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종 씨가 5일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들것에 실린 채 “전쟁훈련 반대한다, 키리졸브 중단하라”고 외치며 병원으로 이송되고 있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박원순 시장의 신촌 교통정책에 반대하는 내용을 담은 김 씨 블로그 이미지.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김기종 씨가 제도권에 진입하기 시작한 시점은 김대중 정부 때로 2001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의 자문위원에 이름을 올렸다. 이듬해인 2002년부터는 통일부 통일교육위원으로 활동했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6년부터 2007년까지는 ‘민족화합운동연합’이라는 단체를 통해 총 8회 방북하기도 했다. 개성에 나무를 심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2006년에는 돌연 본적을 독도로 옮기고 ‘독도지킴이’로도 활동했다.
성균관대 법학과 80학번인 김기종 씨는 386세대라는 용어를 만들어 낸 ‘열린공간30’의 회원이기도 했다. <신동아>는 2003년 12월호에 김 씨를 열린공간30에서 활동한 문화운동가로 소개하면서 “노래방과 술집이 즐비한 신촌에 자리 잡은 ‘우리마당’은 막 우리 문화에 눈 뜬 대학생들에게 단소, 판소리, 풍물, 대금, 대동놀이, 마당극, 마당굿 등을 보급했다. 또 1980년대 운동권들의 은신처이자 전대협, 인의협, 건치, 한총련 등이 ‘거사’를 모의한 장소”라고 전했다. 이어 “김기종 씨는 1993년 신촌 우리마당에 ‘새터주민교실’을 열었는데, 이때 노무현 변호사가 생활법률강좌를 맡았다”고 덧붙였다.
그렇다고 김 씨가 노무현 정부 인사 및 386세대로부터 환영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김 씨는 참여정부 때인 2007년 ‘우리마당 습격 사건(1988년 우리마당 사무실을 괴한 4명이 습격해 안에 있던 여성을 성폭행하고 달아난 사건)’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던 도중 분신을 시도해 전신에 심각한 화상을 입었다. 당시 노무현 정부 인사들은 김 씨의 극단적인 성향을 지극히 부담스러워 했다고 한다.
박원순 서울시장 역시 김 씨와의 발 빠른 관계 청산으로 한숨 돌린 경우다. 김 씨는 지난해 2월 자신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박원순-당신을 고발한다’는 제목으로 연세로 대중교통전용지구 관련 시정을 비판하는 내용의 장문의 글을 남겼다. 그는 해당 글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1995년 봄, 안국동 참여연대에서 당신과 대화했던 것이 생각난다. 당시 우리마당의 살림이 참여연대 사무실에 있었다”며 우리마당 내 인권모임인 ‘작은권리를 지키는 사람들’에 입회하면서 관계를 맺었다고 서술했다.
그는 대학 후배인 기동민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에 관해서도 “대학 시절 우리마당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당신에게 학창시절 신촌문화를 위해 활동하도록 역할 맡겼던 적도 있었다”고 주장했다. 김 씨는 이 같은 글을 여기저기 올리며 면담을 요청했지만 박 시장 측은 대꾸하지 않았다고 한다. 급기야 김 씨는 같은 달 박원순 서울시장이 초청된 한 강연회에서 난동을 부려 벌금형을 받았다. 이후 서울시는 그를 요주의 인물로 관리해왔다.
김기종 씨가 2010년 7월 주한 일본 대사에게 시멘트 조각을 던진 뒤 끌려가고 있다. SBS 뉴스 캡처.
당시 1심 판결을 변론했던 박찬종 변호사는 “그때는 일본에서의 반한 시위 등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 리퍼트 대사 사건은 그때와는 다르다”라고 밝혔다. 당시 박찬종 변호사에 변론을 요청했던 김기백 <민족신문> 대표 역시 “김 씨가 그토록 극단적 반미성향이 잠재되어 있을 줄은 전혀 몰랐고, 이번처럼 흉기로 명백한 테러를 자행한 사건이었다면 무료 변론을 부탁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밝혔다.
갈수록 외골수로 빠져든 김 씨는 경제적 파탄과 정신건강 문제까지 겹치면서 더욱 극단적인 반일·반미 활동에 몰입했다.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했지만 지난해 강제 해산된 통합진보당에서만큼은 예외였다. 김 씨는 통진당원은 아니었지만 당에 속해있던 ‘전쟁반대 평화실현 국민행동’ 등에서 활동하며 적극적으로 연대해 왔다.
실제 김 씨의 페이스북 ‘좋아요(공감 버튼)’ 목록을 살펴보면, 통진당을 비롯해 민권연대, 주권방송, 한대련 등 진보 성향의 단체가 눈에 띈다. 그밖에도 반 박근혜, 대통령을 도둑맞은 나라, 유신독재와의 사생결단과 같이 현 정권에 비판적이거나 부정하는 단체나 커뮤니티 페이지도 들어있다. 그의 페이스북 계정은 리퍼트 대사 피습 사건 직후 폐쇄된 상태다.
그는 리퍼트 대사를 습격하기 직전에 올린 글에서는 자신이 그동안 “외교관 폭력범으로 낙인찍혔다”면서 “2년刑(형) 집행유예 3년 기간 동안, 소중한 일을 해냈다. 2013년 ‘독도’를 ‘리앙쿠르암초’, ‘동해’를 ‘일본해(동해)’로 표기한 ‘문화재청’의 잘못된 지도 바로잡는 커다란 일 해내었다”라며 당시 폭력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자신을 외면한 시민사회단체에 대한 염증도 나타났다. 김 씨는 동북아역사재단으로부터 자신의 독도지킴이 관련 지원 요청이 거절된 일을 거론하면서 “일반 시민단체들에게도 경고 주겠다. 예전 군사정권 시절보다 더욱 심하게 짜고서 나눠먹는 습성들이 (중략) 문민정부가 싹 틔웠고 국민정부는 아예 서로 양해 구했고, 참여정부는 절정 이루었다”라고 비판했다. 그의 그릇된 분노는 정권과 이념을 가리지 않았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