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이나 당뇨와 같은 병부터 비만이나 노화, 우울증까지 모두 장내 세균과 연관이 있다. 사진은 한 환자의 대장내시경 모습
지난 2월 22일, 일본 NHK 프로그램에서는 한 미국인 여성의 사연이 소개됐다. C-디피실리(Clostridium difficile) 균에 감염된 이 여성은 휠체어에 의지한 채 연신 어두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마땅한 치료제가 없어 매년 1만여 명이 사망하는 무서운 질병에 걸린 탓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가 최근 병을 이겨내고, 건강한 삶을 살고 있단다. 신약이 개발돼서가 아니다. 다름 아니라, 장내 세균총을 개선한 것이 그 비결이라고 한다. 과연 ‘장내 세균’은 어떤 힘을 갖고 있기에 이처럼 건강함을 되찾을 수 있었던 걸까.
잘 알려진 대로 성인의 장 속에 살고 있는 세균은 100조 개가 넘는다. 무게로 따지면 약 1.5㎏에 달하는 양이다. 장내 세균들은 같은 종류끼리 서식하며, 그 모습이 마치 꽃이 흐드러지게 핀 것처럼 보인다 하여 ‘장내 플로라(Flora)’라고 불린다. 다시 말해, 장내 플로라는 장 속에 사는 세균들의 생태계인 셈이다.
그런데 ‘장 속에 어떤 세균이 얼마나 살고 있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다고 한다. 예를 들어 태내에 있을 때는 세균의 침입으로부터 보호를 받지만, 태어난 직후부터는 모유를 비롯해 각종 세균이 체내에 들어오게 된다. 즉, 개개인이 처해진 환경에 따라 장내 세균의 종류와 구성비가 천차만별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수많은 장내 세균 중에는 우리 몸에 유익한 균이 있는 반면, 해로운 균도 존재한다. 각각의 세균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는 그동안 ‘미개척 영역’에 가까웠으나 최근 기술혁신을 바탕으로 방대한 세균 유전자 해독이 가능해지면서 급속히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비만 세균’이다. 2006년 미국 워싱턴대학의 제프리 고든 연구팀은 비만 쥐와 정상 쥐를 비교한 결과, 비만 쥐는 장 속에 ‘피르미쿠트’ 계열의 세균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피르미쿠트 균은 소화된 음식에서 더 많은 칼로리를 흡수하게 해 비만을 유발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고지방 고당분 음식물을 섭취하면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장내 피르미쿠트 균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교수는 “날씬한 쥐들의 장에 피르미쿠트 세균을 대량 주입한 결과 체중이 2배로 늘어났다”면서 “똑같이 먹어도 살이 더 찌는 이유는 장 속에 서식하는 특정 세균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후 비만한 사람을 대상으로 실시한 임상시험에서도 똑같은 결과가 나왔다. 그간 ‘다이어트 3요소’로 운동과 식이요법, 유전자가 중요시됐던 터라 “장 속에 살고 있는 세균이 체중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는 놀라웠다. 의학계에서는 조만간 장내 세균을 조절해 비만을 치료하는 획기적인 의학기술이 나올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듯 장내 세균에 대한 기대가 커지면서 구미에서는 국가적인 연구 프로젝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내 플로라를 활용한 희귀병 치료연구가 차례차례 진행되고 있는 것. 일본 이화학연구소의 요시미 벤노 박사는 “장내 유해균과 유익균의 균형이 깨지면 암, 알레르기, 감염증 등 온갖 질환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면서 “가까운 미래에는 사람들이 장내 세균총 검사를 통해 질병을 예방하거나 조기에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좋은 균이 우세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깨끗한 장내 플로라는 질병 예방뿐만 아니라 노화 방지에도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두부나 낫토 등에 많이 함유된 이소플라본은 장내 세균에 의해 ‘이퀄’이라는 대사물질로 전환된다. 주목할 만한 점은 폐경기 여성 100명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이퀄을 3개월간 복용하게 한 결과, 주름이 개선되는 효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퀄은 고지혈증, 얼굴홍조, 골밀도 감소와 같은 갱년기 장애 및 전립샘암 예방에도 효과가 큰 것으로 확인됐다.
최근에는 장내 플로라와 정신질환의 관계도 주목을 받고 있다. 이와 관련해, 캐나다 맥매스터대학 연구팀은 활발하고 호기심이 왕성한 쥐와 소심한 쥐의 장내 플로라가 다르다는 것을 발견. 두 쥐의 장내 세균을 바꿔 이식하는 실험을 통해 흥미로운 결과를 확인했다. 소심한 쥐는 대담하고 활동적으로 변했고, 활발했던 쥐는 반대로 소심하게 바뀐 것이다.
연구팀은 “우울증 환자에게도 장내 환경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장내 세균을 투여했을 때 불안감과 우울증이 감소됐다”고 밝히며 “장내 플로라를 바꿈으로써 인간의 성격과 행동에 어느 정도 변화가 일어났다”고 분석했다. 이에 대해서는 아직 더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하지만, “장에 서식하는 세균이 뇌 기능에 영향을 준다”는 이론은 전문가들에게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는 상태다.
“장에는 면역세포가 약 70~80%가 집중돼 있기 때문에 장이 ‘진정한 건강의 척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하는 전문가들. 따라서 “꽃밭을 가꾸는 것처럼 늘 장내 생태계를 건강하게 유지해야 하며, 우리 몸속에 유익한 세균이 활발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기 위해서는 “식이섬유가 풍부한 식품과 콩류를 섭취하는 등 올바른 식습관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했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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