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친박 핵심인사들이 연루된 ‘성완종 정국’ 속에서도 정치개혁이라는 프레임을 꺼낸 것에 대해 당내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일요신문 DB
사실 이완구 총리의 사의표명이 나오기까지 청와대와 새누리당 등 여권 수뇌부는 긴박하게 움직였다. 김무성 대표 등 새누리당 지도부는 지난 20일 이 총리와 성완종 전 회장이 1년간 210여 차례 전화통화를 했다는 보도 등이 나오자, 4·29 서울 관악을 보궐선거 지역에서 열린 현장 최고위원회의에서 이 총리 거취 문제와 관련해 ‘박 대통령 귀국 때까지 기다리자’는 기존 입장을 바꿔 ‘귀국 전 사퇴불가피’로 입장을 정리했다. 야당이 이 총리 해임건의안 제출을 구체적으로 검토하며 압박한 것도 주효했다. 여당 내부의 부정적 인식으로 인해 자칫 국회 본회의에서 해임건의안이 통과되는 최초의 총리가 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왔기 때문이다.
4월 16일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단독회동을 가진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기자간담회를 갖고 있는 모습.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김무성 대표는 20일 정오께 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당의 입장을 전달했다. 이 비서실장은 조윤선 정무수석을 통해 친박 핵심관계자들의 조언을 구했다. 이후 이 비서실장은 이날 오후 페루를 방문 중인 박 대통령에게 당의 입장과 국내 여론 동향을 보고했다. 이 비서실장의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당의 뜻을 존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는 후문이다.
이후 과정에선 청와대 정무특보이자 이 총리의 원내대표 재임 시절 원내수석부대표로 호흡을 맞췄던 김재원 의원이 메신저로서 역할을 했다. 김 의원은 20일 오후 4시 30분께 청와대를 찾아 이 실장을 만났고, 이 비서실장은 박 대통령의 의중을 김 의원에게 전달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 총리가 ‘성완종 리스트’ 파문 이후 유일하게 전화통화를 한 당내 인사가 김재원 의원인 것으로 안다. 김 의원은 이 총리의 거취와 관련해 ‘박 대통령 귀국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입장을 계속 유지했다”며 “이 비서실장과 김 의원이 만났을 때 당시 분위기가 무거웠다고 하더라”고 귀띔했다. 김 의원은 오후 5시께 이 총리에게 박 대통령의 의중을 전했고, 이때 이 총리는 사의표명의 뜻을 굳힌 것으로 알려졌다. 이 총리는 곧바로 공관으로 퇴근했고, 병원을 들른 뒤 오후 9시께 공관에 도착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사이에 이 총리는 이 비서실장과 만나 박 대통령의 뜻을 정확하게 전달받았을 가능성이 거론된다.
이 총리는 오후 11시 전후 보고라인을 통해 최종 사퇴 의사를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총리 본인이 직접 박 대통령에게 연락하지 않고 이 실장을 통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박 대통령은 이 총리의 사의 표명 보고를 받고 “안타깝고 총리의 고뇌를 느낀다”며 “이 일로 국정이 흔들리지 않고 국론분열과 경제 살리기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내각과 비서실은 철저히 업무에 임해주기 바란다”고 사실상 사의수용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 총리의 사의로 ‘식물총리’라는 부담을 덜게 된 박 대통령은 27일 귀국한 뒤 정국 돌파 카드로 ‘정치개혁’을 뽑아들 가능성이 높다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박 대통령은 순방을 떠나기 전인 지난 15일 세월호 1주기 관련 현안점검회의에서 ‘성완종 리스트’ 파문을 거론, “이 문제는 정치개혁 차원에서 반드시 바로잡고 넘어가야 할 일로, 부정부패에 책임 있는 사람은 누구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번 기회에 우리 정치에서 과거부터 현재까지 문제가 있는 부분은 정치개혁 차원에서 한번 완전히 밝힐 필요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박 대통령은 이 총리가 사의를 표명했을 때도 “검찰은 정치개혁 차원에서 확실히 수사해 모든 것을 명백히 밝혀내 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박 대통령이 친박 핵심인사들이 연루된 ‘성완종 정국’ 속에서도 ‘정치개혁’이라는 프레임을 꺼낸 것은 부정부패 척결이라는 국정 기조를 포기하지 않고 이어가면서 국정 운영의 동력을 살려나가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으로 풀이된다. 이는 과거 박 대통령이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 대표와 비상대책위원장 시절 불법정치자금 비리에 연루됐던 인사들에 대해 출당 조치 및 검찰 수사를 의뢰하는 등 선제적으로 대응해 위기를 돌파했던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정치개혁의 대상에 ‘과거’를 포함시키면서 성 전 회장이 참여정부 당시 두 차례 특별사면을 받아 ‘특혜 특사’ 의혹을 제기되고 있는 것을 겨냥했다. 정국의 주도권을 둘러싼 기싸움에서 야당의 공세에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겠다는 전략적 포석도 깔려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정치개혁’ 화두 제시에 대해 비판적 여론도 만만치 않다. ‘성완종 리스트’에 오른 인사들 가운데 허태열·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이 비서실장, 유정복 인천시장·서병수 부산시장,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 등에 대한 금품수수 의혹은 지난 2007년 대선후보 경선과 2012년 대선과 관련한 것이어서 사실상 박 대통령의 대선자금과의 연관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연결고리가 확실한 상황에서 박 대통령이 ‘참모들이 나 몰래 한 행동’이라며 무책임하게 혼자만 발을 빼는 것은 정치 도의상으로도 적절치 않다는 게 중론이다. 이런 여론이 확산될 경우 이 총리의 경우처럼, ‘정치개혁’의 칼끝이 박 대통령을 직접 향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2003년 대선자금 수사 때 ‘양쪽’에 대한 수사를 공개 주문해 결국 안희정 등 핵심참모들을 잃고 정권 초반부터 힘든 길을 가야 했다. 박 대통령이 ‘남의 일’처럼 성완종 게이트를 정치개혁의 프레임으로 치환시켜 정국을 돌파해보고자 하지만 여론 추이에 따라 그것이 양날의 칼로 바뀔 위험성도 있다.
그런데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성완종 리스트’와 관련한 특검 도입을 요구하면서 “불법대선자금 수사”라고 지칭한 것도 앞서의 노무현 정권 경험칙을 고려한 것으로도 보인다. 지난 2003년처럼 대선자금 전체를 까자고 나올 경우 여권의 비리가 더 크게 드러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 김무성 대표와의 독대 당시 ‘성완종 리스트’ 파문과 관련해 “진실 규명에 도움이 된다면 특검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밝힌 만큼 문 대표의 특검 제안을 수용할지도 주목된다. 새누리당이 문 대표의 ‘투트랙 특검’ 제안에 대해 특검의 근거와 범위 등을 놓고 부정적 입장을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개혁’을 외친 박 대통령이 어떤 입장을 보일지 눈길을 끌고 있어서다. 여권의 한 핵심인사는 “특검 협상은 국회에서 여야가 논의할 사안”이라면서도 “상황에 따라 ‘성완종 정국’을 돌파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박 대통령이 적극적인 입장 표명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
박현경 언론인
박근혜 지지율 여론 조사 ‘집토끼’ 움직임이 심상찮다 박근혜 대통령이 ‘성완종 리스트’ 파문에 직격탄을 맞고 있는 가운데, 박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이라 할 수 있는 대구·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한 영남과 60대 이상 노년층의 민심이 심상치 않다. 지역적으로는 대구·경북과 세대별로 봤을 때 60대 이상에서 박 대통령의 직무긍정률이 큰 폭으로 하락해 눈에 두드러졌다. 대구·경북 지역 직무긍정률은 51%로, 지난주 65%에 비해 14%포인트나 하락했다. 또한 60대 이상의 직무긍정률은 전주 71%에서 금주 61%로 10%포인트나 줄어들었다. 타 여론조사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리얼미터’가 지난 13일부터 5일간 전국 2500명의 유권자를 대상으로 전화면접 및 자동응답 방식으로 무선과 유선전화를 각각 50%씩 병행한 임의걸기 방식으로 실시한 여론조사(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2.0%포인트) 결과,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전주보다 1.5%포인트 하락한 38.2%로 나타났다. 해당 업체의 조사에서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거의 대부분의 계층에서 하락했다. 특히 세대별로는 50대(4.7%포인트 하락)와 60대(3.4%포인트 하락)에서 주로 빠진 것으로 조사됐다. 지역별로는 한국갤럽과 달리 대전·충청·세종(5.6%포인트 하락), 부산·경남·울산(4.5%포인트 하락)의 하락폭이 컸다.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한 영남 지역과 60대 이상 지지층은 박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으로 평가받아왔다는 점에서 박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성완종 리스트’ 파문으로 인해 박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의 이탈이 가시화되자, 청와대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 보인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지지율이라는 게 오를 때도 있고, 내릴 때도 있지 않느냐”라면서도 “박 대통령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는 상황에서 핵심 지지층의 이탈이 가속화될 경우엔 지지율 하락폭이 커질 수 있어 우려스럽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와 달리 청와대 일각에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의혹이 제기된 이완구 국무총리가 사의를 표명하면서 ‘성완종 정국’의 출구가 마련된 만큼 조만간 지지층의 결집이 이뤄질 것이라는 조심스런 기대도 엿보인다. 또 다른 관계자는 “지난해 세월호 참사와 비선실세 논란, 연말정산 파동 등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지지율을 회복해 나갔다”며 “‘성완종 리스트’ 파문은 여야를 불문하고 성 전 회장과 관련한 각종 의혹들이 있는 만큼 박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들이 결집할 모멘텀들이 있을 것으로 본다”고 내다봤다. [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