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열린 현대자동차 제47기 정기주주총회 모습. 왼쪽은 사내이사로 재선임된 윤갑한 사장.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한전 부지를 매입하기 전날인 지난해 9월 17일 현대차 종가는 21만 8000원이었다. 주총이 열린 3월 13일의 종가는 17만 2000원으로 한전 부지 매입 직전보다 21% 하락해 있었다. 현대차가 한전 부지 매입 후 약세를 거듭하다 14만 9000원까지 폭락한 주가가 아직 회복되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떨어진 주가로 인해 국민연금이 본 평가손은 7100억 원 정도다. 국민연금이 지난해 11월 4일 장내에서 매각한 현대차 지분 1%까지 추가로 계산하면 손해액은 더 커진다.
그럼에도 주총장에선 한전 부지 매입에 긍정적인 주주도 있었다. 소액주주 배 아무개 씨는 “장기적으로 랜드마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 긍정적으로 본다”고 밝혔다. 또한 중랑구에 산다는 이 아무개 씨도 “한전 부지 매입을 계기로 주식이 오를 것이라고 생각해 1억 원이 넘는 돈을 투자했다 손해를 봤다”면서도 “큰 그림으로 봤을 때 긍정적으로 본다”고 말했다.
문제는 국민연금 스스로도 현대차의 잘못을 꼬집었음에도 이중적인 잣대를 보였다는 점이다. 국민연금은 주총 전날인 지난 12일 보건복지부 홈페이지에 ‘국민연금, 현대모비스·기아차 사외이사 재선임 반대 의결권 행사키로’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냈다. 국민연금은 “현대차그룹 컨소시엄(현대차·현대모비스·기아차)에서 한전 부지 매입과 관련된 이사 7인 중 현대모비스 및 기아자동차의 사외이사 2인에 대한 재선임안에 대해 반대 의결권을 행사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국민연금은 “기업의 이익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 대해 이사들이 회사의 투자 여력, 매입 가격, 투자 효과 등에 대한 논의 없이 대표이사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등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의무를 다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국민연금은 정작 깊숙이 관여한 현대차 사장은 ‘경영 안정’을 이유로 ‘의견 없음’으로 뒀고, 거의 개입하지 않은 현대모비스 사외이사에 반대표를 던지기로 한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윤 사장이 재신임에 실패했다면 정몽구 회장 리더십에 큰 타격을 받을 일이라 현대차가 국민연금을 특별 관리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결국 윤 사장 재선임 의결은 국민연금의 반대 목소리 없이 순탄하게 통과됐다. 사실상 ‘구색 맞추기’에 가까웠던 국민연금의 현대모비스 사외이사 반대 의견도 회사 측에서 재선임 안건을 표결에 부쳐 17.4%의 반대가 나오긴 했지만 수월하게 원안 그대로 통과됐다.
파장은 오히려 주총이 거의 끝나갈 무렵 나왔다. 네덜란드 연금 투자기관인 APG의 박유경 이사가 특별발언을 요청하면서다. 박 이사는 “현대차가 지난 6개월간 시장의 우려에 대해 다양한 주주친화적 정책과 미래성장전략을 신속히 발표하며 적절히 대응했다”고 치켜세우면서도 “앞으로 현대차의 지배구조가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할 수 있도록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사회 내부에 ‘거버넌스 위원회’를 설치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소액주주들의 가치를 살피는 것은 사외이사가 할 일이지만 한국적 상황에선 제대로 역할이 안 됐다”고 제안했다.
박 이사는 이 같은 제안이 APG뿐만 아니라 캐피탈그룹, JP모간, 퍼스트스테이트 등 대형 펀드와 연기금을 포함한 20여 기관투자자와 의견을 같이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주총 의장을 맡은 김충호 현대차 사장은 “경영환경과 시행 여건을 감안해 거버넌스 설치를 적극 검토해 보겠다”고 답했다. 외국계 투자자들의 거버넌스 설치 요구는 국민연금과 달리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챙긴 묘수라는 게 세간의 평이다.
최근 배당을 확대하며 주주가치 확대를 외치는 현대차에 편승해 거버넌스 위원회 설립을 외치지만 실은 한전 부지 매입 과정에서 나타난 현대차의 독단적인 의사결정 과정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는 것이다. 앞서의 재계 관계자는 “회사마다 주어지는 힘이 다르지만 거버넌스 위원회가 설립되면 지분이 적은 오너의 독단을 막는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고 전망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
거버넌스 위원회란? 외국계 투자자들의 주장대로 된다면 현대차는 이사회에 거버넌스 위원회를 설치한 사실상 국내 최초의 기업이 된다. 우리에겐 낯선 거버넌스 위원회는 외국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이사회 부속 기관이다. <일요신문>이 입수한 미국의 A 거버넌스 위원회 정관에 따르면 위원회는 △이사회와 회장 평가 △이사회 이사 신임, 재신임 △이사회 교육 △경영진의 성공적인 승계 계획 △회사 규칙 검토와 이사회에 개정 추천 △이사회 이사들의 자기 평가나 발전 과정에 대한 감독 등의 역할을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