글 사건으로 인해 검찰 수사가 불가피했던 상황이었다. 박근혜 정부 정통성이 걸려있는 사안 아니었느냐. 박 대통령 역시 국정원장과 검찰총장에 친박 성향 인사를 기용해야 한다는 데 고개를 끄덕였던 게 사실”이라고 귀띔했다.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는 박근혜 대통령. 국정원과 검찰이 파워게임을 벌일 경우 집권 3년차 국정 운영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사진제공=청와대
박 대통령은 권영세 전 주중대사 등 친박 정치인을 후보군으로 검토하다 결국 군인 출신의 남재준 전 국정원장을 발탁했다. 검찰총장엔 대표적인 ‘특수통’ 채동욱 전 총장이 추천위원회를 거쳐 임명됐다. 정권 초 국정원에게로 힘이 실리기 시작한 순간이다. 남 전 원장은 2007년 대선후보 경선과 2012년 대선에서 박 대통령을 도운 최측근이다. 반면, 채 전 총장은 친박계가 밀었던 총장 후보군과는 거리가 멀었다. 법조계에서 ‘추천위원회의 반란’이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다.
채 전 총장은 인사청문회에서부터 여권 핵심부의 기대를 저버리는 듯한 스탠스를 취했다. 채 전 총장은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의 중대한 의미를 잘 알고 있다. 관련 태스크포스를 구성하겠다”며 적극적인 수사 의지를 보였다. 실제로 그는 총장 부임 직후 윤석열 전 여주지청장을 팀장으로 하는 특별수사팀을 꾸리며 “사실관계를 명명백백하게 밝히라”고 주문했다. 이 과정에서 국정원은 검찰로부터 압수수색을 당하고 직원 3명이 긴급체포되는 등 자존심을 구겼다.
당시 상황에 대해 국정원 한 관계자는 사석에서 “검찰이 ‘오버’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직원을 체포할 만한 긴급 사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검찰 페이스에 내부적으로 불만 기류가 적지 않았다”고 귀띔했다. 그러나 서울중앙지검 고위 인사는 “채 전 총장이 정권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다보니 채 전 총장이 다소 과하게 수사를 진행했던 부분은 인정한다”면서도 “대통령 힘이 제일 세다는 임기 초반 채 전 총장의 그러한 모습은 검사로서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정원은 검찰을 원망하기 전에 스스로의 과오를 반성해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정치권과 사정당국 인사들은 2013년 5월 원세훈 전 원장 구속을 둘러싼 채 전 총장과 황교안 법무부 장관 충돌을 국정원 대선개입 수사의 분수령으로 꼽는다. 친박 핵심 주변에서 ‘말을 듣지 않는 채 전 총장을 낙마시켜야 한다’는 공감대가 퍼진 것도 이 무렵부터다. 앞서의 원로는 “채 전 총장이 원 전 원장에 대한 선거법 위반 적용이 벽에 부딪히자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를 동원해 별건 수사에 나섰던 것으로 안다. 결국 원 전 원장을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시켜버렸다. 채 전 총장 체제의 검찰을 믿기 힘들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털어놨다.
국정원과 검찰의 힘겨루기 과정에서 옷을 벗은 것으로 해석되는 남재준 전 국정원장(왼쪽)과 채동욱 전 검찰총장.
그로부터 3개월 뒤 채 전 총장은 혼외자 의혹으로 낙마했다. 국정원 대선개입 수사를 원칙대로 밀어붙이다 정권으로부터 괘씸죄를 적용 당했다는 게 정설이다. 여기에도 국정원이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당시 검찰 내부에선 ‘국정원이 채 전 총장을 흠집 내기 위해 혼외자 사건을 파헤쳐 의도적으로 언론에 흘린 것 아니냐’는 얘기가 파다하게 돌았다. 국정원 정보관 송 아무개 씨는 채 전 총장 혼외 아들 개인정보를 건네받은 혐의로 지난해 11월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송 씨는 검찰 조사에서 “식당 화장실에서 우연히 채 전 총장 혼외자 아들 이름과 학교 등을 들었다”는 황당한 진술을 해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이처럼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채 전 총장 혼외자 사건을 놓고 벌인 힘겨루기에서 국정원은 검찰에 ‘판정승’을 거뒀다. 이는 박 대통령이 남재준 전 원장의 국정원에 힘을 실어줬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2013년 8월 검찰의 든든한 ‘우군’이 등장했다. 허태열 전 비서실장 후임으로 임명된 검찰 출신 김기춘 전 실장이다. 김 전 실장은 검찰 주요 보직을 거쳐 총장에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김 전 실장은 부임 후 ‘부통령’으로까지 불리며 최고 실세로 부상했고, 이는 검찰의 입지 강화로 이어졌다. 국정원에게로 쏠렸던 힘의 무게추가 다시 수평으로 맞춰진 것이다. 김 실장 재직 기간 검찰은 ‘대선배’ 엄호 아래 강력한 사정 드라이브를 걸며 박 대통령 국정을 뒷받침한 일등 공신으로 평가받고 있다.
검찰과 국정원은 지난해 3월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증거조작 의혹을 놓고서 맞붙었다. 간첩 혐의로 재판을 받던 유우성 씨 항소심에서 검찰이 제출한 문건이 위조된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공방을 벌였던 것이다. 검찰이 제출한 증거 중 일부는 국정원이 중국 측으로부터 확보했다며 검찰에 건넨 것으로 드러났다.
즉시 진상조사에 착수한 검찰은 또 다시 국정원 압수수색에 나서는 한편, 몇몇 직원을 사법처리했다. 이 과정에서 검찰 수사를 받던 국정원 직원이 자살 시도를 하는 소동도 있었다. 당시 국정원 내에서는 ‘검찰 수사로 대북 휴민트(정보원)가 무너졌다’, ‘검찰이 국정원에 책임을 전가시키려 한다’는 등의 불만이 팽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반면, 검찰은 진상조사 과정에서 국정원이 특정 의도를 갖고 확인되지 않은 정보들을 언론에 흘리며 수사를 방해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국정원은 간첩사건 증거조작으로 인해 대국민 사과를 발표해야만 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유감 표명을 했다. 여야 가릴 것 없이 남 전 원장 사퇴 요구가 봇물을 이뤘다. 그리고 6월 남 전 원장은 중도하차했다. 남 전 원장 뒤를 이어 주일대사를 맡고 있던 이병기 전 원장이 국정원을 이끌었지만 남 전 원장 시절에 비해 그 힘이 다소 약해진 모습이었다. 국정원보다는 김 전 실장 후원을 받던 검찰에게로 힘이 쏠렸던 것이다. 대선개입 및 채 전 총장 사건 당시 국정원에 밀렸던 검찰로서는 반격에 성공한 셈이다.
박 대통령 임기 3년차를 맞아 국정원과 검찰 간 관계는 재편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김 전 실장이 물러나고 이병기 전 원장이 그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다시 ‘국정원 시대’가 오는 것 아니냐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이런 가운데 불거진 이인규 전 중수부장 폭로로 양측 내부는 묘한 긴장감이 돌고 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대립각을 세워왔던 국정원과 검찰이 또다시 충돌할 수 있다는 얘기다.
특히 국정원장 출신 이병기 실장 역할이 관전 포인트다. 여기에 맞서 청와대 내에서 ‘포스트 김기춘’으로 거론되는 검찰 출신 우병우 민정수석이 어떤 스탠스를 취할지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각각 국정원과 검찰을 대표하는 인물이 청와대 내 요직을 맡고 있다는 점에 포커스가 맞춰질 경우 둘 사이의 힘겨루기는 정권 차원 문제로 확대될 수 있다.
새누리당의 한 친박 중진 의원은 “이인규 전 중수부장 발언으로 국정원과 검찰 관계는 악화될 수밖에 없다. 이 전 중수부장은 과거 우병우 민정수석의 상관이었다. 반면 이병기 실장은 아무래도 국정원 편 아니겠느냐. 박 대통령 코앞에서 최측근들이 갈등을 빚는 사태가 올 수 있다. 이는 고스란히 박 대통령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우려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