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샤넬의 ‘유아독존’ 정책은 똑똑한 소비자들이 생겨나면서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라별 유통 장벽이 낮아지고 해외 직구가 일상화되면서 굳이 비싼 돈을 주면서 국내 매장을 찾는 소비자들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업계에서는 이를 보다 못한 샤넬이 ‘글로벌 가격 일치화 전략’을 내세우며 아시아에서의 가격 인하를 결정한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샤넬은 유로화 가치 하락으로 나라별 가격 격차를 줄이기 위함이라고 항변하고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샤넬의 화끈한 가격 인하로 아시아 시장은 다시 불붙고 있다.
소비자들은 지금과 같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며 구매욕을 불태우고 있는데 실제 가격 인하 이후 서울 소공동의 롯데백화점 샤넬 매장 방문객은 평소 대비 3배 이상 급증했다고 한다. 주말이면 1시간씩 입장 대기를 해야 할 정도인데 때문에 ‘보이샤넬’ ‘클래식’ ‘2.55 빈티지’ 등 가격 인하가 적용된 모델 중 일부는 품절 사태까지 발생했다. 지난 31일 서울의 한 매장에 ‘클래식’ 제품 구입 문의를 했더니 “대기를 해야 한다. 언제 물건이 들어올지는 우리도 알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하지만 모든 소비자들이 가격 인하를 반기는 것은 아니었다. 차액 환불이 되지 않는 3월 1일 이전 구매 고객과 ‘샤테크족’들에겐 날벼락을 맞은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에 일부 구매 고객들은 국내 매장, 한국 본사를 넘어 프랑스 본사까지 항의전화를 하는가 하면 “사전 고지 없이 가격 인하를 해놓고 차액을 돌려주지 않는 것은 불합리하다”며 소송을 제기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전국의 샤넬 매장도 매일이 전쟁터다. 물건을 사려는 손님과 환불을 요구하는 손님들이 뒤엉켜 여기저기서 소동이 일기도 했다. 지방의 한 샤넬 매장에서는 가방을 집어던지며 “환불을 해 달라”고 난동을 피우는 손님 때문에 보안요원까지 출동했다. 서울의 한 샤넬 매장 직원은 “말로만 따지고 가는 손님들에겐 오히려 고마운 마음까지 든다. 다짜고짜 욕을 하거나 멱살을 잡힌 직원도 있다. 한 번은 사무실 전화로 매장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퇴근 시간까지 약 3시간 동안 항의 전화를 끊지 않는 일도 있었다. 본사 지시니 따르지 않을 수도 없고 잠잠해질 때까진 총알받이 신세다”고 하소연했다.
샤넬 매장이 입점해 있는 백화점도 입장이 난감하긴 마찬가지다. 대구의 한 백화점 관계자는 “샤넬 매장에서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한 고객들이 점장 사무실까지 찾아온다. 백화점 차원에서 해결책을 내놓으란 것이다. 항의전화도 너무 많이 와서 샤넬 본사 측으로 바로 전화를 돌리고 있을 지경”이라며 “항의를 하다 펑펑 우는 손님도 있고 욕을 하기도 한다. 올해 가방을 샀는데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으니 환불해 달라, 브랜드 가치가 떨어져 사용하기 싫다 등 환불 이유도 가지각색이다”고 말했다.
샤넬보다 앞서 가격을 내렸으나 뒤늦게 소문이 퍼진 스위스 명품 시계 브랜드 태그호이어 매장도 분주한 모습이었다. 태그호이어는 지난달 2일부터 인기가 높은 제품들의 가격을 최대 27%까지 인하했다. 이 역시 유로화 약세와 스위스 프랑 강세 등 환율에 따른 시장별 가격차를 조정하기 위해 글로벌 본사 차원에서 내려온 지시였다.
태그호이어 청담부티크 전경.
손님이 뜸한 평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의 한 백화점 매장을 찾았는데 응대는커녕 계속 울려대는 전화를 받느라 혼이 쏙 빠져있었다.
“가격 인하된 것이 맞습니다. 백화점에서도 할인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습니다.”
“본사에서 내려온 지시로 저희들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수없이 전화기가 울렸지만 직원은 단 두 마디만 되풀이했다. 이 직원은 “대중적인 브랜드가 아니라서 그런지 가격 인하 정책이 크게 알려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샤넬이 가격을 내리면서 우리 브랜드 소식까지 퍼져 이제야 문의가 많아졌다”며 “단순히 가격 인하가 진짜인지 묻는 고객들이 대부분이고 가끔 의심을 하는 경우도 있다. 품질이 나빠진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환불 때문에 얼굴을 붉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앞서의 직원은 “남성 손님들이 절대적으로 많고 대부분이 마니아층이나 예물로 구입한 경우다. 그래서 그런지 기존에 물건을 구입한 고객들도 환불이나 교환 문의는 예상보다 많지 않다. 평소보다 바쁘긴 하지만 샤넬에 비하면 양반 수준”이라고 말했다.
갑작스러운 가격 인하에 백화점 관계자나 매장 직원들이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그래도 생계와 직결된 이들보다는 사정이 나은 편이다. 중고 명품을 다루거나 구매대행을 하는 업체들은 ‘샤넬 쇼크’라며 비명을 지르고 있다. 롯데백화점 본점 인근에 위치한 한 중고 명품 판매 업체를 찾았더니 이곳 역시 전화벨 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겨우 틈을 내 직원과 만났는데 “소리만 요란한 빈 수레”라며 한숨부터 내쉬었다.
이 직원은 “샤넬은 인기도 좋고 가격도 내리질 않아 중고 업체들이 선호하는 브랜드다. 그만큼 물량을 많이 확보해둔다. 그런데 이번 가격 조정으로 매입가와 백화점 판매가 격차가 줄어들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며 “오래전 저렴한 가격에 물건을 확보해 둔 곳은 재고 처리에 좋은 기회일 수 있겠으나 최신 제품을 다루는 업체들은 죽을 맛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가격을 인하해 팔고 있지만 속이 쓰리다”고 말했다.
구매대행 업계 역시 사정이 다르지 않다. 그동안 샤넬은 유럽과 국내 가격 격차가 커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해왔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상황이 역전됐다. 가격 인하로 구매대행을 신청했던 고객들의 취소가 줄줄이 이어지고 있는데다 앞으로도 큰 수익을 기대하기는 어렵게 됐다.
명품 브랜드의 가격 인하라는 작은 날갯짓이 바다 건너 한국에 몰고 온 영향은 그 어떤 태풍보다 강력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