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라 보우가 인기 절정일 당시 거리 간판(왼쪽).
만약 배우가 되지 않았다면, 클라라 보우는 간질과 우울증에 시달렸던 어머니 세라 보우처럼 정신병원에서 삶을 마쳤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태어난 건 1905년 7월 29일. 뉴욕 브룩클린의 빈민가였다. 아버지 로버트 보우는 식당에서 테이블 치우는 일을 했고, 툭하면 집을 나가 떠돌이 생활을 하는 무책임한 가장이었다. 어머니 세라는 정신병자였다. 클라라를 낳기 전에 두 아이를 병으로 잃었던 그녀는 클라라도 그런 운명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남편 로버트가 가출한 후엔 매춘부가 되어 생계를 이어갔다.
클라라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인간 쓰레기였다. 사춘기에 접어든 클라라를 성폭행했고, 이후 딸이 스타가 된 후에도 갑자기 나타나 난장판을 만들곤 했으며, 알코올 중독자였다. 창녀 엄마와 자신을 강간하는 아버지. 이런 지옥 속에서 클라라 보우가 판타지를 꿈꾼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고, 어느 영화 잡지가 연 미인 대회에 참가해 입상하면서 영화에 출연할 기회를 얻는다. 첫 영화는 <무지개 너머>(1922). 그녀의 나이 17세였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는 영화계가 딸을 타락시킨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잠자던 중 칼을 든 엄마의 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을 뻔한다. 그 길로 보우는 집을 뛰쳐나갔고, 이 트라우마로 그녀는 이후 죽을 때까지 수면 장애를 겪었으며, 한동안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보우를 착취하는 데 앞장 섰던 스튜디오 간부 B.P. 슐버그.
남자 복도 없었다. 아버지의 학대를 견디며 성장한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을 사랑해 줄 그 누군가를 원했다. 데뷔 초기 에이전트였던 아서 제이콥슨과 사귀었지만, 행방불명 상태였다가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의 훼방으로 헤어졌다. <맨트랩>(1926)이라는 코미디를 찍을 때 만난 16살 연상의 빅터 플레밍 감독을 좋아했지만, 당시 보우는 멕시코 출신 배우 길버트 롤랜드와 사귀고 있었다. 플레밍에게 더 마음이 끌렸지만 관계를 진전시키진 못했다. <이혼 가정 아동>(1927)에서 공연한 게리 쿠퍼에게도 마음이 끌렸다.
하지만 세 남자 중 그 누구와도 그녀는 진정한 사랑을 맺지 못했다. 허전한 마음에, 자신이 서포터로 있는 USC의 대학 풋볼 선수들을 집으로 초청해 정기적으로 파티를 벌였다. 알코올 없이 흥겹게 노래 부르고 춤추는 매우 건전한 모임이었지만, 이후 클라라 보우가 풋볼 팀 전부와 섹스 파티를 벌인다는 악성 루머가 돌았다.
1928년엔 맹장수술을 했는데 이때 병원에서 만난 핸섬한 인턴 윌리엄 얼 피어슨과 사랑에 빠졌지만, 알고 보니 그는 유부남이었다. 피어슨의 아내는 이혼을 요구했고, 파라마운트 스튜디오는 조용히 일을 덮기 위해 원래 보우에게 가야 할 돈 3만 달러를 합의금으로 전달했다. 하지만 피어슨과 보우의 관계는 서서히 멀어졌다. 그녀는 언제나 사랑을 갈구했고 수많은 남자들을 만났지만, 관계는 곧 끝나기 일쑤였다. 대부분은 남자 쪽에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유부남이거나 마약쟁이거나 보우를 지나치게 소유하려 했다.
무성영화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보우는 위기를 맞이했다. 강한 브룩클린 악센트는 관객들의 웃음을 샀고, 마이크 위치 때문에 동선의 제한을 받게 되자 다이내믹한 활력으로 인기를 끌던 그녀의 매력은 결정타를 맞았다. 커리어의 위기는, 자신도 엄마처럼 정신병을 앓다 죽을 거라는 강박관념으로 이어졌고, 보우는 은퇴를 생각했다. 가정을 꾸리고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불안한 상태에서 말실수가 잦아졌고, 당대의 ‘기레기’들은 수많은 추측 기사와 루머를 만들어냈다. 대중의 환호 속에 ‘잇걸’로 탄생했던 클라라 보우는, 어느새 ‘극혐’의 대상이 된 것이다. 상품성이 떨어지자 스튜디오도 더 이상 그녀를 보호하지 않았다. 이때 그녀의 인생에서 유일한 ‘진정한 사랑’이 나타났다. <트루 투 더 네이비>(1930)에서 공연했던 렉스 벨이라는 배우였고, 그들은 결혼을 약속한다.
만약 이때 보우가 렉스 벨과 결혼했다면, 그녀는 서서히 사람들에게 잊히는 대신 안온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때 그녀의 등에 비수를 꽂은 사람은, 아이로니컬하게도 그녀의 절친이자 비서였던 데이지 데보라는 여자였다. 보우는 그녀를 고소했지만, 정작 피고처럼 몰린 사람은 보우 자신이었다. 1930년부터 1931년까지 이어졌던 ‘클라라 보우 vs 데이지 데보’의 싸움과 판결은, 할리우드 사상 가장 끔찍한 법정이었다. 다음 주에 그 내막이 이어진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