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나주 초등생 성폭생 사건의 피해자 어머니는 언론이 자신을 게임 중독자로 몰고 갔다며 울분을 토로했다. 성폭행범 고종석 씨가 2012년 9월 1일 새벽 나주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뒤 입감을 위해 고개를 숙인채 이송되는 모습. 연합뉴스
─실종신고 당시 경찰이 고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들었다.
“경찰서에서 당한 수치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처음 아이를 잃어버렸다고 나주경찰서에 실종신고를 했더니 형사가 집으로 찾아와 ‘아이가 없어진 게 언제냐’고 물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갑자기 기억이 안 났다. PC방에 다녀왔다는 말을 했을 때부터 경찰의 반응이 이상했던 것 같다. PC방에 다녀와서 막내의 기저귀를 갈아줄 때 은진이가 분명 자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확한 시간을 기억하지 못하자 형사는 말을 번복한다며 ‘아이, 지금 어디 있어요’라고 다그치기 시작했다. 또 ‘집에 빚이 얼마예요’라면서 질문이 점점 바뀌었다. 너무 황당했다.”
─경찰이 엄마를 의심했다는 말인가.
“실랑이를 벌이다 아이를 같이 찾자며 나를 경찰차에 태웠다. 하지만 TV에 나올 법한 경찰서 안의 ‘쪼그만’ 방으로 데려갔다. 정말 무서웠다. 그때 놔두고 온 옷을 아직도 못 찾았다. 형사가 종이 한 장을 주더니 ‘엄마의 행적’을 쓰라고 했다. 애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신문을 받으니 당황해 쓰지 못했다. 그러자 휴대 전화를 가져갔다. ‘혹시 뭘 지웠나’ 하고 의심했던 거다. 애기 아빠 것도 가져갔다. 나주경찰서에서 사건을 브리핑한 사람은 계속 차에서 ‘엄마, 솔직하니 털어놔요, 빨리 얘기해요’라고 말했다. 심지어 어떤 형사는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애XX는 뭐 하러 넷이나 낳았느냐’고 망신까지 줬다.”
─경찰이 그 이후에는 어떻게 했나.
“형사는 집요하게 ‘돈을 요구하려고 아이를 숨긴 것 아니냐’고 물었다. 그래서 ‘우리 새끼들 데려가서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하겠느냐’고 따졌다. 지금도 어이가 없다. 한 시간쯤 흘렀을까. 여형사가 방 안으로 들어와서 아이를 찾았다고 했다. 곧바로 영산포 병원으로 갔다. 가는 동안 경찰들한테 ‘우리 애 죽었어요, 살았어요’라고 물어봤는데 어느 누구도 생사 여부를 알려주지 않았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당시 ‘고종석 성폭행 사건’ 수사팀에 속했던 나주경찰서 강력반의 형사는 어머니의 이같은 주장에 대해 “그날 우산도 소용없을 정도로 비가 많이 와서 현장이 혼란스러웠다. 서장님까지 오셔서 관내 형사들이 피해 아동의 집으로 전부 출동한 상태였다. 조 씨를 수사하고 경찰서에서 신문한 점은 인정한다. 다만, 실종사건에서 아이와 밀접한 관계인 어머니의 진술이 중요한데, 조 씨가 진술을 번복한다는 느낌을 받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고압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거친 언사도 사용하지 않았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해명했다.
─은진이가 병원에서 오랫동안 방치됐다고 들었다.
“영산포에서 아이 수술을 못한다고 해서 나주병원으로 옮겼다. 그런데 전남·목포 해바라기 아동센터 사람이 찾아와서 무작정 ‘어머니, 빨리 전남대로 옮기세요’라고 했다. 그래서 ‘여기서 수술이 가능한데 왜 옮겨야 하느냐’고 따졌다. 아이가 많이 아파하니까 나주에서 수술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이 여자는 계속 전남대 병원으로 옮기자고 했다. 담당 산부인과 선생님까지 ‘저쪽에서 자꾸 전남대로 옮기기를 원한다’며 곤혹스러워 했다. 어처구니가 없어 ‘선생님, 제가 동의서를 썼잖아요. 수술 가능하다면서요. 아이부터 고쳐야죠’라고 큰 소리를 쳤다. 애는 아파 죽어 가는데 자꾸 시간이 갔다. 결국 무려 4시간 넘게 애가 방치됐다. 경찰이 휴대전화를 가져가서 지인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애들한테 연락하기도 힘들었다. 아이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다. 결국 나주서 수술시켰다.”
─언론 때문에 피해를 겪었다고 들었다.
“병원마다 여기도 기자가 숨어있고 저기도 기자가 숨어있고 계단마다 숨어있었다. 처음에는 ‘뭐하는 사람들이지’ 그러고 말았다. 그런데 어떤 여형사가 기자를 데리고 와서 ‘어머니 이분이 기잔데, 인터뷰 좀 해주세요’라고 했다. ‘저기 애가 아픈데, 무슨 인터뷰냐’고 한바탕했다. 또 형사가 오더니 ‘내가 말해도 도저히 안 되니까, 엄마가 가서 찍지 말라고 한 마디 하세요’라고 해서 뭣도 모르고 좀 찍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랬더니 ‘뭘 잘났다고 저렇게 소리를 지르냐’고 보도됐다. 이후 병실로 들어왔는데 어떤 여자가 쑥 들어왔다. 애기가 수술해서 누워있는데도 그냥 쑥 병실로 들어와서 무조건 ‘안녕하세요 어디 기잔데요’라고 했다. 정말 화났던 일은 (울먹이며) 아이가 아파서 누워 있을 때 어떤 언론사는 ‘아가야, 여기 좀 올려봐, 여기 좀 보자’고 했다. 그렇게 수치를 당하고 힘들었던 아이한테 ‘옷 좀 올려봐, 이것 좀 찍자’고 했다. 애가 의식이 있는데 시켰다. 피투성이가 된 아이 얼굴이 유튜브에 그대로 올라왔다. 나는 똑같은 놈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은진이 상태는 어땠나.
“입원 이후 점점 복수가 차올랐다. 밤새 배를 움켜잡고 날을 샐 정도였다. 은진이의 항문을 임시로 아랫배 쪽으로 뺐는데 그 부분을 너무 조여서 그런 거다. 결국 몇 번이나 생사를 오갔다. 6개월이 흘러 겨우 학교에 갔을 때도 두 세 번 장 유착이 와서 자주 결석했다.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다.”
─벌써 2년이 흘렀다. 은진이가 고종석에 대해 새롭게 기억한 내용이 있나.
“커가면서 기억이 더 생생해졌다. 최근엔 ‘엄마, 그때 아저씨가 나 데리고 갔을 때 앞에 아줌마가 지나갔어. 근데 왜 그 아줌마는 나를 안 구해줬을까…’라며 섭섭해 했다. 또 ‘엄마, 아저씨가 나를 딱 밀었을 때 벽돌에 머리를 부딪쳤어. 엄마 거기 벽돌 있는 거 알지’라며 그때 자기가 죽는 줄 알았다고 했다. 아빠 엄마 모습이 필름처럼 지나가는데 깨어 보니까 그 아저씨가 자기 목을 조르고 있었다고….”
─은진이가 평소 사건 얘기를 많이 한다고 들었다.
“힘이 없어서 당했다는 생각에 힘 센 사람한테 제압당하면 짜증이 심하다. 특히 우리 막내하고 싸울 때 자기가 좀 밀린다고 생각하면 그런다. 또 비가 오면 더 심해진다. ‘헤까닥’ 돈 애처럼 보일 정도다. 이럴 때는 문을 잠그고 나랑 단 둘이 대화한다. 우리는 고종석을 ‘찌질이’라고 부른다. 근데 어느 날 은진이가 ‘엄마, 그 찌질이는 감옥에서 손발이 꽁꽁 묶여서 매일 맞고 있을 거 아냐’라면서 ‘그래도 하루는 풀어주라’고 했다. 많이 아파할 거라고…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
─첫째와 둘째도 충격을 받았다는데.
“큰 아이의 학교 선생님을 찾았더니 공부를 많이 못 따라 온다고 했다. 검사했더니 지능 지수가 너무 낮았다. 원래 그랬던 아이는 아니었는데 결국 지적장애 3급 판정을 받았다. 둘째 아들도 당시 은진이를 찾으러 하루 종일 빗속을 돌아다녔다. 그 충격 때문인지 지능이 점점 떨어졌다. (장애인 복지 카드를 내밀며) 이런 카드도 처음 받아봤다. 해바라기 센터는 장애 원인이 ‘미상’이라며 상담 치료 지원도 끊어버렸다.”
─자신도 모르게 ‘아동 방치 부모’로 등록됐을 때의 심정은.
“억울해 미치는 줄 알았다. 2012년 6월, 드림스타트(빈곤가정지원단체)를 찾아가 ‘우리 애들이 굶어 죽겠으니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그 이후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시청, 동사무소 사람들이 줄줄이 찾아왔지만 애들한테 도움이 안 됐다. 그래서 시청에 ‘월세방을 얻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고 하니까 ‘임대주택을 들어가려면 300만 원이 필요하다’고 해서 인천으로 갔다. 두 달 동안 지인이 운영하는 족발집에서 일하면서 애들이랑 연락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내가 그 쪽에서 전화할 때 몇 번 정도 전화를 안 받았다고 ‘방치엄마’ 등록을 했다. 사건이 터지자 초록우산이 안 그래도 우리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면서 나를 ‘나쁜 엄마’로 몰아갔다. 결국 이것 때문에 은진이에 대한 지원을 받으려면 수십 장의 계약서를 써야 했다. 계약서에는 항상 조건이 붙었다. 결국 지난해, 초록우산이 ‘어머니, 나쁜 엄마 등록 다 취소됐다’며 뒤늦게 사과했다.”
─당시 엄마가 게임하다가 아이를 방치했다는 비난이 일었다.
“그 날 게임을 한 것은 맞지만 내가 ‘게임 중독자’는 아니다. 우리 부부가 이전부터 빚이 있었다. 남편은 변변한 직장이 없어 더 생활이 어려웠다. 아이들이 학교 가고 남편이 집을 비우면 혼자서 그 업자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갈 데가 없어 항상 피신하는 데가 거기였다. 그래도 애들을 방치한다거나 밥을 안 준다거나 학교를 안 보냈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15년 동안 4남매 모두 제왕절개로 낳아 빨래, 설거지, 청소, 막내의 기저귀까지 갈면서 이를 악물고 키웠다. 지금 사는 아파트도 당시 모인 성금으로 계약한 거다. 나도, 애기 아빠도 은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못 찾게 만들어 놨다. 아이들이 살 수 있는 공간이 제일 중요해서 그렇게 만들었다.”
조 씨는 재판 과정에서 자신이 PC방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그런 사건이 터진 것 자체에 대해 심한 죄책감을 느낀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이유 하나만으로 다른 사실들까지 왜곡되는 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 듯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당시 아이를 치료하느라 인터뷰를 전혀 하지 않았다. 아니, 왜 해야 하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애기 아빠가 정신적으로 흔들리는 상황에서 나마저 쓰러지면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TV에서 인터뷰했던 사람은 오히려 나보다 고종석의 지인이 많았다. 원래 고종석은 나주에서 오래 살았다. 그 사람들이 인터뷰를 하면서 은연중에 내 탓을 했다. 또 내가 나주 사람인 줄 아는데 서울에서 태어나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녔다. 고향도 면목동이다. 아무 말도 안하고 있었더니 결국 내게 돌아온 것은 ‘나쁜 엄마’라는 낙인이었다. 판사님한테도 ‘우리가 이렇게 가난하지 않았다면 경찰, 언론, 동네 사람들이 함부로 했겠느냐’고 울부짖었다. 요즘도 은진이는 ‘엄마, 엄마는 나쁜 사람이 아닌데 사람들은 왜 그렇게 엄마를 싫어할까’라고 한다. 솔직히 나는 우리 ‘새끼’들 때문에 산다. 누가 뭐래도 이걸 자식들이 알아주니까 만족한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
최선재 인턴기자
나주 성폭행 사건은? 일곱 살배기를 납치 성폭행 전라남도 나주에서 벌어진 납치 강간 사건이다. 지난 2012년 8월 30일 새벽 1시 30분, 고종석(26)이 문이 잠기지 않은 가정집에 침입했다. 거실에서 자고 있던 7세 아이를 이불째로 납치해 피해 아동의 집에서 300m 떨어진 영산대교 밑으로 끌고 가서 성폭행했다. 고종석은 자신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다고 생각해 아이의 목을 졸라 살해하려고 했다. 아이가 의식을 잃자 죽은 줄 알고 도망쳤다. 당일 오전 7시 30분, 나주경찰서는 어머니의 실종신고를 받고 수색에 나섰고 영산대교 사거리에서 쓰러져 있는 아이를 발견했다. 아이가 납치됐을 당시 아버지는 술에 취한 채 자고 있었고 어머니 조 아무개 씨(40)는 PC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어 아동을 방치했다는 논란이 일었다. 경찰은 조 씨가 PC방에서 고종석을 봤다는 진술을 토대로 탐문 수사를 벌였다. 결국 다음날 오후 1시 25분, 고종석은 순천의 한 PC방에서 검거됐다. 지난해 2월, 대법원은 고종석에 대해 무기징역 및 전자발찌 부착 30년, 정보공개 10년, 성충동 약물치료(일명 화학적 거세) 5년을 선고했다. 고종석은 현재 경북북부 제1 교도소에 복역 중이다. [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