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근처에 직장이 있었던 필자는 거리에서나 음식점에서 역대 주한 미국대사들과 마주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혼자 산책을 하거나 직원들과 개방된 공간에서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그런 모습을 볼 때 필자는 대한민국이 안전한 나라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국내외 반미세력에게 미국대사의 동선이 노출돼도 괜찮을까하는 염려가 없지 않았다.
지난해 10월 30일 부임한 리퍼트 대사는 부임 후 태어난 아들 이름을 국내의 작명가에게 의뢰해 ‘세준’이라고 지었을 정도로 다른 어느 미국대사보다 한국민과의 접촉을 활발히 했다. 사건 후 이른 아침 광화문에서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대사를 봤다는 얘기를 주변에서 많이 들었다. 그가 김 씨 같은 극단세력도 초청되는 민화협 강연에 강사로 나선 것도 그 같은 폭넓은 친한(親韓)행보의 일환이었을 것이나, 초청장을 본 순간 칼을 준비한 사람도 있었다.
김 씨 테러 이후 북한이 보인 반응은 예상했던 대로 망동 수준이다. <조선중앙통신>이 사건 당일 ‘정의의 칼 세례’라고 하더니, 조평통이란 단체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비유하고, ‘우리민족끼리’라는 웹사이트는 ‘명줄을 끊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치 김 씨가 그렇게 했어야 했거나 자기들이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처럼.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것이 있다. 북한의 대미 테러는 언어 테러라는 점이다. 요즘도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원숭이’에 비유하거나, 걸핏하면 ‘핵미사일로 백악관과 펜타곤을 날려버리겠다’고 협박한다.
과거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과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등의 대미 도발이 있었지만 군사적인 도발이었고,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는 지구상 어디에서도 없었다. 북한에 입국한 미국인을 간첩 혐의로 억류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북한의 미국에 대한 테러가 언어폭력에 그치고 있는 것은 일차적으로 증거가 잡혔을 때 미국의 보복이 두렵다는 얘기다.
이와는 달리 남한에 간첩을 남파해 저지르던 테러가 2000년대 이후 뜸해지긴 했으나 천안함 폭침이나 연평도 포격처럼 군사적 도발은 여전하다. 북한의 대남 도발이 계속되는 것은 한국의 보복을 미국의 보복만큼 두렵지 않게 여기고 있는 데다, 천안함 폭침조차 남한의 조작이라고 그들 주장에 동조하는 세력이 우리 내부에 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이 김기종이 아니라 잘 무장된 남파간첩의 소행이었고, 피해가 더 치명적이었고 범인이 도주했거나 자살했을 경우, 대한민국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를 역이용해 자유를 파괴하려는 세력의 망동에 경각심을 가져야 할 때다.
임종건 언론인·전 서울경제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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