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아무개 씨(37)는 지인인 줄 알고 보낸 문자에 뜻밖의 답장을 받았다. ‘번호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보내느냐’며 상대방은 기분 나빠했다. 오 씨는 사과하며 문자를 몇 차례 주고받았고, 상대는 자신을 ‘송다솔’이라고 소개했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소령으로 진급하며 군인으로서 승승장구한 오 씨였지만, 아직 배필은 만나지 못했다. 우연도 인연이라는 생각으로 다솔 씨와는 연락을 유지하며 편한 관계로 지냈다. 실제로 만난 여성은 얘기도 곧잘 통했다. 군인으로서의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많이 공감해주고 이해했다.
하지만 인연은 길게 가지 않았다. 4개월 정도 만남을 이어가며 두 차례 데이트도 했지만 다솔 씨는 어느 날 갑자기 종적을 감췄다. 연락을 해봐도 받지 않았다. 호감을 갖던 인연이 갑자기 끊어져버린 것 같아 오 씨는 허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얼마 뒤, 또 다른 여성에게 오 씨는 이메일을 받았다. ‘갑자기 연락드려 죄송하다. 다솔이가 죽었기에 이렇게 대신 알려 드린다. 저는 쌍둥이 언니 다희다’라는 내용이었다. 당황스런 소식에 놀라기도 했지만, 동생을 잃은 사람이 주변 사람들까지 챙기는 모습이 좋아보였다. 또 호감을 가졌던 여성의 쌍둥이 언니라니 신기하기도 했다. 오 씨는 바로 답장을 했고,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이메일과 SNS에서의 만남을 이어갔다.
다희 씨는 자신을 로스쿨 출신의 변호사라고 소개했다. 오 씨가 육군 소령이라고 밝히자, 여성은 반색하며 “우리 외삼촌이 육군참모총장이다”고 말했다. 묘한 동질감과 함께 장성의 조카와 친하게 지내게 되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슬그머니 들었다. 능력 있는 변호사에 좋은 집안, 마음 한쪽에는 동생의 죽음이라는 상처를 안고 있는 여성. 신기한 인연이라고 생각하며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다. 법적인 문제로 고민이 생겼을 때도 다희 씨는 친절하고 상세하게 오 씨에게 도움을 줬다. 비록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사이지만 점점 신뢰가 쌓였다.
때때로 대화 메신저와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2년 넘게 친분을 쌓아오던 어느 날, 다희 씨는 오 씨에게 다급하게 연락을 취해왔다.
“선배 변호사가 돈을 빌려달라는데 당장 마련할 돈이 없네. 4000만 원 정도만 빌려주면 이자 톡톡히 쳐서 갚을게.” 그간 고민상담도 자주 해준 다희 씨에게 고마운 마음도 전할 겸 오 씨는 돈을 빌려줬다. 그녀가 말한 대로 돈은 금방 갚았다.
“지난번에 돈 빌려줘서 고마워. 그래서 말인데, 내가 잘 알고 있는 카지노 전주가 있는데 투자하면 돈 좀 벌 수 있을 거야. 해보는 게 어때.”
오 씨에겐 솔깃한 제안이었다. 변호사가 추천하는 사업이니 잘못될 것 같지도 않았다. 어느 정도 융통할 수 있는 돈을 오 씨는 맡겼고, 이익을 냈다며 투자금 이상의 돈을 다희 씨에게 받았다. 또 다희 씨는 “혹시 사업이 잘 안 되더라도 걱정하지 마라. 우리 아버지가 큰 사업을 해서 몇 억 융통하는 건 일도 아니다”며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기에 더욱 믿음이 갔다. ‘역시 집안 좋은 사람들은 투자하는 것도 다르구나’라는 생각에 더 많은 돈을 투자하기로 했다. 얼마 뒤 다희 씨는 “너한테만 특별히 알려주는 거다. 경매 투자로 이익 볼 수 있는 게 있으니 이번에도 투자해 봐라”고 말했다. 높은 수익을 내왔기에 오 씨는 103차례에 걸쳐 7억 5000만 원을 건넸다.
사람 잘 만나 큰돈을 만진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사업의 수익은 점점 떨어져만 갔고, 2억 5000만 원이 넘는 투자금이 회수되지 않았다. 다희 씨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곧 수익이 난다’는 말만 반복해서 돌아왔다. 오 씨의 독촉에 답장이 점점 뜸해지더니 급기야 다희 씨는 자취를 감췄다. 그제야 뭔가 잘못된 것을 깨달은 오 씨는 지난해 7월 경찰에 다희 씨를 고소했다.
경찰의 수사 도중 오 씨는 기막힌 사실을 알게 됐다. 송다희라는 사람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 더 놀라운 것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다솔 씨 역시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평범한 유부녀 송 아무개 씨(36)가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했던 사기극이었다. 물론 군 장성의 조카라는 것도, 로스쿨 출신이라는 것도 모두 거짓이었다. 송 씨는 과거 어린이집을 운영했던 보육교사였다.
알고 보니 송 씨는 과거 ‘소개팅녀’의 동생이자, 지인의 아내였다. 2011년 송 씨의 남편인 A 씨는 처형을 오 씨에게 소개해주었지만, 두 사람의 소개팅은 잘 되지 않았다. 이후 오 씨는 번호를 착각해 과거 소개팅녀에게 문자를 보냈고, 이를 송 씨가 발견해 답장하면서 인연이 시작됐던 것.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가명으로 연락을 취하고 실제 만나기까지 했지만, 남편에게 들킬 것을 우려해 송 씨는 다시 다희라는 가명 뒤로 숨었다.
송 씨는 어린이집 원장으로 일하던 시절, 사업규모를 키우면서 사채에 손을 댔다. 빚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갔고, 오 씨의 돈으로 빚을 막아보려다 결국 사달이 났던 것이다.
사건을 맡은 송파경찰서의 강동우 경위는 “처음에는 송 씨도 ‘오 씨가 고리대금업을 하고 있다’며 군 검찰에 맞고소를 했지만 취하한 것으로 알고 있다. 처음엔 송 씨가 혐의를 일부 부인했지만 조사 과정에서 모두 시인했다. 지금은 두 사람이 합의를 하기 위해 의견을 조율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현재 상황을 전했다.
서윤심 기자 hear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