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5일 조응천 전 청와대 비서관이 검찰 조사를 위해 서울중앙지검으로 출두하는 모습. 아래 작은 사진은 그가 최근 개업한 해물음식점 전경.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여권과 줄이 닿아 있는 법조계 인사는 정윤회 문건 관련 재판이 결국 정치적인 판단에 따라 진행될 사건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이런 이유로 문건 관련 재판을 맡고 있는 변호사들은 사실상 손을 놓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청와대가 정치적으로 적절한 타이밍을 결정해 줄 때까지 재판은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문건을 직접 작성한 박관천 경정만 유일하게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으며, 재판은 이제 겨우 시작하는 단계다.
가장 눈길을 끄는 인사는 청와대 민정수석실 공직기강비서관이었던 조응천 씨다. 부장검사 출신의 조 전 비서관은 변호사 개업 대신 “정직한 육체노동이 하고 싶어서” 식당일에 뛰어들었다. 그는 지난 3월 31일 서울 서교동 홍대입구역 근처에 전복을 위시한 해물요리전문점 ‘별주부’를 개업했다.
지난 1일 별주부에서 만난 조 전 비서관은 자신을 사장이 아닌 ‘셔터맨’이라고 소개했다. 평일 초저녁이었지만 손님은 꽉 들어차 있었고, 조 전 비서관은 “아르바이트생이 갑자기 빠져 더 바쁘다”면서 쉴 새 없이 뛰어다니며 손님들 시중을 들었다. 잠시 휴식을 위해 담배를 피우러 밖에 나간 조 전 비서관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지난 1일 모바일 메신저 서비스 등을 통해 식당 홍보 메시지가 빠르게 퍼지며 일반인에게까지 소식이 전해졌다. 조 전 비서관은 “그제(3월 30일) 가오픈을 하고 어제(3월 31일) 정식 오픈을 했는데 홍보를 하지 않았더니 손님이 너무 없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지인들에게 문자 메시지를 넣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메시지 내용은 이랬다.
“신선해물전문점 ‘별주부’를 개업했습니다. 편하실 때 한번 들러주세요. 허겁지겁, 우왕좌왕, 얼렁뚱땅 여러 가지 미숙하겠지만 시스템이 안착할 때까지 너그럽게 봐주세요.”
상호 작명과 관련, 지난해 문건유출 파동으로 구속 직전까지 갔던 경험으로 이른바 ‘용궁 갔다 왔다’는 속설을 떠올리는 차원에서 ‘별주부’로 정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조 전 비서관은 “아내가 소주병 뚜껑으로 별을 잘 접어서 ‘별주부’로 지었다”고 농을 던졌다. 주 메뉴가 전복이라는 점에서 ‘전화위복’도 고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전’은 맞는데, ‘복’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로, 바람일 뿐이다. 나는 팩트(사실)만 말하는 사람이다”며 뼈 있는 농담을 이어갔다.
화제를 본론으로 돌려 지난 3월 27일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의 첫 공판에서 마주친 자신의 직속 부하였던 박관천 경정과의 오랜만의 재회에 대해서 물었다. 그는 “(박)관천이가 그날 늦게 와서 대화는커녕 인사도 못 나눴다”고 말했다. 검찰이 ‘정윤회 문건’을 허위로 결론 낸 것에 대해서는 “(문건은) 청와대에서 있었던 것들이 총화된 것”이라며 기존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현 상황에 대해서는 “나를 구속시켰어야 매조지 됐을 사건”이라며 불만을 에둘러 표현했다. 그는 대구 사투리로 “내(나)는 이제 꽃입니더. 나비가 날아 오이소”라고 말하며 가게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 전 비서관과 함께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은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다. 박관천 경정이 지난 10일 청와대 문건 유출 혐의에 대한 두 번째 공판에서 ‘박지만 EG 회장에게 전달된 문건은 모두 당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의 재가를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 가운데, 김 전 비서실장은 최근 ‘성완종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며 또 한 번 거센 풍랑을 만났다. 김 전 실장으로선 ‘산 넘어 산’인 셈이다. 작고한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에게 10만 달러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된 김 전 실장은 매우 이례적으로 지난 13일 오전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 두 곳에 잇따라 출연해 “너무나 억울하다”, “성 전 회장이 원망스럽다” 등의 발언을 적극 쏟아 냈다. 그는 또한 처음엔 “비서실장이 된 다음(2013년 8월)엔 성 전 회장을 만난 적이 없다”고 했다가 지난 16일 “만난 적은 있지만 돈은 받은 적이 없다”고 말을 바꿔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다.
문건에 등장하는 ‘십상시’ 중에서도 핵심 중 핵심으로 꼽히는 이른바 ‘문고리 권력 3인방’은 야당 등의 강력한 퇴진 요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박 대통령의 곁을 지키고 있다. 이재만 청와대 총무비서관, 정호성 부속비서관과 달리 안봉근 국정홍보비서관만 지난 1월 청와대 비서진 개편 과정에서 제2부속실이 폐지되면서 홍보수석실 산하 국정홍보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을 뿐이다.
지난 3월 말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가 관보를 통해 공개한 청와대 비서진의 ‘2015년도 정기재산변동사항’에 따르면 세 비서관은 모두 지난해 본인과 가족 등의 명의로 서울 강남 지역의 아파트를 매입한 것으로 나타나 야당 등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박 대통령의 친동생이자 박 경정 등으로부터 청와대 문건을 직접 전달받은 것으로 드러난 박지만 EG 회장은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 재판에 증인으로 채택돼 4월 말께 증인으로 법정에 설 것으로 보인다. 정윤회 문건의 직접 당사자인 정윤회 씨는 서울 모처에서 은거하며 조용히 자신과 관련한 재판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연호 기자 dew901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