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사진은 배우 박신혜 사칭 페이스북. 오른쪽 위 사진은 고 권리세 사칭 SNS(위)와 하하의 SNS 사칭 경고 메시지.
김아무개 씨(여·30)는 최근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포함한 모든 SNS 활동을 중단했다. 김 씨가 모든 SNS 계정을 탈퇴하기로 결심한 것은 페이스북 친구로부터 ‘비슷한 사진을 올리는 사람이 있으니 확인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메시지를 받으면서부터다. 김 씨는 페이스북 친구가 알려준 계정으로 들어가 사진을 한 장씩 확인하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김 씨의 일상이 낯선 사람의 계정에 그대로 ‘복제’돼 있었기 때문이다.
김 씨의 일상을 도용한 사람은 김 씨 프로필사진을 제외한 모든 일상을 훔쳐갔다. 해외여행 중 찍은 풍경과 쇼핑을 끝낸 명품,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은 음식 등 김 씨가 일상을 지인들과 나누기 위해 올린 사진들이 생면부지 사람의 일상으로 둔갑해 있었다. 김 씨는 자신이 찍은 사진임을 확신하고 사진을 도용한 계정에 “내가 찍은 사진이 왜 여기에 있느냐”며 댓글을 남겼다. 잠시 후 게시글이 지워지고 김 씨에게 “죄송하다”는 짧은 메시지만이 돌아왔다. 김 씨는 자신의 사진을 도용한 사람에게 ‘또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할 경우 법적조치를 하겠다’는 경고와 함께 본인도 모든 SNS를 중단했다.
과거 아름다운 외모와 풍요로운 삶은 단순 질투와 선망의 대상에 그쳤다. 그러나 미디어를 통해 부러운 삶을 엿보고 대리만족을 느꼈던 대중의 욕망은 SNS가 발달하면서 가상의 공간에 남의 인생을 복제하는 수준까지 진화했다.
앞선 사례는 차라리 애교 수준이다. 최 아무개 씨(여·23)는 지난해 SNS에서 자신의 사진 등 신상을 도용해 자신의 행세를 하고 다니는 사람을 발견하면서부터 일상생활이 어려워졌다. 최 씨는 자신의 신상이 도용당한 문제의 페이스북 계정을 접한 후 생전 처음 겪는 공포감을 느꼈다. 프로필 사진은 분명 최 씨였지만 가상에서 만들어진 최 씨는 또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다. 휴대폰 게임 한번 해본 적 없는 최 씨는 도용 계정에서는 프로게이머와 연애를 하는 잘나가는 게임회사 직원이 돼 있었던 것이다.
최 씨는 자신의 인생을 도용한 여성에게 직접 만나 해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최 씨에게 돌아온 것은 “미안하다”는 짧은 사과와 함께 “유명 프로게이머와 사귀는 것이 부담스러워 나와 닮은 당신 사진을 사용했다”는 어이없는 변명이었다. 최 씨는 이후 가해 여성이 자신의 사진으로 다른 남자들을 속이며 ‘노래방 도우미로 일했다’는 허위사실을 발설하고 선물 등을 요구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최 씨는 그때의 충격으로 한동안 정신과 진료를 받아야 했다.
앞서의 사례처럼 타인에게 자신의 인생을 도난당한 사람들이 느끼는 정신적 피해와 공포감은 상상 그 이상이다. 하지만 신상을 도용한 가해자들을 처벌하기 위해서는 신상도용이 금전적 피해 등 실질적인 범죄로 이어졌다는 증명을 해야 하는 고충이 따른다. 법무법인 한길의 문정구 변호사는 “상대방이 단순 초상을 도용한 것이거나 모욕행위를 동반하지 않은 경우라면 형사처벌이 어렵다”며 “다만 상대방의 사진 도용 행위로 정신적 손해를 입었다면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를 검토해 볼 수는 있다”고 조언했다.
최근에는 단순 신상도용을 넘어서 악의적인 의도로 타인의 신상을 도용해 처벌을 받는 사례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타인의 사진이나 일상을 내 것인 양 행세하는 것은 ‘병’으로 볼 수도 있지만 범죄로 이어지는 신상도용은 처벌을 피하기 쉽지 않다.
실제로 지난 2월 초에는 대학입학을 앞둔 한 고교생이 SNS를 통해 알게 된 재수생 친구의 질투로 입학이 취소돼 경찰이 수사에 나서 화제가 됐다. 한 재수생이 자신이 가고 싶어 하는 대학에 합격한 친구를 질투해 친구인 것처럼 위장해 입학 예치금을 환불해 대학 등록이 취소된 사건이다. 다행히 피해 학생은 대학 측의 배려로 입학할 수 있었지만 단순 질투와 동경에서 시작된 신상도용이 범죄로 이어질 수 있는 사례였다.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범죄대응과 관계자는 “헤어진 여자친구에 앙심을 품은 남성이 여자친구의 신상을 도용해 온라인에 ‘원나잇 상대를 구한다’는 허위 글을 올려 실형 선고를 받는 일이 있다. 다만 이 남성은 자매의 사진뿐만 아니라 주소와 전화번호까지 올려 피해가 컸기 때문에 명예훼손 등으로 실형선고를 받은 경우”라며 “돈이 관계되는 실질적 피해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단순 신상도용으로 신고가 들어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터넷상에서 사진을 도용해 자신의 행세를 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고 쉽게 발생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설명했다. 아직은 SNS 신상도용 사실을 알게 됐을 경우 해당 서비스 고객센터에 신고접수를 하는 등 개인이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온라인에 남아있는 ‘흑역사’를 청산해주는 업체인 산타크루즈 캐스팅 컴퍼니 김호진 대표는 “온라인상에서 또 다른 나를 만들어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로 인한 피해가 꾸준히 늘고 있다. 신상도용으로 인한 인터넷 흔적을 삭제할 수 있느냐는 문의도 들어오고 있는 상황”이라며 “대부분의 신상도용은 ‘다른 인생을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하지만 지나칠 경우 타인 행세를 하며 사람을 만나거나 금전 요구, 청탁을 하는 등의 범죄로 확대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김 대표는 “명의도용과 달리 온라인 신상도용은 처벌할 수 있는 법적근거가 미비한 상황이다. 온라인범죄와 관련된 법이 정확하게 마련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