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프로축구선수협회 ‘2015 올해의 선수상’ 여성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지소연. 사진제공=KFA, 지소연
먼저 지소연의 화려한 프로필을 살펴보자. 열다섯 살이던 지소연은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에서 최연소로 태극마크를 달았고, 17세 이하 대표팀에선 14경기에 출전해 11골을, 20세 이하 대표팀에서는 17경기 출전, 13골을 기록했다. 2010년 20세 이하 월드컵 3위를 이끌었고, 실버볼(MVP 투표 2위) 실버슈(득점 2위, 8골)를 휩쓸었다. 지소연은 지난 10년간 A매치 74경기에 출전해 38골을 터트리며 여자선수 A매치 최다골 기록을 경신했다. 한마디로 여자축구계의 ‘넘사벽’이다.
지난해 1월, 일본 고베 아이낙 소속이던 지소연은 WSL 첼시 레이디스로 전격 이적했다. 첼시 레이디스는 지소연 세계 최고의 축구클럽 중 하나인 첼시의 여자팀으로 회장은 첼시의 전설인 존 테리다. 지소연은 첫 시즌 19경기에 출전, 9골을 터뜨리며 중하위권을 전전하던 소속팀을 리그 2위로 수직 상승시키는데 일조했다. 팀은 유럽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따냈고, 지소연은 이적 첫 해에 WSL 선수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는 겹경사를 누렸다. 대한축구협회가 선정하는 올해의 여자선수상도 2012년을 제외하고 4번(2010, 2011, 2013, 2014년)이나 수상했다.
사실 지소연이 가장 뛰고 싶었던 리그는 미국이었다. 여자 축구 강국으로 꼽히는 미국에서 더 높은 꿈을 향해 달려가겠다는 의지가 강했지만, 3년간의 일본 고베 아이낙 생활을 마무리하고 떠난 다음 행선지는 영국이었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당연히 난 미국으로 가고 싶었다. 그러나 첼시 레이디스의 엠마 감독님이 나를 간절히 원했다. 다른 팀도 아닌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명문팀인 첼시의 여자축구팀이고, 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는 팀인 것 같아 고민 끝에 계약을 맺었다.”
축구 전문가들은 해외파 지소연(첼시 레이디스·왼쪽)과 박은선(로시얀카·오른쪽)의 가세로 6월에 열리는 여자월드컵에서 16강 이상도 기대해 볼 만하다는 견해다. 사진제공=KFA
“일본 아이낙에 입단할 당시엔 통역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구단에선 계약서에 명시되지 않았다며 통역을 구해줄 수 없다고 했다. 통역 없이 지내는 생활은 암흑, 그 자체였다. 개막전에 나서는데 감독님이 지시하는 걸 전혀 못 알아들었다. 대충 눈치로 어림잡아서 뛰었다. 나중에는 ‘될 대로 되라’는 생각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고생은 했지만 통역을 두지 않아 일본어가 빨리 늘었던 건 사실이다. 그렇게 7개월을 버티니까 조금씩 일본 생활에 적응이 되더라.”
악으로 깡으로 버텨낸 일본 축구 무대. 덕분에 지소연은 3시즌 내내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일본축구가 여자월드컵 우승(2011년), 런던올림픽 은메달(2012년)로 가장 잘나가던 시기에, 사와 호마레, 가와스미 나호미, 오노 시노부 등 일본 대표팀 선수들이 즐비한 아이낙에서 빼어난 실력을 뽐냈다. 매 경기 12㎞를 넘게 뛰어다녔다는 그는 그 거리가 팀 내 1, 2위를 다투었다고 한다.
덕분에 2011년 이후 3년간 리그 48경기에서 21골을 넣었고, 2012~2013 2년 연속 리그 베스트11에 선정됐으며, 2011~2013 3년간 국제클럽선수권에서 MVP로 선정됐다. 2013년엔 고베 아이낙 최초의 4관왕(정규리그, 컵대회, 클럽선수권, 일왕후배) 위업을 달성했다.
일본에서 화려한 커리어를 쌓은 후 영국으로 향한 지소연은 동양 선수들에 비해 체격 조건이 좋은 영국 선수들을 상대하며 힘에 부치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체격이 뛰어난 유럽 선수들을 상대하기엔 지소연의 하드웨어가 너무 왜소했다. 경기 끝나면 온몸이 멍투성이였고, 이리저리 차이는 바람에 허벅지와 종아리가 성할 날이 없었다.
“처음에는 진짜 무서웠다. ‘여기서 잘 할 수 있을까?’, ‘선수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까?’, ‘내 축구 실력이 통할까?’ 하는 의문부호만 가득했다. 일본에서의 성공이 동기부여가 되고, 자신감을 심어줬지만, 영국은 일본보다 더 큰 리그고, 선수들의 실력이 뛰어난 곳이라 내가 여기서 버텨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지소연은 WSL 데뷔 첫해 19경기에 출전해 9골을 터뜨려 7위였던 소속팀 첼시를 리그 2위로 끌어 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사진출처=첼시 레이디스
그러나 그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지소연은 WSL에서 그야말로 폭풍처럼 질주했다. WSL 데뷔 첫 해에 19경기에서 9골을 터뜨렸고, 지난 시즌 7위였던 팀을 리그 2위로 끌어 올렸다. 결국 그 해 영국여자축구협회가 주관하고 선수들이 뽑는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수상 소식을 듣고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그 상은 우리 팀뿐만 아니라 다른 팀 선수들도 참여해서 가장 높은 지지를 받은 선수가 받는 상이라 내가 다른 선수들로부터 인정받았다는 걸 의미했다. 지난 시즌 내 몸을 수놓았던 멍들이 값진 상으로 돌아온 듯했다.”
한편 지난 4월 30일 윤덕여 여자축구대표팀 감독은 오는 6월 캐나다 여자월드컵(6월 6일~7월 5일)에 나설 26명의 예비명단을 발표했다. 2010년 17세 이하 여자월드컵 우승 주역 여민지(22·대전스포츠토토) 이금민(21·서울시청), 20세 이하 여자 월드컵 3위를 이끈 지소연 정설빈(25·현대제철) 임선주, 그리고 2003년 미국 월드컵에 출전했던 김정미(31·현대제철) 박은선(29·러시아 로시얀카) 등이 명단에 포함돼 있다. 2003년 월드컵 조별리그 3패를 당했던 아픔이 있었지만, 해외에서 활약 중인 지소연과 박은선의 가세로 인해 한국은 16강 이상을 기대해 볼 만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4월 8일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인천국제공항공사 초청, 러시아와 친선경기에서 지소연이 골을 넣은 후 동료들과 기뻐하고 있다.
“월드컵은 내 인생의 또 다른 목표다. 우리가 본선에 오르려면 브라질, 스페인, 코스타리카 등을 꺾어야 한다. 상대팀 이름만 들어도 어마어마하지만 이변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대표팀에는 든든한 (박)은선 언니가 있다. 언니가 대표팀에 있고 없고의 차이가 엄청나더라. 사람들은 나와 언니를 가리켜 ‘스몰 앤 빅’이라고 부르는데, 언니가 대표팀에 들어오면서 내 경기력도 동반 상승하고 있다. ‘스몰 앤 빅’이 월드컵에서 어떤 일을 저지르는지 꼭 지켜봐 달라.”
박은선은 2012년 불거진 성별 논란 때문에 은퇴를 생각했을 정도로 마음고생이 심했다. 지난해 러시아로 진출하면서 서서히 기량을 회복해간 그는 패스와 골 결정력이 좋은 지소연과 함께 ‘괴물 투톱’으로 부상했다. 지난해 아시안컵에서 처음으로 손발을 맞춘 지소연은 대회 기간 동안 무려 7골을 터트렸다. 지소연은 A매치 74경기에서 38골을 넣었다.
키 182㎝의 박은선은 팀 내 최장신이자 강력한 파워로 상대를 압도하는 능력을 갖췄다. 득점 감각 역시 뛰어나 A매치 32경기에서 18골을 넣었다. 여자월드컵 사상 첫 조별리그 통과를 노리는 대표팀에서 지소연과 박은선의 조합은 윤덕여 감독의 자신감을 상승시키는 중요한 요인이다.
영국 생활 2년째를 맞이한 지소연은 든든한 ‘오빠’들 덕분에 이방인의 외로움을 덜 느끼는 중이다. 프리미어리그 스완지시티 AFC에서 뛰고 있는 기성용과 이청용(크리스탈 팰리스), 그리고 신혼 생활을 즐기는 박지성과 자주 교류하는 것은 물론 친구 윤석영(퀸즈파크레인저스 FC)과 만나 종종 식사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61㎝의 작은 체구의 지소연은 외국에서 경기를 할 때마다 가슴에 보이지 않는 태극마크를 달고 뛴다는 얘기를 전했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국제축구연맹(FIFA)에서 주관하는 발롱도르 수상이다. 즉 유럽만이 아닌 세계적인 선수로 인정받고 싶다는 의미다. 지소연의 경쾌한 발걸음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궁금할 따름이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22@naver.com