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일인 29일 서울 관악구 난항동주민센터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한 유권자가 소중한 권리를 행사하고 있는 모습. 최준필 기자
지난 2월 새정치연합 최고위원 경선에 출마했던 A 후보 측 공보담당 관계자는 일부 기자들에게 ‘카톡’을 통해 “경선 여론조사 결과”라면서 여론기관 전문 업체가 실시했다는 조사 내용 요약본을 뿌렸다. 당원들과 일반 여론조사를 따로 실시하고, 경선룰에 맞춰 두 결과를 합산한 뒤 후보들 순위를 전체적으로 나열했다. 이 관계자는 A 후보가 1위로 나타난 이 결과를 토대로 “A 후보가 대세론을 형성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조사 대상과 방식, 질문 내용 등 구체적 내용이 담긴 ‘로 데이터’(raw data:원자료)를 제공해 달라는 제안에는 ‘내부 자료’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여론조사 기관 이름을 인터넷 검색해봤지만 동명의 홍보대행사 사이트만 나올 뿐 여론조사 기관은 나오지 않았다.
당 청년위원장(새정치연합) 같은 정무직조차 당원 선거로 뽑는 등 각종 선거가 계속 이어지는 상황이 되다 보니 선거 결과 예측을 수치로 나타내주는 여론조사도 덩달아 활용도가 높아지고 있다. 문제는 ‘설문의 과학’이라 불리는 여론조사가 작은 변수 조작만으로도 결과를 완전 뒤바꿔 버릴 수 있다는 것. 변수가 한끗만 빗나가도 정확한 여론 반영이 되지 않은 결과를 받아들게 될 수 있다. ‘수치’에 대한 신뢰도 때문에 여론조사가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지만 자칫 잘못된 결과의 ‘덫’에 빠질 우려도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야당의 유력 주자였던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후보는 막판 단일화 협상 과정에서 ‘여론조사 질문 문항’에 끝내 합의하지 못하고 논의를 중단했다. 안 후보는 ‘박근혜 후보와 맞붙었을 때 이길 것 같은 후보가 누구인가’를, 문 후보는 ‘누가 야권 단일후보가 됐으면 좋겠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단일후보를 뽑는 질문이지만, 안 후보 쪽은 ‘경쟁력’을, 문 후보 쪽은 ‘정통성’을 물었을 때 각각 선거 결과가 달라진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여론기관 업체와 조사 방식 등을 놓고도 이견을 벌였다. 변수 하나가 결과를 가른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4·29 재보궐선거는 여론조사 ‘무용론’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선거였다. 언론사와 각 정당, 후보 차원에서 다양하게 여론조사가 실시됐지만 어느 조사든 “실제 표심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광주의 경우 천정배 무소속 후보의 지지율은 레이스 내내 조영택 새정치연합 후보보다 15%~20%p가량 높았지만 이를 곧이 믿는 쪽은 없었다. 20대~30대 유권자가 많은 서울 관악을 같은 경우 유선전화 조사만으로는 이들의 여론을 확인하기 어려워 여론조사마다 결과가 들쭉날쭉했다.
여론조사 업체들은 이 같은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응답률이 낮은 계층에 가중치를 부여해 반영하고 있지만, 표본이 워낙 적다보니 신뢰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여론조사기관의 한 관계자는 “표본 수가 무조건 많다고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유의미한 결과를 얻기 위해 상황별 최소한의 표본 수는 정해져 있다. 예를 들어 1000명을 모았다고 해도 20대 응답자가 30명 정도에 불과하다면 의미 있는 자료라고 보기 어렵다. 그럴 때 가중치를 적용하는데 그걸로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이번 관악을 선거에서는 정태호 후보가 오신환 후보와 0.2%p 차 초접전 양상에 들어갔다는 ‘리서치뷰’ 여론조사 내용을 플래카드로 지역구 곳곳에 내걸었다가 선관위로부터 선거법 위반 결정을 받고 철거하는 촌극도 벌어졌다. 리서치뷰 대표는 참여정부 청와대 행정관 출신이라 함께 근무했던 정태호 후보에 유리한 조사를 해준 것 아니냐는 의심이 나왔다.
정치권에서는 ‘여론조사 결과가 들쑥날쑥할 때는 새누리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의 조사가 제일 믿을 만하다’는 얘기가 있다. 내부 전략 분석용 자료지만 앞선 여러 선거에서 상당한 적중률을 보이다보니, 언론에서도 여론 분석용으로 이를 요청해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새누리당 관계자는 “정확한 상황 판단을 해 대표에게 보고해야 하는 조사라 정확도에만 중점을 맞추다보니 그런 얘기가 나오는 것 같다”고 했다. 신뢰도가 높다는 얘기가 돌다 보니, 가끔은 ‘여의도연구원 여론조사’라는 이름을 단 허위 조사가 ‘찌라시’로 돌기도 한다.
앞서의 여론조사기관 관계자는 “정확한 여론조사를 위해서는 표본의 종류·숫자와 조사 방식, 보정치 적용 등이 과학적으로 분석돼야 한다. 하지만 이를 완벽히 충족시키기는 여건상 쉽지 않고 비용도 많이 든다. 그러다보니 ‘근사치’를 노리는 여론조사 의뢰가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선거 전략을 전문으로 하는 한 보좌관은 “여론조사는 큰 틀에서 선거 판세를 확인해 보는 정도 외에는 큰 의미가 없다”며 “여론조사 결과에 의지해 전략을 짜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이용해 분위기를 끌어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권자들에게 ‘우리가 이만큼 앞서고 있다’거나 ‘우리가 열세이기 때문에 결집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활용하는 경우가 더 크다는 얘기다.
이런 사실은 캠프 관계자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다. 자기 진영에 그다지 불리한 내용이 아니라면 이 같은 여론조사 내용을 활용하기도 하고, 특정 업체의 조사는 ‘무시하라’고 조언하기도 한다. 지난 새정치연합 경선 캠프의 한 관계자는 “여론조사를 몰래 돌릴 때 업체명을 실제와 다르게 바꾸기도 한다. 언론은 그걸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지만, 상대 후보를 당황스럽게 할 수는 있다”고 말했다. 역(易)의 역을 노리는 수준이다.
다만 이런 경우는 ‘공표되지 않는’ 여론조사라는 점이 분명해야 한다. 공공연히 알려져도 공식적으로는 ‘내부 참고용 자료’일 뿐이다. 언론에서도 확실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게 아니라면 이를 보도할 수 없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여론조사 보도의 경우 응답률과 조사기관명, 조사대상 등 필수 고지 항목을 함께 보도하도록 하고 있다.
선관위는 “일부 언론에서 필수 고지 항목을 누락하거나 객관적 자료를 제시하지 않고 선거 결과를 예측 보도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며 “여론조사의 객관성과 신뢰성 확보가 매우 중요해지고 있다”고 밝혔다.
안수현 언론인
관악을 여론조사 조작 논란 게임은 끝났지만 ‘정태호 1위 현수막’ 뒷말 여전 이번 4·29 재보선에서 완패한 친노 진영은 당분간 몸을 추스르기 어려울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 국회의원 선거구 4곳 중 유일한 친노 후보가 나섰던 서울 관악을은 문재인 대표가 특히 공을 들이면서 표밭을 다졌지만 결과를 뒤집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정태호 후보는 여론조사 조작 논란까지 불거지면서 도덕성에 상처를 입게 됐다는 평가다. 3자 대결 구도로 치러진 관악을 선거에서 여야는 여론조사 결과를 두고 상당한 신경전을 벌였다. 정태호 정 후보 측은 상승세를 탄 결과라면서 고무됐다. 그동안 추격 흐름을 타면서도 ‘골든크로스’ 기회를 잡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정 후보 측으로서는 호재를 잡았다고 판단했다. 정 후보 측은 이 조사 결과 내용을 중점적으로 홍보하는 한편 지역구 곳곳에 플래카드로 걸어 널리 알렸다. 분위기를 탄 자신을 밀어달라는 호소였다. 이에 대해 상대 당 후보들은 즉각 반발했다. 오신환 후보와 정동영 후보가 속한 국민모임은 “조작에 가까운 여론조사”라며 문제를 제기했다. 안일원 리서치뷰 대표는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행정관을 지낸 친노 인사로, 여론조사 방식 등을 왜곡해 정 후보에게 유리한 결과를 일부러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들이 제기한 여론조사 방식의 가장 큰 문제는 ‘반복비례가중치 적용 방식’에 대한 부분이다. 표본 수가 적은 여론조사의 경우 이 표본을 성별, 연령 등 인구 비율에 따라 가중치를 부여해 맞추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리서치뷰가 과거 총선과 대선 투표율로 가중치를 부여하면서 입맛에 맞게 결과를 유도했다는 것이다. 실제 조사 상세 내용을 살펴보면 전체 표본 431명 중 20대와 30대 응답자는 고작 31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30대 응답자의 62%가량이 정 후보를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등 ‘적은 표본수+왜곡된 응답’의 조합 결과라는 지적이다. 각 후보 진영은 선관위에 문제를 제기했고 선관위는 이 같은 지적을 받아들여 정 후보 측에 공직선거법상 여론조사 기준 위반이라고 통보했다. 정 후보 측은 이후 플래카드를 내렸지만 “선거법 위반이라는 지적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박했다. 리서치뷰 역시 “오차보정방법에 대해 선관위로부터 무방하다는 취지의 답변을 얻었다”며 “행정소송 등 법적대응에 나서겠다”고 발끈했다. 재보궐 선거는 끝났지만 여론조사의 신뢰성 문제는 정치권이 제도적으로 꼭 해결해야 할 난제 가운데 하나다. 여론을 읽는 게 아니라 왜곡을 한다면 누가 그 조사를 믿을 수 있을까. [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