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처럼, 연출가처럼! 자연스럽게 거치는 역할놀이
어릴 적, 실감나는 무대장치나 화려한 의상 없이 조악한 플라스틱 소꿉놀이 그릇 몇 개와 반찬 냄새 밴 보자기만 있어도 노련한 배우처럼 역할에 몰입할 수 있었다. 엄마나 아빠, 공주와 영웅 같은 주연을 기꺼이 맡기도 하고, 마지못해 아기나 시녀, 부하 같은 조연이 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누군가의 말투를 흉내 내며 자부심을 느끼기도 하고, 불만과 반항심을 품기도 했으며, 친구들과 협력하고 대립하면서 세상살이의 달고 쓴맛을 조금은 맛보기도 했다. 지금 우리 앞의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마치 프로그래밍된 것처럼 때가 되면 시키지 않아도 가상 놀이를 시작한다. 저희들끼리 모여 연출자나 대본 없이 스토리를 만들어가며 세계 어느 나라 아이들이든 비슷한 역할놀이에 빠져든다. 기고 걷는 것처럼 놀이에도 예정된 ‘때’가 있는 것이라면, 왜 역할놀이를 즐기는 시기를 거쳐 가야 할까? 그 속에서 아이들은 어떤 경험을 하게 될까? 소소해 보이지만 중요한 성장의 순간을 빚어내는 역할놀이의 의미와 그 속에 담긴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보자. 그리고 엄마 아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아이가 맡긴 역할에 빠져들어 놀아보자. 예기치 못한 순간, 아이의 진심을 들을 수 있다.
현실과 가상을 넘나들며 공감과 사회성 발달
역할놀이는 아이가 다른 사람이나 동물 등의 역할을 하면서 그 입장에서 생각하고 느끼는 경험을 할 수 있는 놀이다. 이를 가상놀이나 극놀이로 부르기도 하는데, 다양한 역할을 맡아보면서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공감 능력과 사회성을 키우고, 언어 능력과 상상력, 표현력이 향상되기도 한다. 아이와 역할놀이를 하다 보면 흥미로운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자연스럽게 두 가지 의사소통 방식을 쓰는 것이다. 하나는 놀이에서 맡은 역할로서 극중에서 말하는 모습, 다른 하나는 잠시 놀이에서 빠져나와 “다음에는 병원에 가는 거라고 하자” 식으로 극 진행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이다.
즉, 가상과 현실 두 세계를 혼동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계획과 협상, 갈등 해결의 능력을 발휘한다. 물론 이런 능력이 부족한 아이도 있지만 역할놀이가 부족함을 채워나갈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성인 대상의 상담 치료에서 역할 바꾸기를 활용하는 것처럼 역할놀이는 심리치료적인 효과도 발휘한다. 가상의 상황에서 자기가 느낀 갈등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는 것. “너 죽일 거야”라는 말을 실제로 하는 것과 전쟁놀이에서 하는 것이 다른 것처럼 놀이를 통해 감정을 표현하면 스스로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처럼 어떤 역할을 통해 부정적인 감정을 안전하게 표현하고 그 감정을 나눌 수 있는 것이 역할놀이의 강력한 힘이다.
Tip 역할놀이를 촉진하는 소품의 조건
만 4세 이전 아이들의 가상놀이를 관찰한 연구에 따르면 실제 사물보다 장난감 같은 모조품을 갖고 놀 때 더 실감나게 노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실제 사물과 너무 동떨어진 모양보다는 비슷하게 생긴 장난감을 선호했다. 만 5세 이후에는 실물과 비슷한 것이 아니더라도 상상력을 발휘해 상징화해 놀 수 있다. 또한 캐릭터 장난감보다 일반 장난감을 주었을 때 가상놀이가 더 촉진되었으며, 캐릭터 장난감은 관찰하거나 조작놀이를 하는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더 섬세하고 풍부해지는 놀이의 발달 과정
역할놀이는 연령에 따라 소재나 이야기의 범위, 참여 인원 등이 달라진다. 역할놀이의 단계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양하지만 월령에 따른 시기적 특징을 통해 지금 아이의 단계를 짚어보면 놀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생후 15~18개월
가상놀이가 시작되는 시기. 바나나를 귀에 대고 전화를 받는 시늉을 하거나 음식 모형 장난감을 가지고 먹거나 잠자는 척을 한다.
생후 24개월
요리나 청소 등 가까운 사람의 일상적인 모습을 따라한다. 아직 어떤 스토리를 연결하지는 못하며, 주스를 컵에 따라주는 시늉이나 포크에 음식을 찍어 인형에게 먹이기 같은 짧고 독립된 에피소드를 표현한다. 이때 언어 표현이 어느 정도 가능한 아이는 어떤 행동을 하면서 “맘마 먹어”처럼 설명할 수 있다.
생후 30개월
매일 하는 일은 아니지만 재미있었던 일, 예를 들어 쇼핑하기나 놀이터 놀이 같은 상황을 소재로 삼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의사, 엄마는 아기”라는 식으로 역할을 바꿔 놀 수 있다.
생후 36~48개월
가상 능력이 더 발달하고 극적인 행동이 더 정교해진다. 다른 사람의 역할을 더 정교하게 수행하고, 물건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도 상상만으로 놀 수 있으며, 어떤 물건이 보이면 그것을 가지고 즉흥적인 연기를 하기도 한다. TV나 현장 학습에서 본 경찰관이나 소방관, 군인 등을 맡아 연기하거나 함께 노는 사람에 따라 말투를 바꾸기도 하며, 인형을 보고 “지금 얘는 배가 고파. 기분이 안 좋아” 식으로 상황과 감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만 4세 무렵에는 언어 능력이 발달해 역할놀이의 내용과 범위가 훨씬 풍부해진다. 자기 배역뿐 아니라 역할에 맞는 소품을 준비하는 무대 담당자나 극의 내용을 설명하는 작가로 변신하기도 한다.
만 5세
전혀 본 적 없고 관련이 없는 사건이나 상황에 대해서 일종의 대본을 만들어 자기가 기존에 알던 지식과 결합해 놀이를 즐길 수 있다. 여러 개의 연속적인 가상 사건이 이어지면서 나름 기승전결이 있는 스토리를 만든다. 또 친구들과 각자의 역할을 조정하며 놀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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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황선영 기자 / 글 김이경(육아 컬럼니스트)/ 모델 빈센트(4세), 로건(7세), 이병찬(7세)/ 스타일리스트 김유미/ 헤어·메이크업 박성미/ 도움말 신민진(보라매청소년수련관 놀이치료사), 박소연(서울주니어상담센터 놀이치료사)/ 의상협찬 유니클로·스티브매든(02-3442-3012), 빈폴키즈(02-3447-7701), 키블리(www.kive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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