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규 서울변협 회장은 임기 동안 공적 기능을 확대해 변호사 단체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해소하겠다고 밝혔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지난 1월, 서울변협 회장 선거에서 압도적 득표율(37.1%, 2위 득표율 22.9%)로 당선됐다.
“나도 의문이다. 박빙 아니면, 어렵다고 생각했다. 냉정히 봤을 때, 변호사 단체장들의 후보자들 대부분이 서울대 출신이다. 역대 서울변협 회장단 중에서도 서울대·연세대·고려대를 제외하곤 3명 정도밖에 없었다. 유권자들 학벌도 마찬가지였고, 내 동문은 한 명도 없었다. 다만 난 지난 2년간 전임 지도부에서 부회장을 역임했다. 내 추측은 유권자들이 전임 집행부에 대해 ‘무난했다’고 생각한 것 같다. 물론 이는 그저 내 생각이고 분석일 뿐이다.”
―변호사법 위반 사범 단속과 사법시험 존치를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임기 동안 가장 중점적으로 해 나가야 할 부분이다. 서울변협 홈페이지에 변호사들을 대상으로 변호사법 위반을 신고할 수 있는 별도의 배너를 만들었다. 이는 그저 변호사들의 문제가 아닌 공적인 부분이다. 예를 들자면 브로커 문제다. 외부에선 로비스트라 칭하지만, 이는 미화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브로커들은 입증되지 않은 전관예우 등 이야기를 팔아먹고 중간에서 거액을 챙긴다. 브로커들 때문에 일부 변호사들의 수임료가 턱 없이 높아진다. 그럼 국민들은 변호사들에 불신이 생길 수밖에 없다. 또한 사법시험 제도 자체가 나도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우리사회가 공정성과 투명성이 많이 훼손됐다. 법률가가 될 때 학벌, 나이, 경제력, 성별 이런 것이 배제되고 누구나 될 수 있어야 한다. 최소한의 기회는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의 로스쿨 제도만으로는 그것이 어렵다. 로스쿨만 있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판사 할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로스쿨 출신 법조인들은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다. 특히 법조계 내부의 계층화 문제가 화두다.
“그렇게 보자면, 다른 조직도 비슷하지 않나. 군대도 육사와 학군단, 3군이 있다. 경찰도 경찰대 출신과 간부시험, 순경 출신으로 충원 경로가 다양하다. 지금은 로스쿨 출신 법조인이 적지만, 10년이 지나면 많이 생긴다. 상호간 경쟁이 가능하다. 결국 서로 공부 열심히 하고, 낮은 자세로 서비스 제공하고, 판례를 많이 만들면 된다. 또 이미 로스쿨 자체에서 계층화가 시작됐고, 학벌주의만 남았다. 지금 서울대 로스쿨 출신 아니면 판검사 임용도, 로펌 채용도 어렵다. 차라리 사시 출신과 로스쿨 출신 간 상호 경쟁과 견제 및 감시를 통해 발전하는 게 맞다.”
―이전에는 법조인을 단 한 명도 배출한 적 없는 비주류 대학(가천대 법대 90학번) 출신이다. 그것도 삼수생이라고 들었다. 고교 시절은 어땠나.
“반 60명 중에서 40~50등 한 것 같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지 않나. 공부 잘한다는 1~10등은 소수고, 나머지가 대다수다. 공부 못한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그저 평범한 거다. 1~2등 하는 애들이 존경스럽고 경이롭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교사였지만, 장남인 내게도 공부하란 말씀 안 하셨다. 난 학창시절, 공부만 못했을 뿐, 술·담배는 하지도 않았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읽고 싶은 책은 교과목과 상관없이 많이 읽었다는 점이다.”
―갑자기 왜 법조인의 길을 가게 된 건가.
“삼수를 해서 가천대(당시 경원대) 법대에 입학한 것도 그저 내 학력고사 점수에 맞춰 간 것이다. 사시를 준비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당시 사회적 분위기다. 내가 학교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흉흉한 시절이었다. 광주항쟁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주된 화젯거리였다. 리영희 교수님의 책은 필독서였다. 자연스레 나도 우리 사회에 대해 어떤 식으로 기여를 할까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역시 사회가 사람을 평가하는 선입견적 시각이다. 최소한 내가 사시에 붙으면 사람들이 내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1학년 겨울방학부터 사시준비를 시작했다.”
―고시생 시절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려웠다고 들었다.
“이전엔 평범한 집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퇴직하시고 IMF를 전후해 사업이 잘 안 풀렸다. 결국 보증금 1000만 원짜리 월세로 이사 갔다. 어쩔 수 없이 고시원 총무, 고시식당 등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한 달에 30만 원씩은 벌었다. 경제적 부분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 뭐가 가장 어려웠나.
“시험에서 계속 떨어지다 보니, ‘과연 내가 붙을 수 있을까, 내 공부 방법이 맞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더라. 10년 동안 공부를 해도 내 대학 동문들은 한 명도 붙지 못했다. 다 좋은 대학 친구들이 붙어서 고시촌을 나가니 불안해 지더라. 만약 내 동문 선배가 단 한 명이라도 사시에 붙었다면, 그렇게 불안하지 않았을 것이다. 잠잘 때도 그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럼에도 어떻게 공부를 계속했나.
“1995년에 어머니가 사고로 돌아가셨다. 나와 함께 길을 가고 있는데 트럭에 치였다. 지금도 그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내가 사시를 한다고 했을 때, 친인척은 물론 가장 가까운 친구들까지도 절대 붙을 거라고 생각 안했다. ‘네가 드디어 인생의 방향을 잡았다’고 유일하게 격려해준 분이 어머니다. 그런 어머니의 죽음이 결국 절실함과 절박함의 원동력이 됐다.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나 중간에 포기했을 것이다. 또 어차피 나이가 삼십을 넘으니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당시는 공무원 시험도 나이제한이 있었으니. 대안도 없었다.”
지난해 11월 1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희망의 사다리, 사법시험 존치의 필요성’ 토론회에 참석한 김한규 회장(왼쪽 두번째). 연합뉴스
―2004년 합격했을 당시 어떤 기분이었나.
“그 때 고시식당에서 일하고 있었다. 식당일은 돈도 주고 밥도 해결해 줬다. 어차피 안 될 것 같아서 내년에도 계속 일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책방에 공고가 붙었다. 내 이름이 있더라. 그저 다행이란 생각밖에 안 들었다. IMF 때 어려워지고 7~8년을 그렇게 산 것이다. 이후엔 연수원에 들어가자마자 대출을 통해 아버지 빚을 해결했다. 그 빚은 2년 전에야 다 갚았다(웃음).”
―영화 <변호인>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동료들 사이에서 무시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비주류 출신 변호사로서 소외나 차별은 없었나.
“선거에 나와서 좀 느껴지더라. 한 명문대 동문들은 서로의 조직을 통해 말이 오갔지만, 난 아는 사람 자체가 한계가 있었다. 물론 이것은 나 혼자 느낌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더 심했을 것이다. 그때는 변호사가 1000명 남짓에 불과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았을까 싶을 정도로 상상이 안 간다.”
―현안 얘기를 해보자. ‘김영란법’이 결국 국회서 통과됐다. 내년 9월부터 시행 예정이지만, 벌써부터 과잉입법 논란에 휩싸였다. 특히 그 대상에 민간부분인 언론인을 포함해 논란을 자아내고 있는데.
“물론 언론인을 그 대상에 포함하는 것이 당초 취지는 아니다. 하지만 해당 법 자체가 우리 사회의 부정과 청탁을 배격하는 것이 목적이다. 난 언론인이야 말로 공직자나 다름없다고 본다. 언론은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공적 기능을 하고 있다. 위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와 같은 변호사단체 단체장과 일부 권력화된 시민단체 등으로 그 대상을 넓혀야 한다고 본다.”
―과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담당 검사였던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에 대해 반대 성명을 냈다.
“그 분이 아무리 인격적으로 뛰어나도 1980년대 현장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난 대법관 자격 없다고 본다. 그 분은 어찌됐건 인권유린 은폐에 관여한 것이다.”
―지난해 11월, 공연음란죄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김수창 전 제주지검장의 변호사 등록에 대해 유보 의사를 표했다.
“시기상조다. 물론 그 분이 죽을죄를 진 것은 아니지만, 부적절한 처신으로 검사 자리에서 나왔다. 감기도 1~2개월 치료 받을 때가 있다. 현재 김 전 지검장이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 아직 자숙과 치료가 더 필요하다. 만약 김 전 지검장이 등록을 신청한다면, 당분간은 유보할 생각이다.”
―퇴임 후 어떤 회장으로 기억되고 싶나.
“사실 변호사 단체에 대한 국민들의 생각이 좋지 않다. 그저 내부의 이익만을 쫓는 이미지가 강하지 않나. 임기 동안 공적 기능을 확대해 국민들이 갖는 불신을 조금이나마 희석하고 싶다. 앞서의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반대성명에 동참한 것도 그런 부분이다. 이제 인권유린 현장이 있다면 우리가 적극 나가겠다. 현재 공익 소송을 담당하는 변호사들에게도 회비 면제와 별관 사무실 대여 등 지원 사업을 하고 있다.”
―벌써 정치권에서도 영입설이 돌고 있다. 정치권엔 뜻이 없나.
“그것은 있다. 만났던 사람들이 나를 부정적으로 보진 않는다. 왜. 속된 말로 적어도 난 ‘구라(거짓말)’는 치지 않으니까. 부회장으로 일할 때는 회장 생각 없었다. 하다 보니 욕심이 생긴 것이다. 지금 회장으로 열심히 일하다보면 후에 기회가 올지는 모르겠다. 모든 것은 오픈돼 있다. 다만 내가 무언가를 나서서할 생각은 없다. (정치도) 연애처럼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