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전설적 록스타 버디 홀리는 1959년 록 밴드를 꾸려 순회공연을 하던 도중 전세기가 추락해 세상을 떠났다.
1959년 1월 23일에 위스콘신의 밀워키에서 시작한 투어의 가장 큰 문제는 짧은 기간 동안 너무 많은 도시를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연은 매일 있었다. 더 큰 문제는 투어 버스가 심하게 낡았다는 것이었다. 추운 겨울 날씨였지만, 버스의 난방장치는 고장 나 있었다. 멤버들 사이엔 감기가 돌고 있었고, 칼 번치는 동상에 걸려 병원 신세를 졌다. 공석이 된 드럼 자리는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소화해야 했다. 스쿨버스 하나를 구해 교체했지만 사정을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들은 2월 2일에 아이오와의 ‘클리어 레이크’라는 지역에 도착했다. 원래 그곳에선 공연이 없었지만, 미네소타의 무어헤드로 가기 전에 하루 묵어가는 곳이었다.
<라밤바> 모델 리치 발렌스
비행기엔 조종사를 제외하고 세 명만 탈 수 있었다. 일단 버디 홀리가 탔다. 베이시스트 제닝스가 타려 했으나 감기에 걸려 있던 리처드슨이 양보해달라고 했다. 홀리는 제닝스에게 농담으로 “이 날씨에 그 버스 타고 가다간 다 얼어 죽을 거야”라고 말하자, 제닝스는 “너희들은 비행기 사고가 날지도 몰라”라고 응수했다. 이후 제닝스는 그때 이 말을 한 것을 평생 후회한다고 했다. 나머지 한 자리는 리치 발렌스와 기타리스트 토미가 동전 던지기로 정했다. 발렌스가 타게 되었다. 디무치는 1인당 36달러가 너무 비싸다며 처음부터 버스에 올라탔다.
2월 3일 새벽 1시 즈음, 고도 900미터엔 가볍게 눈이 내리고 시속 30~50킬로미터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비행기가 이륙한 후 날씨는 악화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무선 교신이 끊겼다. 다음 날 아침 항공사 대표인 허버트 드위어는 자신의 세스나 비행기를 타고 사고 현장을 찾아 헤맸다. 공항의 북서쪽 10킬로미터 지점에 잔해가 있었다. 옥수수 밭을 가로지른 비행기는 170미터 정도 얼어 있던 땅을 미끄러져 철조망에 걸려 있었다.
비행기 추락 사고 현장.
경찰이 도착했고 검시관은 갑작스럽게 뇌에 가해진 엄청난 충격이 사인이라고 진단했다. 이후 민간항공위원회가 조사에 착수했다. 일단 조종사 로저 피터슨은 악천후 상황 비행 경험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가 연습했던 기종은 보난자가 아니었고, 흐린 날씨도 별빛조차 없는 흐린 날씨 속에서 지평선을 분간하지 못하는 착각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비행기는 시속 270킬로미터의 속도로 오른쪽 날개가 먼저 땅에 부딪혔는데, 당시 조종사는 자신이 하강하는 것이 아니라 상승한다고 착각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상 악화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들었다면, 그런 날씨에서 비행 경험이 없었던 조종사가 비행을 연기했을 거라는 얘기도 나왔다. 전도유망한 뮤지션 세 명의 갑작스러운 죽음. 미국의 젊은이들은 충격 속에서 애도를 표했고, 그들은 젊은 전설이 되었다.
하지만 죽음의 진실은 여전히 미궁 속에 있다. 2007년, 리처드슨의 아들은 아버지의 사체를 무덤에서 다시 꺼내 검시를 의뢰했다. 리처드슨은 네 명 중 가장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었고,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잔해에서 꽤 떨어진 곳에 그의 주검이 있었던 것. 사고 현장에서 버디 홀리의 22구경 권총이 발견되었는데, 리처드슨의 아들은 돌발적인 총기 오발 사고가 혹시 사고에 관련 있었는지, 혹은 아버지가 사고 이후 즉사하지 않고 도움을 청하러 가던 중에 죽은 건 아닌지, 제대로 조치가 취해졌다면 살릴 수도 있었던 건 아닌지 궁금했던 것. 하지만 검시 결과, 리처드슨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엄청난 다중 골절에 의해 즉사한 걸로 판명되었다.
그리고 올해 3월 3일, L.J. 쿤이라는 비행기 조종사가 사건의 진실에 대해 밝혀달라고 국가운수안전위원회에 요구했다. 사고 원인이 조종사의 실수가 아니라 기체 결함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비행기의 오른쪽 방향타와 연료 계기판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며, 비행기 안에서 네 명의 무게 배분이 부적절해 평형 상태가 무너졌을 것이고, 비상 착륙을 시도하던 중 사고가 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조사 중인 이 사건은, 내년 정도 그 결과가 나올 예정이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