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0일 정동영 전 의원이 여의도 개인사무실에서 4·29 재보선 관악을 출마를 밝히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정치인에게 ‘잊힌다’는 의미는 정치적 사망선고와도 같다. 정동영 전 의원도 마찬가지다.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 후보로 인생 최고의 하이라이트를 받으며 활동했던 그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대선 패배 뒤 그의 존재감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더 이상 잊히면 미래도 없다’는 위기의식이 그를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난 2월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체제가 들어서면서 그 위기감은 극에 달했다. 이대로 가면 야권 대선 후보는 문재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장수가 싸워보지도 못하고 백기투항을 하는 꼴이다.
특히 ‘MBC 앵커 출신인 정동영’은 잊히는 것을 죽기보다도 싫어한다. 스타 연예인들이 팬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면서 겪는 금단현상처럼, 그도 국민의 기억속에서 지워지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을 것이다. 그와 오랫동안 교류하며 잘 알고 있는 야권의 한 정치인은 이에 대해 “결국 본인의 선택이고 결단이다. 나는 (재보궐에) 나올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동영은 주목받기 좋아하는 인사로 잊혀지는 것을 싫어한다. 본인이 항상 스포트라이트를 받길 바란다. 이번에도 나오겠다는 생각을 본인이 굳히고 난 뒤에는 반대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지난번 전주 출마 때와 똑같다. 그때 미국에 있을 때인데 반대하는 사람은 만나주거나 전화하지도 않았다. 찬성하는 사람들만 쭉 협의해서 귀국해서 출마했던 것이다. 전주 출마의 복사판이다. 내부에서도 출마 찬성하는 사람 쪽 얘기만 듣고 출마했다”라고 말했다.
정 전 의원을 잘 아는 또 다른 관계자도 이런 해석에 동의한다. 이 관계자는 “정 전 의원은 중대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먼저 의견을 구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그런 연락이 전혀 없었다. 여론조사 데이터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있었는데 무시하고 다른 쪽을 더 참고하더라. 아마 누군가가 이길 수도 있었다고 꼬드겼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면 본인이 이미 결론을 내리고 반대하는 사람들 의견은 애초부터 무시하고 연락조차 안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리더의 총기가 빠지는 경고음은 이런 데서 나온다. 큰일이 있을 때 본인이 듣고 싶어하는 얘기만 듣고 결정하는 것이다. 그 길은 주로 실패하는 쪽으로 이어지더라”고 말했다.
정 전 의원의 이번 재보궐 선거 도전은, 개인적으로 임계점에 이른 ‘잊혀짐’에 대한 마지막 회심의 반격 카드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그를 이런 ‘도박’의 길로 이르게 한 데에는 당연히 정치적 이해득실에 대한 계산도 깔려 있다. 먼저 이번 재보궐 도전을 통해 야권의 지분 있는 계파지도자 또는 대선주자로 다시 우뚝 설 수 있다는 전략이 숨어 있다. 이 전략의 핵심은 바로 ‘문재인 흔들기’로 이어진다. 그 공간을 정 전 의원이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국민모임은 정 전 의원과 재야 진보세력이 만든 정치결사체다. 이는 현재의 새정치연합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문제의식에서 태동한 정치세력이다. 하지만 이번 재보궐 선거에서 관악을 후보를 찾기가 쉽지 않았고 결국 그 공은 정동영 전 의원에게로 넘어갔다. 정 전 의원이 재보궐 선거에 실패하더라도 그 후유증이 비교적 덜할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정 전 의원도 등 떠밀려 희생하는 자신의 이미지를 연출해야 향후 총선 전 지분싸움에서 유리한 국면을 차지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현재의 여론조사(중앙일보 4월 3일자) 결과 서울 관악을에서 정 전 의원은 새누리당 오신환 후보(34.3%), 정태호 새정치연합 후보(15.9%)에 이어 3위(13.3%)를 달리고 있다. 일단 패배가 유력한 상황이다.
그런데 정 전 의원은 승리와 실패 두 가지 옵션 모두 이득이 있다고 보는 것 같다.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정 전 의원이 2위까지(‘휴먼리서치’가 21일과 22일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새누리당 오신환 38.4%, 정동영 28.2%, 정태호 24.4%의 지지율을 기록했음) 치고 올라갔다는 자료도 있다. 이런 결과를 토대로 정 전 의원 측은 ‘선거 개표가 되면 세 후보 모두 30%대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초박빙 상황을 보일 것’이라고 예측하며 조심스럽게 ‘기적의 승리’도 꿈꾸고 있다. “관악을이 호남 출신 고령인구가 많고 젊은층의 투표율이 낮은 만큼 실낱같은 희망이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실제로 정 전 의원은 자신이 관악을에서 이길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전언도 있다. 새정치연합의 한 관계자는 “정동영 전 의원 쪽에서 찬성파들의 설득이 강했던 것 같다. 정 전 의원은 질 곳에는 나가지 않는다. 선거에서 이길 것으로 보고(오판이든 어떻든 간에) 나온 것 같다”라고 말했다.
2월 4일 국민모임과 정동영 전 의원의 첫 공식 회동 모습.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정 전 의원 측은 2위가 되더라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어부지리로 새누리당 오신환 후보가 당선되고 자신과 정태호 새정치연합 모두 떨어질 경우 그 타격은 새정치 쪽이 훨씬 크다는 계산이다. 새정치연합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정태호 후보는 지난 2012년 대선 때 문재인 캠프의 전략기획실장을 맡은 말 그대로 문 대표의 ‘오른팔’이다. 이런 팔이 잘려나간다면 문 대표에게는 심대한 타격이 된다. 사퇴론까지는 아니지만 당내 입지가 여전히 불안하다는 의식을 확산시킬 수 있다. 결국 이 불안감은 대선으로까지 이어지게 되고 내년 총선을 앞두고 호남 기반의 새정치연합 의원들까지 동요하게 만들 수 있다. 총선 전 이탈세력이 나올 수 있다는 얘기”라고 짚었다.
이번 재보궐 선거는 문재인 대표 체제 출범 뒤의 첫 선거라 문 대표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2·8 전당대회의 계파전쟁 연기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고, 이번 선거 결과에 따라 그 연기가 다시 피어오를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정동영 전 의원의 관악을 출마는 본인의 당선이 목적이 아니라 오로지 문재인을 흔들기 위한 1회용 저격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야권 대권구도는 문재인 1인 독주체제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2·8 전당대회를 통해 문 대표가 사실상 당의 ‘오너’까지 되면서 이제 야권 대선주자는 문재인이라는 데 이견이 거의 없는 상황이다. 정 전 의원으로서는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판을 내줘야하는 형국이다. 당연히 무리를 해서라도 끌어내려야 한다. 아니면 자신이 죽는다.
통진당 사태 이후 깊은 침체기에 빠진 재야 진보세력도 국민모임을 통해 반전의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새정치연합의 한 재선 의원은 이에 대해 “국민모임은 야당 흔들기가 목표다. 정동영 전 의원을 통해 야권을 분열시키면 국민모임으로서는 큰 이득이다. 그동안 이렇다 할 역할도 못하고 지리멸렬하다보니 진보세력 내부에서는 ‘이러다 씨가 마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해있다. 그래서 유력 정당의 대선주자까지 지낸 정치인이 탈당해 또 다른 당을 만든다는, 그런 명분 없는 정치까지 하려는 것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정 전 의원의 재보궐 도전에 대해 정치권이나 여론의 반응은 대체로 싸늘하다. 일단 새정치연합에서는 분노와 함께 애처롭다는 반응까지 나오고 있다. 당의 한 공보라인 관계자는 “이미 몸값 높은 분인데, 몸값 떨어지는 거 아니겠느냐(허허)”라며 혀를 차고 있다. 앞서의 새정치연합 재선 의원은 이에 대해 “배신의 아이콘으로 될 수 있다. 이미 철새정치로 그런 이미지가 있었는데 이번에 확실히 정동영은 정상에 남들보다 비교적 빨리 올라갔다가 더 빨리, 엘리베이터로 하락하는 형국이다”라고 꼬집었다.
정 전 의원을 “정치적 대의를 바탕으로 하는 게 아니라 상황론으로 난국을 돌파해나가는 무원칙한 정치인”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지난 2007년 3월 한나라당을 탈당한 손학규 전 대표를 두고 노무현 대통령은 당시 “보따리장수 하듯이 정치를 그렇게 해서야 어떻게 정치가,나라가 제대로 되겠느냐”라고 일갈한 적이 있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의 정무팀장이 이번에 관악을에 출마한 정태호 후보다.
정 전 의원은 지난 2007년 열린우리당을 탈당하고 노무현 대통령과 각을 세우며 ‘대통합민주신당’을 만들어 출마했다가 17대 대선에서 참패한 바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입장에서 보면 현재의 정 전 의원도 일종의 보따리장수로 보일 수 있다. 노 전 대통령이 이번 정 전 의원의 탈당과 재보궐 출마 상황을 보며 논평을 내놓는다면 이 정도쯤 되지 않을까.
“대선후보까지 지내며 큰 은혜를 입은 분이 자신의 정치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동네 계파장사꾼으로 전락해 야권 전체에 재를 뿌리는 것은 정치인으로서 정말 수치스러운 행위입니다.”
※ 여론조사 관련, 그밖의 사항은 선관위 중앙선거여론조사공정심의위원회(www.nesdc.go.kr) 홈페이지 참조.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
김다영 기자 lata1337@ilyo.co.kr
정동영 정치 역정 벌써 네번째 탈당…여론은 싸늘 정동영 전 의원의 야권에서의 정치적 위상은 결코 만만치 않다. 야당 정치인 가운데 대선을 치러본 후보는 문재인, 정동영 두 명밖에 없다. 야권으로서는 중요한 정치적 인재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그는 중요한 정치적 시기마다 과감하게 기존의 틀을 깨고 변화를 주도했다. 여기에는 혁신과 배신이라는 꼬리표가 동시에 붙어 있다. 하지만 2007년은 달랐다.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열린우리당을 탈당했고 그 과정에서 ‘동지’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도 결별했다. 그때 생긴 친노그룹과의 악연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이번에 그가 떨어뜨리려 나선 후보도 친노그룹의 ‘심장’이자 문재인 대선 캠프 전략기획실장을 역임한 정태호 후보다). 정 전 의원은 대통합민주신당을 만들어 대선 후보가 됐지만 큰 표 차로 낙선했다. 그 뒤 2008년 총선에서는 서울 동작을로 지역구를 옮겼지만 정몽준 한나라당 후보에 밀려 떨어졌다. 2009년 재보궐 선거 당시 전주 덕진에 출마하고자 했지만 당에서 공천을 받지 못하자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뒤 2010년 복당했다. 2012년 총선 때는 서울 강남을로 지역구를 옮겼지만 낙선했고 지난 1월 네 번째 탈당(새정치민주연합) 후 서울 관악을 보궐선거에 출마하기로 했다. 정 전 의원은 중요한 고비마다 탈당을 통해 정치적 반전을 꾀했다. 지난 1월 새정치연합을 탈당하면서 그는 “당은 서민과 중산층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소외된 계층을 살피지 못하고 국민의 삶과 동떨어졌다”고 외쳤다. 그런데 그는 지난 2007년 6월 18일 열린우리당을 탈당할 때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당시에도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며 탈당을 감행했다. 몇 년 사이에 같은 이유로 탈당을 하는 것을 두고 명분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온다. [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