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학자인 전정혁 선생이 신흥무관학교 마지막 본교인 ‘대두자’ 옛터를 가리키고 있다. 탁 트인 옥수수밭으로 변해 학교와 관련한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2탄] 부흥과 폐교
<일요신문>은 4월 7일, 신흥무관학교의 두 번째 교사인 ‘합니하’ 학교 옛터를 뒤로하고 마지막 본교인 ‘대두자’ 학교 옛터로 자리를 옮겼다. 현지 조선족 출신 향토학자인 전정혁 선생의 안내에 따라 찾아간 대두자 학교 옛터는 기존의 교사보다 한참 북단에 위치해 있었다. 당시 학교 운영자들이 대두자로 교정을 옮긴 이유는 현장에서 찾을 수 있었다.
기존의 합니하가 견고한 ‘요새’였다면, 대두자는 한마디로 광활한 ‘대지’였다. 상전벽해, 현재 대두자 학교의 옛터는 탁 트인 옥수수 밭으로 변해 학교와 관련한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다만 당시 학교 운영자들이 1919년 3·1 운동 직후 급격히 늘어난 입학생들을 감당하기 위해 대지를 찾았다는 사실은 자명해 보였다. 기존의 합니하는 보안에는 큰 장점을 지닌 요새였지만, 폭발적으로 늘어난 입학생들을 감당하기엔 분명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지청천 장군
기존의 합니하 교사는 없애지 않고, 분교로 이용됐다. 이밖에도 부근에 한 개의 분교를 더 개설하기도 했다. 1920년 당시 사료에 따르면, 본교와 분교 두 곳에서 배출한 졸업생수는 2000~3000명으로 추산되니 그 규모를 짐작케 한다.
하지만 신흥무관학교의 부흥은 오래가지 못한다. 대두자 학교로 옮긴 지 불과 1년 만에 학교가 문을 닫고 만 것이다. 전정혁 선생은 “부흥과 동시에 학교가 폐교된 이유는 크게 내분과 탄압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우선 폐교의 단초를 제공한 첫 번째 이유는 ‘내분’이었다. 1919년 7월 합니하 분교 소속 학생 윤치국이 본교인 대두자 학생들을 구타해 사망에 이르게 했다. 이유는 용무를 묻는 태도가 불손했다는 것. 겉으로 드러난 사실은 학생들의 단순한 사고였지만, 그 내막엔 당시 본교와 분교의 내분이 컸다. 이에 중국 당국은 학교에 학무정지 조치를 내렸다.
앞서의 내분보다 폐교의 더 큰 이유는 역시 일제의 탄압이었다. 당시 일제는 갖가지 이유를 들어 중국 동북지방의 독립운동세력 조직을 와해하고 주요 인물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신흥무관학교도 무사하지 못했다. 이따금씩 찾아오는 마적들 역시 일제와 알게 모르게 결탁된 상황이었다. 중국 정부 역시 일제의 압박을 못 이겨, 조선 독립운동세력 탄압에 동조했다.
결국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8월 폐교됐다. 불과 10년 남짓한 역사지만, 신흥무관학교가 당시 조선의 독립운동사, 특히 항일무장투쟁에 끼친 영향력은 막대하다. 전정혁 선생은 “신흥무관학교는 단순히 조선뿐 아니라, 당시 중국의 항일투쟁사에서도 큰 영향을 끼쳤다”며 “통화·류허 지역의 근대 교육 및 문화에 영향을 준 것은 물론 일부 졸업생들은 중국의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했다”라고 덧붙였다.
특히 지청천 장군과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다수는 독립혁명무장단체인 ‘서로군정서’를 구성해 1920년 6월, 홍범도 장군과 함께 봉오동 전투를 치르는 한편, 그해 10월에는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부대(북로군정서)와 청산리 전투에 나서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한다.
양정우열사릉원의 조각상들. 맨 오른쪽은 특유의 치마저고리 등 조선의 여인으로 보인다. 오른쪽 사진은 기념관 안에 전시되어 있는 신흥무관학교 출신 양림 열사.
양정우열사릉원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당시 조선인들의 발자취가 보였다. 릉원 입구 왼쪽에는 일제에 맞서 투쟁한 열사들을 상징하는 한 무리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 동상 무리의 가장 우편에 한 여성 대원상이 눈에 띄었다. 그 여성은 조선 특유의 치마저고리 위에 총탄을 두르고 결연하게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전정혁 선생에 따르면 해당 동상은 중국 항일투쟁사에서 조선인들이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기념관 안에는 수많은 열사들이 기려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 신흥무관학교 출신인 양림 열사(본명 김훈)가 자리하고 있다. 양림 열사는 1919년 3·1 만세운동 직후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한 인물. 훗날 서로군정서 소속으로 청산리 전투에 참가했으며 그 후에는 중국에 망명해 항일무장투쟁을 이어갔다. 그는 1936년 중국 홍군 15군단 75사 참모장으로 일제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릉원에는 신흥무관학교 출신은 아니지만, 중국의 항일무장세력에 참여해 전사한 수많은 조선인들도 있다. 이곳에 등재된 중국 동북지방 항일열사 100여 명 가운데 무려 20여 명은 조선인이었다. 앞서 조선인을 상징한 여성상에서도 알 수 있듯, 조선 여성 열사들의 활약상이 눈에 띄었다.
특히 중국 현지에서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는 ‘8명의 여전사’ 이야기는 기념관에서도 거의 한 면을 차지하며 회자되고 있었다. 1938년 10월, 일제 헌병대에 쫓기다 총탄이 떨어져 그대로 자결한 여성 열사 8명의 이야기다. 더 놀라운 점은 그 8명의 여전사 가운데 2명이 조선인이었다는 것. 안수복, 이봉선이라는 이름의 여전사는 당시 다른 6명의 중국 여전사와 함께 물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중국에서 영웅으로 기려지고 있는 이러한 조선인 열사 대다수가 정작 본국에서는 철저한 무관심속에서 잊히고 있다. 물론 이념 탓이 컸다. 중국 동북지방 곳곳에서 목격되는 당시 조선인들의 항거는 이제야 후손들에 의해 조명되고 있지만, 정작 당시 당사자들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다시 본래 이야기로 돌아가, 신흥무관학교의 폐교 당시 상황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지청천을 비롯한 학교 주축세력들과 졸업생들은 ‘서로군정서’를 편성해 본격적으로 일제와 전투를 치렀다. 이는 곧 ‘양민학살’이란 보복을 낳는다. <일요신문>은 그 처절한 흔적들을 찾아 나섰다.
<다음호 계속>
중국 지린=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최초 여성 의병장 윤희순 의사 시부에서 아들로…항일 정신 이어져 윤희순 의사 1912년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환런(桓仁)에 세워진 ‘노학당’ 역시 신흥무관학교와 관계가 깊다. 노학당은 조선 최초의 여성 의병장으로 유명한 윤희순 의사가 세운 항일인재 양성 민족학교다. 사료에 따르면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인 우당 이회영 선생이 이 학교 설립에 물심양면으로 도우며 직접 관여했다고 한다. <일요신문>은 4월 8일, 환런에 위치한 노학당 옛터를 직접 찾았다. 노학당 옛터 한 가운데는 지난 2002년 중국 정부의 승인으로 세워진 유지비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난해 한 정신이상자의 소행으로 비가 망가진 이후 최근에서야 한국 독립기념관의 지원으로 개·보수 됐다고 한다. 노학당이 세워진 마을은 ‘남괴마자’라 불리는 부락이었다. 당시 이 마을엔 수많은 조선인들이 한데 모여 살고 있었고, 이에 따라 조선인들을 위한 항일 민족학교가 필요했다. 1912년 설립된 노학당은 1915년 폐교될 때까지 50여 명의 항일 인재를 양성했다고 전해진다. 노학당비. 노학당은 신흥무관학교 폐교 이후 윤희순 여사가 세운 항일인재 양성 민족학교다. 1911년, 시아버지와 남편을 따라 중국 환런으로 망명한 윤희순 의사는 앞서의 노학당을 설립해 인재를 양성했다. 1915년 일제의 탄압으로 노학당이 폐교된 뒤에도 ‘조선독립단’이라는 의병 조직을 꾸려 항일 운동을 전개했다. 윤희순 의사는 1935년 그의 아들이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돼 고문을 받다 죽은 지 10일 만에 죽음을 맞이했다. [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