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면수라는 사내가 있었다. 1874년 수원에서 태어난 반가의 아들이었다. 공자왈, 맹자왈, 하는 전통교육이 그를 반듯한 양반으로 만든 모양이다. 그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위태하던 조선을 위해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꼈다. 그는 함께 살아내야 하는 조선의 백성들에게 책임을 느꼈다. 한글도 모르던 백성이 태반인 때, 그가 선택한 것은 교육이었다.
조선 사회에서 양반으로서 많은 것을 누린 그는 뜻을 함께 하는 동지들과 함께 가진 것을 털어 학교를 세웠다. 백성이 똑똑해져야 나라가 튼튼해진다는 거였다. 그 학교가 수원에서 가장 유명한 신여성 나혜석이 나온 삼일학교였다. 그는 1907년에는 수원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망했다. 얼마나 큰 좌절인가. 그의 나이 서른일곱. 그 시절 서른일곱은 새로운 꿈을 꾸기 힘든 중년이었다. 모든 것을 접고 암울한 시대에 그럭저럭 적응하면서 잘 먹고 잘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폭력적으로 한반도를 점령한 일제에 무릎 꿇고 자존심을 버리고는 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가진 것을 모두 팔아 만주로 가서 민족학교를 세웠다. 거기서 독립군들을 키웠다. 빼앗긴 들의, 그들의 봄이 아니라 그 들을 찾아 우리의 봄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부창부수였다. 부인 전현석은 만주에서 객주집을 하며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먹여주고 재워주었다. 당시 독립군으로서 전 여사의 밥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다고 한다. 또한 그 집은 독립운동에 필요한 무기보관소이기도 했다. 그 시대를 연구하는 사학자 박환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필동 임면수 선생은 삼일학교를 세운 근대교육자이자, 1907년 수원의 국채보상을 이끈 자강운동의 선각자였다. 나라가 망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양성중학교 교장으로 독립군을 길러내고, 부민단 결사대 대원으로 항일 무장투쟁을 이끈 독립 운동가였다.”
그는 결국 일본군에게 체포되고 고문과 매로 전신마비가 되어 돌아왔으나 고향 수원에는 거처할 방도 없었단다.
그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라고 권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그렇게 살다간 사람을 보면 분명히 우러르게 된다. 올해가 광복 70주년이다. 우리의 역사 속엔 그런 피와 눈물이 있다. 신념에 의해 의지가 생기고 마음이 열려 기꺼이 자기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의 헌신이 있다. 그들의 불행 속엔 불행 이상이 있다. 우리의 삶이 바로 그런 희생 속에서 꽃핀 것일 테니 그들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를 기억하는 것이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