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한 해 60여만 명이 다녀가는데 그중 외국인이 10%에 달한다.
9년 만에 전국적으로 한파주의보가 내린 3월 10일 기자는 서대문 독립공원으로 향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서대문구 독립공원 내에 자리하고 있다.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5번 출구로 나가 몇 걸음 걷다보면 바로 역사관으로 향하는 입구가 보인다.
유난히 추운 날씨 탓인지 아직 방문객은 많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은 2013년부터 한 해 관람객 수가 60여 만 명에 달할 정도로 인기 있는 역사관으로 자리매김했다. 김태동 학예연구사는 “전체 관람객의 10%는 외국인”이라며 “국내 역사관 중 이렇게 외국인이 많이 오는 곳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 때문인지 역사관 내 모든 설명과 안내책자도 영어·일본어·중국어로 준비되어 있었다.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일본인 관람객을 담당하는 구본식 해설사는 “일본인들 중 관람이 끝나면 죄송하다고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며 “판사들도 몇 분 왔는데 한숨을 쉬며 ‘아베 총리가 이걸 봐야하는데’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우경화가 시작된 2008년 이전에는 일본 학생들도 많이 방문했다고 한다.
역사관 전체를 돌아보는 데는 1시간이 넘게 걸린다. 역사관에는 형무소의 역사뿐 아니라 일제의 식민지 운용실태, 해방 이후 독재정권의 민주화 인사 탄압 실태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실제 현장이라 그런지 해설사의 상세한 설명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내부(왼쪽)와 지하 고문실.
전시관 지하 고문실은 충격적이다. 각종 고문 기구들을 직접 보며 관람객들은 그 잔인함에 탄식했다. 구 해설사는 “원래 ‘손톱 밑 찌르기 고문’은 인형으로 고문당하고 비명 지르는 모습을 재현했는데, 관람객들이 너무 잔인하다고 해서 치웠다”고 귀띔했다.
1920년대 당시 건물을 그대로 재현한 중앙사(옥사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건물)와 옥사(감옥 건물)는 더욱 ‘리얼’했다. 대여섯 명 누울법한 방에 죄수 50여 명을 밀어 넣었다는 대목에서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방이 좁아 잠 잘 때는 열 명 정도가 한쪽 구석에서 자고, 나머지는 대기하다가 3시간 뒤 교대로 자는 식으로 운영했다”고 구 해설사는 설명했다.
2014년 여성독립운동가 전시관으로 개관된 ‘여자옥사’는 일제 강점기에 유관순 열사 등 여성 수감자들이 실제로 생활했던 감옥이다. 이곳에서는 유 열사의 원래 얼굴을 복원한 동영상이 특히 눈에 띄었다. 익히 알려진 유 열사의 사진 속 모습은 각종 고문 등으로 붓고 훼손된 얼굴이었다. 다만 새롭게 복원한 얼굴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보다 훨씬 앳되고 고왔다.
서대문형무소에는 해방 전까지 주로 독립투사들이 수감되어 있었지만 광복 이후에는 독재정권에 항거한 민주화운동 세력들이 수감되어 생활했다. 그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사형장, 그리고 끌려가던 사형수들이 부둥켜안고 울었다던 사형장 앞 ‘통곡의 미루나무’를 실제로 본 관람객들은 이내 숙연해졌다.
마지막으로 격벽장을 들렀다. 수감자들 간 대화를 막고 쉽게 감시할 수 있도록 여러 개의 칸막이벽(격벽)을 만들어 분리 수용하여 운동을 시켰던 시설이다. 구 해설사는 “사형수들에게는 특별히 깨끗한 옷을 입히는데, 어떤 이들은 벽에 자신의 옷을 벗어 걸어두기도 했다”며 “‘나는 곧 저 세상 갈 테니 다른 이가 이 옷을 입으시오’ 하는 배려였다”고 전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세계적으로도 그 희소성을 인정받는 사적이다. 하지만 한때 사라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1987년 정부가 서울구치소를 의왕으로 옮기고 철거하려 했으나 광복운동가 후손과 국민들이 이를 반대해 보존하게 됐다. 1988년에는 남아 있는 옥사와 사형장 등이 국가사적(제324호)으로 지정됐고, 서대문구가 이를 역사관으로 꾸며 개관했다. 현재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서대문구 도시관리공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역사관 관계자들은 “아무래도 시나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게 된다면 지원도 더 많아지고 프로그램도 증설할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 솔직히 든다”며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정지혜 인턴기자
구본식 해설사 인터뷰 “자원봉사 이상의 의미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구본식 씨의 해설은 남달랐다. 물 흐르듯 막힘이 없으면서도 기승전결이 뚜렷했다. “혹시 역사 선생님이셨나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SK케미칼 전무이사로 퇴직한 후 자원봉사하고 있다”고 답했다. “나라의 덕을 봤지요. 대기업에 입사해 별다른 부침 없이 계속 일하며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으니까요. 은혜를 환원하고 싶어 시작하게 됐습니다.” 서울시에서 외국어가 능통한 해설사 자원봉사자를 찾는 공고를 본 구 씨는 바로 지원했고, 합격했다. 이후 6개월 간 일주일에 3번씩 전문가들에게 역사지식을 배우며 준비기간을 가졌다. 그렇게 시작한 해설사 일이 올해로 9년째다. “요즘도 다른 해설사 분들이랑 주기적으로 공부합니다. 관람객들에게 정확하게 알려드려야 하니까요.” 대학시절 구 씨는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친구들을 면회한 적도 있다. 그런 그에게 이 일은 자원봉사 이상의 의미다. “과거와 화해한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수감 경험 있는 분들이 관람객으로 오셔서 회상에 잠기는 모습을 보면 그 맘이 이해가 갑니다.” 부인과 딸 셋은 물론 주변인들 모두 구 씨의 해설사 일을 자랑스러워한다. 올해 65세가 되는 구 씨에겐 한 가지 바람이 있다고 한다. “해설사는 70세까지밖에 못합니다. 취지는 이해하지만 요즘 60~75세는 ‘신중년’이라고도 하잖아요. 나이 제한을 좀 늘렸으면 좋겠어요. 우리 손녀한테도 직접 서대문형무소의 역사와 의미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싶거든요” [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