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탄] 경신참변 현장에서
<일요신문> 취재진은 지난 4월 8일, 중국 퉁화(通化)에 위치한 부강향(富江鄕)이란 마을을 찾았다. 이곳에 경신참변이 한창이었던 1920년 11월, 일본군 토벌대에 의해 살해된 배달학교 교사 7명이 묻힌 무덤이 있다. 이른바 ‘배달학교 7인 열사릉원’이다. 당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배달학교 7인의 열사릉원은 비교적 잘 관리되어 있었다. 향토학자 전정혁 선생은 술과 과일을 내놓고 열사들을 참배했다.
배달학교는 1918년, 평안북도 정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조용석 열사가 세운 민족학교다. 이 학교는 당시 인접했던 신흥무관학교와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조용석 열사는 신흥무관학교 창립에 근간이 됐던 ‘한족회’의 간부로 있었다. 또한 신흥무관학교 창립자인 이시영·회영 형제가 배달학교 설립에 적극 가담했다. 실제 배달학교의 교과과정은 신흥무관학교의 그것에 준하여 운영됐다. 이 때문에 배달학교는 신흥무관학교의 자매학교라 봐도 무관했다.
1920년 11월 3일, 학교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당시 일제 정규군으로 편성된 토벌대가 배달학교를 지역 항일운동의 근거지로 지목하면서 습격한 것. 토벌대는 학교 설립자이자 교장으로 재직 중이었던 조용석 열사를 포함해 김기선, 조동호, 승대언, 승병균, 최찬화, 김기준, 교직원 7명을 인근 야산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토벌대는 그들을 나무에 묶어 총칼로 찔러 죽였다. 시신은 땅 구덩이에 그대로 팽개쳐졌다. 이후 학교는 일제에 의해 자연스레 폐쇄됐다.
조선족 향토학자 전정혁 선생에 따르면, 당시 사건은 그대로 묻힐 뻔했다고 한다. 불행 중 다행일까. 현장을 우연히 지나가던 한 중국인이 이를 목격, 일제의 만행이 알려지게 됐다. 소식을 접한 조선인들은 참혹하게 살해된 교직원 7명의 시신을 수습했고, 일제의 눈을 피해 조용히 장례를 치렀다.
취재진이 찾은 7인 열사릉은 한동안 방치되다 1996년, 중국 퉁화현 정부와 유족들의 협의로 복원됐다. 열사릉은 콘크리트 외벽과 철장으로 둘러싸인 채, 비교적 잘 관리되고 있었다. 7개의 무덤 각각은 얕은 대리석으로 감싸져 있었으며 그 주변은 전나무로 알맞게 꾸며져 있었다. 우연인지 그 주변에 중국 중앙정부 소속 유명 관리의 부친이 묻힌 가족묘가 이웃하는 바람에 진입로 역시 잘 다듬어져 있었다.
7개의 무덤 앞 중앙에 세워진 2m 남짓의 추모비 앞에는 누군가 얼마 전에 다녀간 듯, 술병과 꽃가지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취재진을 안내한 전정혁 선생은 미리 준비한 술과 과일을 내놓고 7인 열사들을 참배했다. 그러면서 그는 7개의 무덤을 일일이 다니며, 미안함과 감사함을 표했다.
1920년 10월부터 11월 사이, 중국 동북지역에서 발생한 경신참변은 일제가 조선인들을 상대로 자행한 최대 규모의 살육 사건이다. 당시 상해임시정부 소속 통신원의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이 당시 조선인 학살 사망자를 3664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특정 지역에서의 집계일 뿐이다. 그 장소와 시간의 범위를 넓혀보면 전문가들은 실제 희생자를 3만 명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경신참변은 일본의 정규군과 관동군은 물론 이에 협력하는 중국의 마적과 군벌세력까지 가담한 일-중 연합작전에서 비롯된다. 북간도 지역은 주로 일본 정규군이, 서간도 지역은 주로 관동군이 담당했다. 1919년 3·1 운동 직후 본토를 넘어 중국 동북지역에서도 항일세력의 활동이 활기를 띠면서 일제는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따금씩 일제 관공서를 상대로 각종 독립군 세력들의 습격이 발생하면서 토벌작전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한 것.
결정적인 사건은 지난호에서 언급했듯이 1920년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와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였다. 지청천 장군을 비롯한 신흥무관학교 출신자들이 대거 가담한 당시 전투는 일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고, 결국 일제는 그 보복 차원에서 광범위한 토벌작전에 나서게 된다.
당시 일제의 명목은 이른바 무장한 독립군 세력의 섬멸이었지만, 실제 살육의 대상 대다수는 이와 별다른 관계가 없는 조선인 양민들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희생자 중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부녀자들과 어린 아이들도 대거 포함됐다. 한 서양인 선교사는 중국 지린(吉林) 룽징(龍井)의 한 촌락에서 발생한 참상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촌락은 차례차례 매일 조직적으로 소각당하고 청년들은 사살됐다. (중략) 촌민들이 밖으로 나오면 늙은이가 됐든 어린이가 됐든 눈에 띄는 대로 사살했다. 총에 맞고도 죽지 않은 사람은 짚을 덮고 불로 태웠다. 새로 만든 무덤을 세어보니 31개였다. 용정에 돌아오니 일본 병사는 술에 취해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당시 일제에 의해 자행된 경신참변은 신흥무관학교의 관계자들을 주요 희생양으로 삼았다. 신흥무관학교 출신 독립운동가인 김산을 후원했던 안동희 목사는 경신참변 당시 일가족 전체가 변을 당했다. 당시 안 목사의 두 아들은 부모 앞에서 일본군에 의해 총칼로 난도질당했으며 안 목사 본인은 산 채로 매장됐다. 그의 부인은 충격을 이기지 못해 결국 강물에 몸을 던졌다.
신흥무관학교의 주요 창립자 중 한 사람인 일송 김동삼 선생의 아우 김동만 역시 경신참변의 희생자다. 김동삼 선생은 안동 출신으로 다른 설립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가산을 처분해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동참한 인물이다. 그는 훗날 지청천과 함께 서로군정서에 참여해 참모장을 지내며 항일 전투에 나서기도 했다. 그의 아우 김동만은 신흥무관학교 인근 삼광중학교라고 하는 민족학교에서 교장을 지낸 인물이다.
1920년 9월 25일, 일본군 기마대가 류허(柳河) 삼원포를 급습했다. 당시 마을의 청년 40명이 체포됐는데, 그 중 김동만을 포함해 독립군에 가담한 조선인 12명을 가려냈다. 당시 김동삼 큰며느리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은 무고한 양민들 앞에서 하나의 본보기로 항일투사 출신인 한 노인과 그 손자를 말꼬리에 매달아 끌고 다녀 죽게 했다고 한다. 그 참상을 지켜본 여자들 일부는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김동만을 포함한 나머지 12명의 조선인 역시 말꼬리에 끌려 다니다 한 고개 밑에서 총살당했다. 일본군은 그 시체의 목을 일본도로 내려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당시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한 김동만의 아들은 훗날 “당시 난 여덟 살에 불과했다. 하지만 당시 무섭고 참혹한 광경은 지금도 내 머릿속에 또렷하다. 영원히 잊을 수 없다”고 증언했다. 김동만의 부인은 결국 그 충격으로 정신병을 앓았고, 고향 안동으로 내려갔다. ‘7인 열사릉’ 앞에선 전정혁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벌써 95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해야 할 일이다. 이곳에 계신 분들은 정말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당시 그렇게 수만 명의 조선인들이 이국땅에서 학살을 당했다. 안타까운 점은 그 사건이 점점 잊혀간다는 것이다. 본국의 한국인들은 물론 희생자들의 후손인 중국 동북지역의 조선족들도 점점 잊고 살아간다. 이제 나 같은 향토학자들도 점점 명맥이 끊기고 있다. 앞으로 이러한 역사를 기억하고, 되새겨 나갈 사람이 없다. 경신참변의 상징인 이곳 7인 열사릉도 이제 재정비가 필요한데, 별 다른 도움이 없다. 어찌할지 모르겠다. 안타까울 뿐이다.”
중국 지린=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언론인 순국 1호 장덕준 기자 참상 알리려 스스로 불구덩이로… 일제에 의한 대규모 학살 사건인 ‘경신참변’ 때 언론인도 희생됐다. 1차 세계대전 직후였던 당시에도 전 세계에서 종군기자들의 취재활동은 적과 아군의 영역과 상관없이 보호받았지만, 일제에게 있어선 이러한 논리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장덕준 기자 장덕준 기자는 현지에서 일본 영사관과 토벌군 사령부에 종군할 것을 요청한 뒤, 조선인 양민학살 실상을 집중적으로 취재했다. 하지만 무고한 양민 학살 사건이 본토에 알려질 것이 두려워 한 일본군은 인근 용정 지역으로 자리를 옮기려던 장 기자를 살해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 이후 순직 언론인 1호로 기록됐다. 황해도 재령 출신인 장 기자는 1914년 <평양일일신문>의 주간을 지냈으며 <국문신문>과 <동아일보> 창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그는 1919년 3·1 운동 당시 일본 홋카이도로 가 고통 받고 있는 조선인 노무자들의 실상을 본토에 알리기도 했다. 그의 마지막 특파 취재였던 경신참변 당시 <동아일보>는 일제의 탄압에 의해 발행이 정지된 상황이었고, 종군 지원은 순전히 자기 의지였다고 한다. [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