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우리가 진정 무릎을 꿇고 입을 맞추는 건 권력이 아니라 별, 내면의 신성이라는 것. 길가메시는 그 꿈을 꾸고 나서 삶의 지향성이 완전히 바뀌었을 것이다. 그는 열정과 권력으로 살았던 삶을 진심으로 내려놓을 수 있게 됐을 것이다. 자꾸 영토를 넓히고 권력을 강화해갔던 왕에서 내면의 별을 찾는 수행자 인간으로.
길가메시의 꿈은 일종의 회심이겠다. 왕이면, 영웅이면 그 권력 가지고 가는가. 재벌이면 그 돈, 가지고 가나. 돈, 명예, 인기, 권력, 좋다. 그렇지만 성찰 없이 자꾸 그런 것들에 길들여지다 보면 젊은 날 ‘나’의 힘이었던 것이 바로 내면화를 방해하는 짐이 된다.
서점에 가보면 “내려놓으라”고 권하는 책들이 참 많다. 내가 보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내려놓을 수 있을까. 내가 사랑하고 집착하고 쌓아놓은 그것 이상의 힘을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하면 내려놓을 수 없다. 그건 내려놓는 게 아니라 빼앗기는 것이므로. 내려놓을 수 없는데, 내려놓아야 한다고 내려놓게 해달라고 기도만 하는 건 죄책감을 키우고 강박증을 키우는 데는 좋은 방법이다. 니체식으로 말하면 노예도덕에 길들어지는 방법이다.
내려놓는다는 건 말로 되는 게 아니다. 우리가 내려놓으라는 말을 몰라서 내려놓지 못하는 게 아닐 테니까. 삶을 충분히 살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고,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 내려놓을 수도 없고, 자연스레 힘을 빼며 살 수도 없다.
그런데 그것을 아는가. 내가 무엇을 내려놓을 수 없는지, 나는 무엇을 미워하고 무엇에 분노하며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어디서 무기력하고 어디서 다치는지, 그걸 알고 느끼고 돌보기 시작하는 일이 내 마음의 신성으로 인도하는 에너지가 된다는 것을. 그것이 바로 그림자 인지하기다.
착한 줄 알았던 내가 그토록 화가 많은 사람이었다니, 멀쩡한 줄 알았던 내가 그토록 충동적이었더니, 따뜻한 줄 알았던 내가 이렇게 잔인한 사람이었다니, 고상한 줄 알았던 내가 그토록 파괴적이었다니, 이렇게 ‘나’에게 놀란 적이 없나.
그럴 때 나의 불안에, 분노에, 화에 집중해보자. 일종의 자각이다. 화가 난 나를 자각하고 나면, 화에 끌려 다니지 않고 화에 집중할 수 있다. 불안한 나를 자각하고 나면 내 불안에 휘둘리지 않고 불안이 지시하는 것을 찾아갈 수 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그 누구도 내 마음에 족쇄를 채울 수 없음을, 내 마음의 족쇄를 채우는 존재는 나 자신이었음을 알게 된다. 우리가 남과 소통하지 못하는 건 결국 자기 마음과 소통하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